소설리스트

구원 말고 구혼 (116)화 (116/130)

116화

“새야!”

니키엘은 놀라 검독수리를 불렀다. 그러자 새가 제자리에서 두어 번 발을 굴렀다. 어서 열어 달라고 재촉하는 듯해 니키엘은 푸스스 웃음이 나왔다.

얼른 창가로 달려가 문을 열어 주자마자, 새는 날아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깡총 뛰어 창틀을 넘어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니키엘이 박수를 짝짝 쳤다.

“너 너무 귀엽다.”

저도 몰래 나온 감탄사였다. 새는 그런 니키엘을 흘끗 보다가 창가에 물고 온 들꽃을 내려 두더니 부리로 그것을 툭 쳤다. 너 주려고 가져왔어, 하는 무뚝뚝한 몸짓 같아 니키엘은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이거 내 선물이야?”

수리가 흑요석을 박아 넣은 듯한 눈동자로 니키엘을 빤히 바라보았다. 니키엘은 손을 뻗어 들꽃을 집어 들었다. 야생장미와 같은 종인 듯한 들꽃엔 망울이 아직 터지지 않은 꽃과 반쯤 피어난 꽃이 사이좋게 한 줄기에 매달려 있었는데 줄기에는 작게 가시가 달려 있었다. 니키엘은 수리의 부리가 티타늄만큼 강한 걸 알면서도 걱정이 되어 물었다.

“가시가 있는데 찔리진 않았어?”

수리는 그 말이 가당키나 하냐는 듯 별다른 반응 없이 푸드덕 날아가 니키엘의 침대 옆 콘솔 위에 올려진 제 전용 방석 위로 올라섰다. 강인한 부리에 대한 자긍심이 서려 있는 얼굴이었다.

그게 장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던 니키엘이 피식 웃자, 방석 위를 몇 번 밟은 수리가 안정감을 찾더니 그대로 편안하게 자리를 틀었다. 그곳이 제 자리임을 기억하는 듯해 기뻤다.

니키엘은 방 한구석에 놓인 빈 화병에 꽃을 꽂고는 그걸 한 번 바라보다가 수리를 향해 말했다.

“네 덕분에 방이 화사해졌네. 고마워.”

새는 치리리, 하고 작게 울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니키엘의 말에 대답하는 것 같아 귀여웠다. 어쩌면, 시들기 전에 물을 줘, 와 같은 잔소리일지도 몰랐다. 탁자에 놓여 있던 주전자를 들어 안쪽에 들어 있는 것이 물임을 확인한 니키엘이 화병에 물을 부었다. 새가 날개를 작게 퍼덕였다. 정답인 듯했다.

그때, 폴이 침실 문 밖에서 니키엘을 불렀다.

“전하, 목욕물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고마워. 오늘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폴도 이만 쉬어.”

니키엘은 저를 가만히 보고 있는 새를 향해 입술 위에 검지를 올린 채로 말했다. 꼭 비밀을 나누듯 말이다. 검독수리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한번 까닥였다. 영리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어 감동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저절로 올라간 입꼬리로 니키엘이 폴에게 다시 한번 말했다.

“새벽 출정이니까 정리할 것도 많잖아. 알아서 잘 씻을 거니까 걱정 말고.”

“네, 알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주무셔요, 전하.”

전이라면 잔소리를 시작했을 폴이 오늘은 날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쉽게 물러나 주었다. 니키엘은 복도를 나서는 폴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킥킥 웃으며 수리에게 다가갔다.

“방해꾼 보냈다. 형은 이제 씻어야 하는데 너도 같이 씻을래?”

그러자 새가 갑자기 흥분한 듯 날개를 크게 퍼덕였다. 치리리, 치리리리-. 꽥꽥 울기도 하는데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고 니키엘의 말이 몹시 못마땅한 듯했다. 니키엘은 놀라 수리를 잠깐 보다가 픽 웃었다.

“너 꼬질꼬질한 수리구나? 알겠어, 형 혼자 씻을게.”

새는 깨끗해 보였지만 괜히 놀리고 싶었던 니키엘은 어깨를 과장스레 으쓱이고는 침실에 딸린 욕실로 들어갔다. 침실과 연결되지 않은 반대쪽 문이 굳게 잠겨 있는 것으로 보아 오늘은 정말 폴이 목욕물만 준비해 둔 뒤 물러났나 보다.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느긋하게 목욕을 즐길 수는 없는 일이지만, 부쩍 추워진 날씨에 몸을 담그니 혈액 순환이 되며 즐거워졌다.

원정을 떠나면 당분간 이런 호사스러운 목욕은 꿈도 못 꿀 터라 아쉬웠다. 야영을 하는 일이 잦을 테니 말이다. 해서 니키엘은 꽤 정성스레 목욕을 이어 나갔다. 목욕물에서는 연꽃 향이 나서 향비누로 씻을 동안에도 자연스레 꽃향기가 퍼져 나갔다.

그렇게 정성 들여 씻은 니키엘은 탕에서 나와 준비된 영견으로 흘러내리는 물기를 닦은 뒤, 이제는 익숙해진 파자마로 갈아입고 욕실 밖을 나서려다가 깨달았다.

‘아, 그러고 보니 율란이 아기 새를 방으로 들이지 말라고 했는데.’

그러나 니키엘에게는 그 말을 들을 이유가 없었다. 논리적으로 납득하지 않는 이상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니키엘은 영견으로 머리카락에 남아 있는 물기를 두드려 말리며 단순하게 생각했다.

‘검독수리가 마물의 아형(兒形)이라 멀리하라는 건 아닌 것 같아. 그랬으면 말을 해 줬겠지.’

마물도 아닌데 저에게 꽃까지 선물해 준 수리를 이 밤에 내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밖으로 나선 니키엘은 야광석을 켜 두어 주홍빛으로 빛나는 침실 콘솔에 가만히 앉아 있는 새를 향해 말했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 너무 늦은 데다가 밖은 너무 어두워.”

니키엘은 어린아이를 어르듯 말하고는 저도 침대로 올라가 누운 뒤, 제 옆자리를 팡팡 두들겼다.

“이리 와서 형이랑 같이 자자.”

목욕은 싫다더니, 자는 건 괜찮은 건지 새는 그대로 푸득 날아와 니키엘의 옆자리에 가볍게 안착했다. 니키엘은 손을 뻗어 검독수리의 빛나는 검은색 깃털을 만져 주며 눈을 감았다.

“내일은 일찍 일어나야 하거든. 어딜 좀 멀리 가는데, 널 못 보고 가면 어쩌나 걱정했었어. 부상이 다 나았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그래도 걱정했거든.”

너무 많은 일이 있었던 탓에 졸렸던 니키엘의 말투가 천천히 늘어지기 시작했다. 새를 쓰다듬는 손 역시 느릿해지더니 니키엘은 그대로 잠이 들었다.

야광석이 아직 켜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급속도로 잠에 빠진 니키엘을 내려다보는 이가 있었다.

“…….”

황금을 녹인 물에 머리 타래를 담근 듯 금빛이 일렁이는 고수머리에 회색 눈을 가진 청년이었다. 그는 건장한 체격에 비해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똑같이 금빛으로 일렁이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청년은 그대로 니키엘 옆에 쓰러지듯 누웠다.

그가 손을 뻗어 니키엘의 얼굴 위로 쏟아진 머리카락을 걷어 냈다.

“…니키….”

얼굴이 앳되어 보인다고는 하나 그처럼 체격이 건장한 남자에게서는 듣기 힘든 어눌한 발음이었다. 남자는 몇 번이고 속발음을 하듯 니키엘의 이름을 불렀다.

“니키…. 나의 니키….”

중얼거리는 모든 목소리는 잠에 빠진 니키엘의 속눈썹과 장밋빛 뺨, 백옥처럼 빛나는 관자놀이에 달라붙었다. 차라리 그것이 입맞춤이었다면 촉감이라도 남을 텐데 말이다.

남자는 그대로 니키엘의 콧잔등을 검지로 살짝 긁어냈다. 부드러운 손짓이었음에도, 니키엘은 간지러운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나, 온다. 얼른 어른, 되어서…. 그때까지 금지다. 다른 새끼들이랑 하는 뽀뽀는. 알겠지, 니키….”

자는 니키엘에게 다짐받듯 말한 남자는 니키엘의 머리 타래를 쥐어 끌어온 뒤, 그 위에 입을 맞췄다. 침실 안은 여전히 고요했다. 남자는 니키엘이 저의 옆자리에 눕기 전 목욕을 하고 나온 것이 좋았다.

“지독했어. 그 전, 짐승들의 냄새.”

니키엘을 만나러 왔을 때, 그에게선 네발짐승들과 한 마리 뱀이 묻혀 놓은 페로몬이 가득 풍겼다. 저들끼리 영역싸움을 하느라 아무것도 모르는 니키엘의 몸 위에 페로몬을 묻혀 놓은 것이 틀림없었다.

다행히 짝짓기를 맺은 것은 아니니 니키엘의 국부나 겨드랑이, 무릎 뒤 오금처럼 여린 살에까지 페로몬이 묻은 것은 아니겠지만, 어찌 되었든 불쾌한 일임은 명백했다.

오만한 늑대나 성질 나쁜 순록, 음침한 뱀 새끼가 이 달같이 보드라운 사람에게 어떤 짓을 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그를 지켜야 했다.

“수컷이 되려면….”

그러려면 성장해야 했다. 지난 며칠간, 지카리는 성장할 때마다 뼈가 저릿해 참을 수가 없었다.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훔비비 무리에게 공격당했던 그때도 말이다. 북부의 숲은 추운 데다가 음습한 구석이 있어 광증을 앓는 지카리에게는 그닥 좋지 못한 곳이었다.

몸 안에 가둬 둔 광증이 절절 끓어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카리는 훔비비들의 손에서 어떻게든 빠져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달같이 빛나는 이를 다른 짐승들이 날름 훔쳐먹어 버릴 것이 분명하니까.

“나 아팠어, 니키….”

전투 시 매번 겪을 수 있는 부상인데도 지카리는 드물게 어리광을 부리듯 니키엘의 어깨에 제 이마를 부비적거렸다. 수리로 있을 때는 니키엘이 저를 껴안고 얼러 줄 텐데 인간이 되면 그렇지 않을 것 같아 살짝 두렵기도 했다.

지난번 니키엘이 저를 알아보지 못했을 때 느꼈던 배신감을 아직 온전히 회복하지 못한 탓이었다. 지카리는 듣는 사람도 없는데 계속해서 어리광을 부렸다.

“커다란, 훔비비들…. 나를 다 공격했다. 나는 내 반려만 생각했다. 니키를 위해 싸웠다. 니키, 보고 싶었어….”

니키엘은 잠에 빠져 들을 수도 없는데, 지카리는 자신의 무용담을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그러다가도 마지막은 니키엘을 향한 어리광을 내뱉었다. 니키엘이 금방이라도 일어나 제 머리를 쓰다듬어 줄 것 같았다.

…어쩐지 아래가 묵직하고 열기가 들어찼다. 허벅지 안쪽 근육에 심이 단단해지고 피가 몰리는 기분이었다. 지카리는 니키엘을 끌어안고 싶어졌다. 충동을 견디기가 힘들어 니키엘을 연신 부르는 수밖에 없었다.

“니키…. 니키….”

몸에 올라온 열기를 어떻게 하지 못한 채, 지카리는 니키엘의 이름을 연신 불렀다. 니키엘을 껴안고 그의 보드라운 허벅지 사이에 제 다리를 밀어 넣었던 지카리는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지카리는 니키엘을 한 번 돌아보고는 망설임 없이 창문을 열어 등에서부터 솟아 나온 날개에 몸을 맡겼다. 어쩐지, 몸 안의 열기가 괴로웠다.

지카리 그리프 후작이 생전 처음 맞이한 발정기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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