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니키엘은 냇의 도움으로 말에서 내리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한테만 이렇게 달리 보이는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연유일까….’
이상하다 싶으면서도 선뜻 묻지 못하는 것은 미친놈 취급을 받을까 봐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니키엘은 온 힘을 다해 정상인인 척 굴어야지만 아직도 수도 사교계를 떠돌고 있을 ‘니키엘 대걸레 망나니’설을 일축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출정일이라 격려차 들린 것이오?”
니키엘은 대신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무도회가 끝나고 돌아갔을 줄 알았던 성기사단이 흰색 갑주를 입은 채 도열해 있었기 때문이다. 냇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성기사단은 금년 토벌 대회에 전하의 곁을 지키러 출정하게 되었습니다.”
그 말은 의외였다. 성기사단은 콧대가 높아 축성이 끝난 무기를 전달하는 일에도 참여하지 않는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예년과는 다른 그들의 행보에 니키엘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분명 처음 방문했을 때는 그런 말이 없던 걸로 아는데….”
“…께서 그러시길 원하니까요.”
냇이 검지로 하늘을 가리켰다. 태양을 뜻하는 듯했다.
‘보통 주신께서 그러시길 원한다고 하지 않나? 신에게 삿대질해도 되는 거야? 물론 난 불교이니 상관은 없다만…. 냇은 성기사단 총장치고 약간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단 말이야.’
그러나 깊게 생각할 일은 아니었다. 신앙심이 깊다고 성기사단 총장이 되는 것은 아닌가 보다, 라고 간단히 생각한 니키엘은 단상에 모여 있던 단장들에게로 다가갔다.
“오셨습니까, 전하.”
율란과 레이먼, 루시안이 니키엘의 옆에 찰싹 붙어 싱글싱글 웃으며 걸어오는 냇을 한 번 보고는 인사했다. 니키엘 역시 화답하다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지카리 그리프 후작이라는 이의 얼굴을 구경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모여 있는 수장들은 여전히 세 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지카리 그리프 후작은 따로 출정하는 것이오? 매번 보이지 않았던 터라 궁금했는데.”
“하등 신경 쓰실 일 없습니다. 그보다 전하, 아침은 드셨습니까.”
니키엘이 선물해 주었던 도안으로 만든 선글라스를 쓴 루시안이 살짝 웃으며 다가와 니키엘의 옆에 선 다음 자연스레 그를 에스코트했다. 중세인이 만든 것이니 모양이 희한하여 안 어울리는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막상 루시안이 쓴 선글라스는 그와 무척 잘 어울려 보였다. 그리고 안경다리의 중첩 부분에 작은 마노석을 박아 넣은 터라 예스러운 멋이 있었다.
도안을 주면서도 긴가민가했는데 제 생각보다 훌륭하게 구현한 게 볼 때마다 신기해 루시안의 선글라스를 바라보고 있는 사이, 그가 니키엘의 허리를 살짝 끌어당겼다.
옆자리에 서 있던 냇이 밀려나게끔 말이다. 냇이 피식 웃으며 바로 니키엘의 비어 있는 오른편을 차지하며 다시금 니키엘에게 말을 붙였다.
“전하, 투기가 심한 짐승은 곁에 두시기 번거로우실 겁니다. 같은 뱀이라도 급이 있는 법이고요.”
“응? 무슨 말을 하시는 겐지….”
그러나 냇의 말은 니키엘에게 잘 들리지 않았다. 주파수가 다른 라디오 채널을 수신하는 것처럼 노이즈가 잔뜩 낀 상태로 들렸기 때문이다. 니키엘이 다시금 묻자 냇은 고개를 저으며 별말 하지 않았다는 듯 물러났다.
주변인들에게도 냇의 말은 들리지 않은 듯했다. 니키엘은 의아하게 냇을 주시했다. 이와 같은 상황이 지금껏 몇 번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니키엘은 제 허리에 감긴 루시안의 팔에서 벗어나 냇을 향해 몸을 돌렸다. 루시안이 놀라 그를 내려다보는 걸 느낄 새도 없이 말이다.
냇이 당황에 빠진 루시안을 한 번 보고는 혀를 내밀어 아랫입술을 핥으며, 아주 맛있는 걸 보듯이 니키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전하.”
심하게 낮아 집중하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동굴 안에서 메아리쳐 퍼지듯이 공기를 울리는 냇의 목소리에 니키엘이 빠르게 눈을 감았다 떴다.
“아니…. 그냥 냇이 하는 말을 내가 잘 듣지 못하는 상황이 매번 있는 듯하여…. 혹시나 속상하실까 걱정이오.”
“무슨 그런 말씀을. 저는 뭇 짐승들과는 달리 넓은 마음을 가진 사내라서요.”
“뭇 짐승들…?”
니키엘이 그렇게 되물었을 때였다. 반갑지 않은 이가 목소리가 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동생아, 아침부터 외간 남성과 너무 붙어 있구나.”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먹어 치운다는 오명을 타파하고 싶었던 니키엘의 지난 노력을 단번에 무용지물로 만드는 발언에, 짜증이 난 니키엘은 한쪽 눈썹을 지그시 올리며 냇의 뒤편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왕태자였다.
그러나 왕궁의 예법상 그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는지라 니키엘은 대충 인사했다.
“형님 전하를 뵙습니다. 이냥저냥 한 아침입니다.”
“어여쁜 나의 아우. 이쪽으로 오거라.”
데면데면하다 못해 성의가 다 빠진 인사에도 왕태자는 괘념치 않는 건지 웃는 낯으로 니키엘을 향해 손짓했다. 제 쪽으로 오란 말이었다.
니키엘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저 손짓일 뿐인데 희롱당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율란이 입을 열었다.
“전하, 오셨습니까. 마침 출정하려던 참입니다. 전 단원, 승마하라.”
대놓고 왕태자의 말을 자르는 것과 다름없었다. 웃고 있던 라피엘의 표정이 파삭 깨어지는 걸 흘끗 본 니키엘은 냉큼 단상 아래로 내려가서는 종자의 도움을 받아 진저의 등에 올라탔다. 레이먼이 다가와 무언가를 니키엘에게 건네며 물었다. 꽤나 다정한 목소리였다.
“말의 이름은 지어 주셨습니까.”
“응. 진저라고 지었지. 너무 예쁜 아이야. 고맙소, 레이먼.”
“이름이 무척 잘 어울립니다. 이건 각설탕입니다. 진저가 지쳐 보일 때쯤 하나씩 먹여 주시면 될 겁니다.”
“오, 고마워. 매번 받기만 하는군.”
레이먼이 건넨 것은 자주색 사철 채송화가 수놓아진 작은 주머니로, 안을 열어 보니 결정이 반짝거리는 각설탕이 들어 있었다. 소금과 설탕이 귀한 시대임을 아는 니키엘이 반가운 기색을 했다. 제아무리 귀하다 한들 왕자 궁에서 지내는 니키엘이 구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지만, 진저를 선물해 준 것에 이어 진저와 친해질 기회까지 만들어 준 것 같아 고마웠다.
‘무슨 생각으로 선물씩이나 하는지 아직도 모르겠지만 정성이 들어 있긴 하단 말이야.’
레이먼이 지난 저녁 주었던 선물들도 니키엘에게는 꼭 필요한 용품들이었다. 혹한기에 북쪽으로 가야 하는 니키엘에게 식지 않는 마법석을 선물해 주지 않았던가. 물에 닿으면 더욱 뜨거워진다고 하니, 목욕물에 담가 손쉽게 물을 덥힐 수도 있을 터라 야영 생활 하기엔 딱인 물건이었다.
“가납해 주시는 것 자체가 저의 기쁨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레이먼은 무척 부드럽고 세련된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목덜미와 귓등이 불긋불긋한 것이 이상했다. 지난번부터 저렇게 빨갛게 물들이는 게 신경 쓰이기도 했다.
감기에 걸린 것이 아니냐고 물을 찰나였다. 율란이 무뚝뚝한 어조로 니키엘을 불렀다.
“전하, 해가 말의 꼬리로 떨어지기 전에 대열의 머리로 오시지요. 출정해야 합니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재촉하는 율란을 보며, 니키엘은 자신이 시작부터 다른 이들의 시간을 잡아먹었나 싶어 빠르게 대답했다.
“오, 알겠네.”
그리고 그 무람없는 말투에 좌중이 헉, 하고 숨을 집어삼켰다. 레이먼 볼트윅 공작에게 반말을 하고, 오릭스 지멘츠 총장은 둘만 아는 애칭으로 부르는 듯하더니, 이제는 율란 발트에게까지 경어를 생략한 니키엘을 보며 도열해 있던 기사들과 출정식을 챙기기 위해 나와 있던 궁인들이 전부 다 놀란 것이다.
‘니키엘 오시니스가 망나니 태를 벗었다더니!’
그들은 하나같이 같은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지난 무도회에서 투르운 공작과 함께 등장했던 니키엘은 무도회에서 일어났던 불미스러운 일을 아주 슬기롭게 대처함과 더불어, 저주받은 가스파르의 흔적을 말끔히 복구해 냈다. 그러더니 이제는 수장들과 격의 없이 지내는구나 싶어 모두들 놀란 참이었다.
그렇게 되자 궁인들과 기사들, 여러 종자들의 마음속에 희망에 바람이 불었다.
‘안 그래도 니키엘 전하는 신성력이 뛰어나시다고 법황께서 인정하실 정도이니, 이대로 우리 수장을 선택하시어 광룡의 저주를 벗기기만 해 주신다면!’
각 가문의 기사단, 마법사단이 같은 희망에 차올랐다. 그를 보고 있던 성기사단도 마찬가지였다.
‘신성력이 뛰어나시다니 귀한 분을 몰라뵙고 천대하는 이따위 왕국보다야 저 빛나는 분을 신성국으로 모시고 가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도열해 있던 모든 기사들이 각자의 꿈을 품게 되었다.
‘니키엘 전하를….’
‘이테렌으로.’
‘울루킨으로.’
‘볼트윅가로!’
‘신성국으로…!’
‘저희의 단장과 혼인해 주소서, 전하!’
-하는 당사자의 의견과는 전혀 상관없는 꿈을 말이다.
“음? 갑자기 귀가 간지럽군. 아니, 진저야. 네 귀도 그러하니? 내가 긁어 주마.”
물론 우리의 니키엘은 그들 전원의 희망을 알지 못한 채 볏짚 색으로 찬란한 털을 가진 암말의 귀를 긁어 주기 바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