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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말고 구혼 (117)화 (117/130)

117화

그날 밤, 니키엘은 또 한 번 꿈을 꿨다.

한 톨의 먼지 안에서 태어난 우주는 깊고도 넓었다. 무저갱처럼 끝이 안 보이는 별들의 요람이었다. 그는 그 광활함 속에서 두 번째로 태어난 생물이었다.

‘너, 웃기게 생겼다. 너를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아마빛 백금발의 남자는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웃기게 생겼다는 건 어떻게 생긴 걸까. 어쨌든 남자는 웃고 있었다. 그는 남자에게 기쁨을 주었다는 사실에 가슴속이 뿌듯해졌다. 그러나, 기쁨은 또 무엇인가. 그는 홀로 떠돌던 작은 뱀이었다가 영생을 살게 되었다. 우주의 섭리를 알아도 산 아래 마을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무슨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나의 황홀한 누이께서는 저 하늘의 달이시지. 이 세상의 만물을 지배하시는 분이야. 누이에게 너를 소개할 거야. 네가 이 땅의 모든 진리를 깨달았다고 말씀드려 줄게.’

그러면? 그렇게 되면 나는 무엇이 되는데? 그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남자는 그런 그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바닥을 기던 뱀이 거대해지고 민가의 문짝만 한 비늘을 가진 태산 같은 무언가가 되었다. 남자는 뱀에게 이제부터 너는 용(龍)이라 하겠다 말하였다. 남자가 그렇게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는 용이 되었다.

남자는 그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었다. 설골을 움직여 좁아 든 목구멍 틈새로 소리를 비집어 내고 혀와 입술을 오므려 조음해 내는 모든 소리로 그의 이름을 지어 준 것도 남자였다.

‘이름은….’

‘…….’

‘그래, 나시우라고 하자. 산스브리어로 나의 밤이라는 뜻이지.’

그의 세상은 광활할 뿐인 우주와 남자가 전부였다. 태어나 처음으로 제 이름을 알게 된 가장 첫날부터.

‘나의 냇, 저걸 봐 봐. 노을이라고 하는 거야. 나는 이 시간을 사랑해. 다가올 밤을 기다릴 수 있거든. 밤이 오면 누이께서 만물을 지배하실 거다. 나는 그때를 기다리며 하루를 보내. 사랑한다는 건 그런 거야.’

아니. 당신은 틀렸다.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다. 당신을 사랑해 왔던 그 순간부터 나는 노을보다 눈부시고 태풍보다 강렬하며 끓어오르는 진흙처럼 어두운 무언가를 홀로 견뎌내야 했다. 당신이 말한 아름다움이 사랑의 전부라면, 당신을 기다려 오던 모든 날들에 몰아치던 것은 사랑 따위가 아니다.

그걸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쩌면 이 영생은 그 감정을 정확히 설명하는 언어를 찾기 위한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실패했다. 실패했다. 나는 실패했다.

“당신은 모른다.”

그는 남자의 수없는 환생체 중 가장 나중에 태어난 이의 머리맡에 서 있다. 단백질과 유기질, 무기질이 섞여 만든 무르고 연약한 남자의 뺨을 바라본다.

남자는 너무도 약하게 태어났다. 아마, 남자의 마지막 환생체여서 그런 것이겠지. 이번의 기회를 놓치면 두 번 다시 똑같은 기회는 오지 않는다. 그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지금도 태양이 떠오를까 쫓기듯 남자의 꿈에 찾아들지 않았던가.

그가 그렇게 절망스러운 가운데도, 남자는 여전히 기적처럼 숨 쉬고 있었다. 색색 숨을 내쉬는 흉곽이 오르락내리락하면, 쪼그라들었다가 찬찬히 펴지는 폐포가 우주의 기적을 노래하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남자는 여전히 그의 세상 그 자체이나.

“그 괴물 같은 감정을 짊어진 채 억겁을 견뎌야 했던 시간들을, 그대는 알지 못한다. 나는 나를 변명치 아니할 것이지만, 그렇다고 당신을 동정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의 세상은 억겁과도 같은 시간 속에서 천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는 더 이상 살아 있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돌아오는 말에 주목했다. 입으로 빠져나간 그의 목소리는 공기를 뚫고 그 자신에게 되돌아온 창끝과도 같았다. 그렇다. 그는 남자를 동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수많은 세월을 홀로 헤매이게 만든 남자를 향한 슬픔이 만든 복수였다.

“이것도 사랑이라면.”

그는 남자가 알려 주었던 언어로 말을 한다. 잠이 든 남자는 미동이 없다. 그의 조용한 징벌은 종이 되길 자처하고 있는 네 마리 짐승에게도 공평했다. 그들은 그의 언어를 듣지 못할 것이다. 아무도 그가 하는 말을 듣지 못할 것이다.

늘 그랬듯이, 그 자신 말고는 아무도.

“나의 오시니스, 당신을 사랑해.”

별과 같은 언어는 벽에 부딪혀 소멸하는 행성처럼 반짝이다 스러졌다.

덧없고 황홀한 광경이었다.

니키엘은 꿈에서 깨어나자, 눈꺼풀 안쪽에 고여 있던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리는 감촉과 함께 눈을 떴다.

“…….”

창밖에는 여명이 트고 있었다. 출정의 날, 아침 해가 밝은 것이다.

***

“어딜 또 몰래 박쥐 새끼처럼 다녀오는 거야.”

“안 알려 준다.”

지카리는 율란의 서슬 퍼런 말에 코웃음을 쳤다. 박쥐라니. 지상 위를 나는 날개에게 포유류라는 말보다 더 모욕적인 것은 없으니, 율란은 작정하고 몸이 단 수컷처럼 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몸에 묻어 있는 연꽃 향유가 들개의 후각을 자극했나 싶어 지카리는 피식 웃으며 율란을 비웃었다.

“어지간히, 애가 타는 모양이다. 율란에게선…. 발정기를 해소하지 못한, 개 비린내가 난다.”

그 말에, 율란이 한쪽 눈썹을 지그시 올리며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짧은 사이에 꽤 많이 성장한 어린 조카를 보며 감탄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애새끼 주제에 입은 제대로 놀리는군. 그러나 나는 기어오르는 어린애를 봐줄 정도로 친절한 이가 아니다.”

“그만들 하세요.”

루시안이 머리 아프다는 말투로 치고받고 싸우기 직전인 두 금수를 말렸다. 레이먼이 팔짱을 끼고 앉아 무언가를 고심하다가 지카리에게 물었다.

“훔비비들이 뭐라고 했다고?”

“훔비비가 아니라 벡시였다. 멍청한 순록.”

지카리가 레이먼을 향해 말했다. 레이먼이 ‘저걸 그냥 죽여 버릴까?’ 하는 얼굴로 웃더니 다시 물었다.

“밤이 짧다, 지키. 네가 그 방정맞은 날갯짓으로 전하의 곁에 날아갔다 온 덕분에 더욱 짧아졌어. 벡시가 말했든 훔비비가 말했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감히 ‘마물’이 저들끼리 의사소통을 했다는 게 문제지.”

“…벡시는 여러 마물이 전쟁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정확히는, 전쟁이 일어나면 덩치가 커다란 훔비비들이 최전선에 설 테니 자신들은 뒤로 물러나 지적인 존재의 권속이 되자는 얘기였다. 훔비비들은 지능이 낮아 벡시의 조종 없이는 먹이를 구하지도 못한다.

그런데 그런 훔비비들이 최전선에서 벡시 없이 홀로만 선다는 얘기는 바꿔 말해 지적인 존재가 훔비비의 머리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지적인 존재는 훔비비를 지배할 수 있을까. 그 방법을 알아내는 것이 지적인 존재에 대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 무릇 병이란 그 원인을 찾아 고치면 대부분 치료가 가능하니 말이다.

율란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찌 되었든 각자 염병할 짓거리들만 하고 다닌다는 건 입증되었으니, 이번 대회에는 전하를 보호하는 것을 가장 우선시한다.”

“그러게 말이야. 난 또 내숭이 너무 심해서 늑대가 아니라 여우인 줄 알았지. 같은 갯과긴 하잖아?”

레이먼이 율란의 말에 이죽거렸다. 이로써 니키엘을 경계하자는 암묵적인 협의는 깨어져 버린 것이다. 지카리만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처음부터 말했다. 니키는 뭔가 다르다고.”

“존칭을 붙여요, 지키. 그분이 허락하지 않은 호칭으로 부르지 말고.”

루시안의 기색이 날카로워졌다. 지카리의 청색이 살짝 섞인 회색 눈이 검은 잉크라도 들이부은 듯 흑요석처럼 검게 반짝이며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흰자까지 검게 물들어 꼭 새의 동공과 같았다.

“뱀은 위선자다. 배를 땅에 질질 끌며 살 때부터 알아봤다. 너는 내 말을 믿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무도회에 니키와 손을 잡고 나타났지. 나는 너를 믿지 않는다.”

이번엔 루시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전 그저 지키가 그분을 얼른 쟁취하라고 등을 밀어준 줄 알았습니다. 형님에게 아우가 할 수 있는 다정한 응원으로요.”

“너는 개만도 못한 새끼다.”

“개와 비교하다니 기분이 더럽군요. 같은 난생인 게 모욕적일 정도로 허약한 새 새끼 주제에 말씀이 고약합니다, 지키.”

레이먼이 또 시작이군, 하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상석에 있던 율란은 북부로 가는 커다란 지도를 둘둘 말고 있었다. 출정 전날까지 지속된 전략 회의는 지카리가 북부에서 지적인 존재를 확인하고 돌아온 뒤부터 매일 밤 열렸었다. 이전에도 지적인 존재가 확인되지 않았던 건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마물을 군대로서 징집시킬 정도로 의식이 강한 존재의 출몰은 실로 몇백 년 만이었다. 정보는 많을수록 좋았기 때문에 정찰병인 지카리의 임무가 중요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부상을 입고 돌아온 것이다.

아무리 지카리가 완전한 성체가 아니라고 해도 훔비비 따위에게 당할 만큼 어리숙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누군가의 명령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훔비비 떼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대공포 한 대의 위력을 자랑하는 주먹을 휘두르는 사이를 피해 가며, 지카리는 힘껏 날갯짓을 해야 했다.

창공을 다 덮을 정도로 몸집을 불려 비행한 다음 저를 공격하려는 훔비비의 눈알에 발톱을 박아 넣지 않았다면 아예 수도로 귀환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훔비비들은 마치 작전을 짠 군대처럼 한 놈이 공격하면 다른 한 놈이 엄호하는 식으로 지카리를 공격했다. 그런 식으로 싸우는 마물은 없다. 오로지 인간만이 전술을 구사할 수 있다고 생각했건만 그들은 마치 숙련된 군인과 같이 지카리를 공격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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