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그렇게 전 기사 단원이 정렬했다.
문제는 갑작스레 합류한 성기사단의 위치였다.
“우리는 전하의 옆을 원합니다.”
“우리가 아니라 총장 각하 혼자서 원하시는 거겠지.”
율란이 냇의 말에 한쪽 눈썹을 올린 채 대답했다. 대열의 순서는 이러했다.
전방의 양쪽 극단에 각각 두 명의 기수가 서며, 중앙에서 우편에는 율란이, 그리고 좌편에는 레이먼이 위치한다. 그리고 그들 뒤로 가지처럼 뻗어진 형태로 진형을 취한 율란의 검은 가시 기사단과 레이먼의 백록 기사단의 좌장군, 우장군들이 함께한다. 그렇게 기마 부대가 끝을 맺으면 그 중간에 루시안의 마법사단이 도열하고, 그 뒤로는 각 기사단들의 궁수 부대가 정사각형의 도와 열을 맞춰 여섯 개의 정사각형을 이루어 서며, 그 후미로 마물들의 토굴을 공격할 때 활약할 기갑부대가 따라온다. 또 그 뒤로 왕이 내준 보병들이 시종들과 식량 수레들을 호위하며 그들의 뒤를 마법사단이 또 한 번 식량 부대를 호위 한다.
성기사단이 배정받은 위치는 이때의 마법사단 뒷열이었다. 문제는 마법사단과 성기사단들의 사이가 좋지 못하다는 것에 있었다.
“어째서 우리가 주신의 은혜도 모른 채 저 자신이 기적을 일으킨다고 주장하는 것들 뒤에 서야 합니까!”
법황의 외당질이자 성기사단의 좌익인 유리히 키슈친이 큰 소리를 냈다. 이제 막 말에 올라타 출발하려나 싶었던 니키엘이 뭔 일인가 싶어 고개를 쭉 빼내어 그들을 살폈다.
“키슈친. 어르신들 말씀하시는데 끼는 거 아니다. 물러나 있어.”
냇이 씩 웃으며 유리히를 만류했다. 미소가 살짝 불량해 보이는 것이 신실하기로 정평 난 성기사단의 총장이 짓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 꼭 돈 뜯으러 온 건달 같기도 했다. 그는 그런 무엄한 태도를 지우지 않은 채로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나는 신성력의 지엄한 주인이신 전하를 보필할 의무가 있습니다.”
냇의 말에 레이먼이 팔짱을 낀 채로 대꾸했다.
“아까는 ‘우리’라고 하지 않으셨나? 각하께서는 지금 개인적인 사심을 채우기 위해 출정을 지연시키고 있다는 자각이 없으신가 궁금합니다.”
“이게 어떻게 개인적 사심이겠습니까. 전하를 보호하는 것이 신의 뜻인걸요.”
능글맞게 웃으며 대꾸하는 냇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뾰족했다. 달라진 니키엘을 본 뒤 희망이 생긴 기사들과 마법사들은 니키엘이 자신의 군주를 선택하여 저주를 해방시켜 주길 원했다.
그러니 갑자기 끼어들어 저들이 대신 니키엘을 보호하겠다 주장하는 성기사단이 고깝게 보일 리가 없었다.
‘분명 가만히 계시던 전하를 꼬셔 신성국으로 가자고 헛바람을 집어넣을 것이 분명하다.’
저들도 먼저 니키엘을 군주의 성으로 데려갈 계획을 세우고 있어서 그런지, 도열해 있던 모든 출정 단원들은 성기사단의 속셈을 빠르게 눈치챘다.
그러나, 그때 남자들의 묘한 알력 다툼 따위에는 관심 없는 니키엘이 소리쳤다.
“일찍 떠나자고 이른 아침부터 모였는데 이런 일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일단 가면서 생각하면 안 되겠소? 해가 정수리에 뜨겠네.”
그는 심드렁하게 말하며 진저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긁어 주었다. 투레질 한 번 하지 않고 얌전히 있는 것이 니키엘의 손짓이 썩 마음에 든 듯했다. 루시안이 다가와 말했다.
“전하, 일단은 다음 휴식까지는 제 옆에 서시지요. 마물에 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오, 그러하시오? 그럼 당연히 말을 나눠야지. 나도 묻고 싶은 게 많았소.”
그를 노리는 남자 중 유일하게 니키엘의 취향을 전부 다 파악하고 있는 루시안이 승기를 거머쥐었다. 여기에 대고 전하는 군법상 전방 정 가운데 서셔야 한다고 주장할 사람은 없었다. 고지식한 율란조차 쯧, 혀를 차며 말 머리를 돌릴 뿐이었다.
그때, 왕태자가 단상 위에서 말했다. 저의 등장에도 주위의 관심이 쏠리지 않자 다소 짜증이 난 듯 찌푸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의 동생아. 떠난다니 이 형님이 걱정이 참 많다. 잘 다녀오거라. 비록 부왕께서 너의 출정을 위해 존귀한 시간을 따로 빼시진 못하셨지만 이 형이 대신 왔으니 너무 속상해 말고.”
말인즉슨, 왕자가 출정하는데 부왕이 나와 보지도 않으니, 너는 구운 지 나흘은 된 빵이나 다름없다는 말이었다. 그러자 니키엘이 루시안과 함께 나란히 서며 대충 대답했다.
“와, 아쉬워라. 안 그래도 이 아우의 나이가 부왕이 안 계시면 침대 밑 마물이 무섭다고 엉엉 울 바로 그 나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효심으로 부왕의 번다한 일들을 망칠 생각 하지 않겠으니 형님 전하께오서도 아침 바람이 차니 이만 들어가시지요. 매번 다녀오는 마물 토벌이 뭐가 그리 중하겠습니까. 나라를 짊어지느라 고민이 많으신 부왕께서도 번뇌를 더하고 싶지 않으셔서 그러셨겠지요. 제아무리 출정 단원들이 고생한다 해도, 그는 나라를 위함이니 죽어도 뭐, 애국 아니겠습니까. 부왕께서는 그리 생각하시는 게지요.”
“뭐, 뭐라?”
왕이 기사들의 충정에는 신경 쓰지 않으며 아예 그들이 죽거나 말거나 하등 관심 없다는 듯한 니키엘의 말에 당황한 라피엘이 되묻는데도, 니키엘은 시큰둥한 얼굴로 레이먼을 향해 “우리 언제 가?” 하고 물을 뿐이었다. 그 거리감 없는 말투에 귓등이 붉어진 레이먼이 해사하게 웃으며 “곧 떠날 겁니다.” 하고 바로 대답했다.
라피엘이 뭐라 더 말하기도 전에 율란이 기수에게 깃발을 올리라 명했다. 오시니스 왕국의 태양기가 양옆으로 올라가자 멍청한 표정으로 서 있던 호각병이 거대한 뿔피리를 들고 양 볼을 힘껏 부풀려 공기를 밀어 넣었다.
뿌우우-. 우우-.
신전의 넓은 앞마당에 도열해 있던 출정 단원들이 자세를 잡고 섰다. 출정식을 위하여 아침 일찍부터 나와 단원들을 격려하려던 라피엘이 입을 열기도 전에, 출정을 알리는 호각 소리가 울려 퍼진 것이다.
그렇게 마벌 토벌의 출정이 시작되었다.
***
진저는 잘생긴 만큼 무척 훌륭한 명마였다. 니키엘은 간혹 힘들지 않냐고 다정하게 진저의 목덜미를 쓰다듬어 주었다. 원래의 니키엘이 승마를 배워 뒀는지 몸치치고 나쁘지 않게 승마를 할 수 있었던 니키엘은 진저가 예뻐 죽겠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루시안의 말로는 북부로 향하는 길은 꽤 오랜 여정이 될 것이라 했다. 마물들이 창궐하는 겨울쯤에는 북부에 도착해야 하는데, 가을의 끝 무렵에 출발한 터라 육로로는 도저히 그 시기를 맞출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어떻게 하냐 물으니 마법국 장관인 루시안이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것은 저희 마법사들의 일입니다. 워프게이트를 열 수 있는 제 3원 이상의 마법사들이 있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것 같아도 나름 자랑스러운 얼굴이었다. 내향적인 성격의 루시안이 자랑할 때가 다 있나 싶어 니키엘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 말인즉, 마법사단의 사단장인 공께서는 어마어마한 대마법사라는 소리요?”
“그렇게 신을 놀리고 싶어 하는 표정으로 물어보시니 대답이 어렵습니다, 전하.”
“공께서는 나를 너무 잘 아는군.”
전부터 유머 코드가 맞는다고 생각했는지라 괜히 웃음이 나 하하, 웃으며 말을 모는 니키엘을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진득이 두 사람을 노려보던 레이먼이 불쑥 입을 열었다.
“요망한 뱀 새끼.”
“욕하실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라시리스가 자랑하는 사랑의 신이라는 별명에 맞지 않게 지금껏 웬 헛물만 켜고 계셨다는 말씀이지 않습니까. 대체 저렇게 될 동안 각하께서는 뭘 하셨습니까.”
미네르비나가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는데, 마치 레이먼이 한심하다는 듯한 어투였다. 레이먼은 인상을 찌푸렸다.
“남작이 보기에도 내가 한심해 보이겠지. 나도 그러하니 그만 말해요.”
“앞으로는 옆자리를 노리셔야 합니다. 경쟁자가 없을 때 미리 친분을 쌓아 둔 뱀 각하를 보시지요. 보고 배우시라는 얘깁니다.”
“알겠다니까. 그보다 루시안 저 새끼, 이 정도 거리면 저놈에게는 다 들릴 텐데도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걸 좀 보라고. 속이 시커먼 게 악취까지 날 것 같군.”
“흉한 투기는 그만두시고 대책이나 강구하셔요, 각하.”
미네르비나가 한심한 남동생을 보듯이 레이먼을 흘겼다. 그녀의 타당한 충고에도 레이먼의 이글거리는 눈길은 미소 짓고 있는 니키엘 옆에서 이것저것 말을 걸어 가며 대화를 이끌어 나가고 있는 루시안을 향했다.
얼굴에 쓴 저 바보 같은 물건은 또 뭔지 모르겠지만, 아마 니키엘과 연관이 있는 듯싶었다. 두 사람이 그것에 대해 화제를 주고받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뭐라고 하더라, 선구울이라고 했던가? 구울이라면 시체에서 탄생하는 마물인데 얼굴에 써서 어쩌자고? 레이먼은 그들의 대화가 궁금했다.
그리고, 니키엘과 루시안의 대화를 신경 쓰는 이들은 여기도 있었다.
“아이고, 저렇게 웃으시는 건 또 처음 뵙지 말입니다.”
“눈알 돌려.”
“…각하, 지금 저 따위를 견제하실 때가 아닙니다. 투르운 공작 각하를 좀 보십쇼. 벌써 전하와 함께 무슨 말을 저리 즐거이 나누시는지 이쪽은 신경도 쓰시지 않지 말입니다.”
웃는 얼굴을 빤히 보는 알레윈에게 경고조로 말한 율란이 어이없다는 듯, 알레윈이 투덜거렸다. 율란이 그의 부관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무언의 갈굼에 아침 훈련 메뉴가 추가될 위기를 느낀 알레윈은 바로 입을 다물었지만 이내 쯧, 혀를 차듯 말을 재차 이었다.
“그래도…. 저쪽 역시 이렇다 할 진전은 없을 겁니다. 전하의 성격상 벽을 많이 치시는 분이니….”
“저분에 대해 꽤 많이 아는군.”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를 견제하실 때가 아니라니까요, 각하.”
언뜻 보면 아무렇지 않아 보여도, 그를 오래 모셔 온 알레윈이기에 느낄 수 있는 희미한 불쾌감 담긴 말에 알레윈이 어이가 없다는 듯 대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