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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말고 구혼 (121)화 (121/130)

121화

그리고 그런 알레윈보다 더 어이없는 건 검은 가시 기사단의 좌장군, 베네딕 솜즈였다.

‘저놈이 미쳤나.’

알레윈이 니키엘에 대해 좋게 생각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율란에게까지 함부로 훈수를 둘 정도인 줄은 몰랐던 베네딕 이하 검은 가시 기사 단원들은 휘둥그레 커진 눈으로 알레윈을 보았다.

더욱이 어이가 없는 건 율란이 알레윈의 충고를 어느 정도는 들으려 노력한다는 것이었다. 중간중간 그들의 군주가 내뿜는 희미한 살기와 묵직한 불쾌감에도 기죽지 않고 충고조로 말을 하다니. …저 녀석, 혹시 훈련 내용을 추가하여 혼자서만 강해진 거 아니야? 훈련 외골수 베네딕 솜즈의 의심이 깊어지는 순간이었다.

백록 기사단과 검은 가시 기사단의 후미, 앞쪽 상황을 모르는 채 두 조로 나누어진 마법사단의 첫째 행렬의 앞머리에 서게 된 성기사단의 유리히 키슈친이 자신의 상관에게 말을 붙였다.

“전하의 옆자리는 왜 욕심내셨습니까.”

청렴하다 못해 곧 승천하여 주신 곁으로 갈 정도로 결벽적인 신실함을 갖고 있던 오릭스 지멘츠 성기사단 총장이 오시니스 왕국의 망나니 막내아들에게 관심을 보일 줄은 몰랐던 유리히는 그의 상관을 흘끗 바라보며 물었다.

‘…묘하게 평소와 다른 느낌이 난단 말이야.’

얼마 전부터 오릭스가 그답지 않다고 여겼던 참이다. 평소의 청렴한 성기사단 총장 각하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것은 때때로 이성을 차린 듯 행동하는 것에 불과했다. 유리히는 그것이 이상했다.

무도회에서나 오늘 본 것은 꼭 오릭스가 아닌 다른 사람 같았는데 말이다. 왕국에 오고 난 뒤에도 쭉 이상한 상태이면 또 모르겠는데 며칠은 또 방에 틀어박혀 식사도 거르고 주신을 향한 기도를 올렸다. 그러더니 오늘은 또 새벽 일찍부터 욕을 걸쭉하게 내뱉더니 출정식을 준비하러 가자며 성기사 단원들의 엉덩이를 뻥뻥 걷어차기도 했다.

‘이 염병할 놈들아, 해가 정수리에 떠야지 움직일 것이냐? 그 짐승 새끼들이 먼저 출발해 버리면 어쩌려고 늦장을 부려.’

걸쭉한 욕을 하는 것조차 지멘츠 총장과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보통 욕설을 사용하지 않았고, 부관들을 교육할 때도 경고하듯 한두 마디 하는 게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저도 모르게 빤히 바라보았을까, 총장이 씩 웃으며 유리히를 향해 말했다.

“시집가려고 그랬다, 왜.”

“네에?”

그러더니 한다는 말이 해괴하기 짝이 없었다. 시집을 간다니. 신에게 충심을 다 받친 사제, 그것도 성기사단의 총장이 할 말이던가. 유리히 역시 밤놀이를 즐기지만 대놓고 가정을 만들 생각은 하지 못하는데 이 청렴결백한 인물이 지금 뭐라는 건가 싶어 턱이 빠질 지경이었다.

신벌이 두렵지도 않은지 싱글싱글 웃으며 니키엘이 타고 가는 말의 볏짚 색 뒤꽁무니만 빤히 쳐다보는데, 두 눈에 정욕이 잔뜩 끼어 있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비강이 묵직해질 정도의 수컷 냄새가 도처를 떠도는 것이, 이 무리의 우두머리는 나다, 하는 느낌을 은연중에 퍼트리고 있었다.

유리히는 혹시나 싶어 말했다.

“…결혼은 사제가 이루지 못할 기쁨임을 아시지요?”

“아랫도리에서 고릿한 냄새가 나는 네놈이 말하니 웃기기 짝이 없군. 성병이나 조심하게, 키슈친 군행관.”

그렇게 말한 오릭스는 유리히를 두고 먼저 말을 몰아 대열의 뒤를 바짝 쫓았다. …뭔데 저렇게 심하게 말해? 유리히는 먼저 시작한 주제에 살짝 상처받아 눈만 껌뻑였다.

호구 같은 상관을 모시고 모처럼 왕국에 왔으니 끝내주는 관광을 즐겨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가끔 이상해지는 오릭스가 성국과 연락하여 이번 원정에 따라갈 수 있게끔 허락을 받아 오라며 들들 볶는 통에 요 근래에는 연애할 시간도 없었다.

오시니스의 수도인 라시리스에 오면 자신의 취향인 미인을 많이 만날 생각이었던 유리히는 간헐적으로 거부할 수 없는 중압감을 발휘하는 상관을 위해 외당부인 법황에게 ‘친애하는 당부님이자, 이 세계의 거룩한 빛이시여.’로 시작되는 낯간지러운 편지를 보내야 했는지라 쌓인 울분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괜히 짜증 나네, 저 인간….’

유리히는 자신의 상관의 번듯한 뒤통수를 다시 한번 노려본 뒤 말을 몰았다.

각자의 사정이 어떻든지 간에 시간은 흘렀고 꽤 오래 행군이 지속되자 출정 단원의 단장인 율란이 휴식을 명했다. 수도를 빠져나와 북부로 향하는 길목의 숲에 들어온 참이었던 출정단은 야영지를 모색했다.

“전하의 막사는 이곳이 될 것입니다.”

루시안과 마물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즐거웠던 것도 두 시간가량이 다였고, 이후 말을 계속해서 몰아야 하니 살짝 피로감을 느꼈던 니키엘은 야영지가 정해지고 레이먼에게 막사를 지을 곳을 안내받자 반가움을 느꼈다.

“고마워.”

“아닙니다, 그보다….”

선선한 늦가을임에도 불구하고 내내 말을 몰아 살짝 땀이 난 탓에 이마를 걷어 올리며 고맙다 하는 니키엘의 인사를 멍하게 바라보고 있던 레이먼이 싱긋 웃으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무슨 할 말이 있나 싶어 빤히 바라보자 그가 입술을 한 번 말아 물더니 말을 내뱉었다.

“출정 전, 왕태자 전하의 말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른 출정을 위해 저희 쪽에서 폐하의 배웅을 만류한 참입니다.”

“아, 그거?”

니키엘은 난 또 뭐라고, 하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신경 안 써. 부왕 얼굴 보면 뭐 힘이 강해지는 것도 아닌데 먹지도 못할 배웅 받아 봐야….”

니키엘이 중얼거리는 말에 다소 황당하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있던 레이먼이 피식 웃었다.

“그러하십니까. 혹여 신경 쓰실까 하여.”

“그렇게 안 봤는데 꽤 세심한 구석이 있어.”

니키엘은 별다른 생각 없이 레이먼을 향해 툭 내뱉었다. 감정을 살피는데 세심한 구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에 저에게는 왜 그랬나 싶었기 때문이다.

원망할 정도로 에너지가 넘치는 타입은 아닌 니키엘은 그의 말귀를 알아들은 레이먼의 표정이 굳자 어깨를 으쓱였다.

“말이 그렇다는 거야. 그보다, 내 시종은 어디 갔지? 목욕을 좀 하고 싶은데.”

“목욕, 말씀이십니까.”

그렇게 되묻는 와중에도 레이먼의 얼굴이 급속도로 빨개졌다. 표정은 평온한데 얼굴색만 저러는 것이 신기하기도 해서 빤히 보던 니키엘은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안 되는 일일까. 보아하니 저쪽에 작은 계곡이 있던데. 공께서 내게 선물해 준 비누도 사용해 보고 싶고.”

“아, 그걸 사용해 주시는….”

레이먼이 니키엘의 말을 따라 하다가 뭘 생각했는지 이제는 아예 손까지 붉어졌다. 표정도 무너져 당황한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있는지라 니키엘은 괜한 사람을 놀린 기분이 되었다.

“내가 뭘 잘못 말했나…?”

“아닙니다…. 그보다, 시종을 찾아 드릴 순 있으나 홀로 계곡에 가시는 건 위험합니다. 아직은 수도 근처라 마물들이 살지 않겠지만, 물에서 사는 마물들은 간혹 수도 근처에서 발견되기도 하여 안심할 수 없는 일이니 말입니다.”

“그럼 못 씻는 건가?”

“제가 전하의 호위를….”

그때였다. 뒤쪽에서 부스럭 소리가 들리더니 입꼬리만 올려 웃고 있는 루시안과 미간을 찌푸린 율란이 그들을 향해 다가온 것이다. 그들은 레이먼이 하려는 수작을 뻔히 안다는 듯 그 말을 막았다.

“호위는 저희끼리 돌아가며 정할 예정입니다.”

“오, 그건 좀 미안한데. 그럼 내가 씻지 않는 게 공들께서 더 편한 일이겠군.”

폐를 끼치기 싫었던 니키엘은 단순히 씻으려던 일이 호위 문제로 번지자 다소 곤란한 얼굴이 되었다. 율란의 한쪽 눈썹이 지그시 올라가더니 그를 향해 말했다.

“전하께서 신경 쓰실 만한 일은 아닙니다. 시종을 찾아오라고 사람을 보냈으니 곧 올 겁니다. 그보다, 저희끼리 말을 나눠도 되겠습니까.”

무뚝뚝한 말투라 말을 나눠도 될까, 하는 청유형이 아니라, 간단히 회의를 해야 하는데 걸리적거리게 거기서 뭐 하는 거야, 와 같이 들렸다. 니키엘은 다소 뻘쭘한 얼굴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니, 나는 그렇게 큰 품이 드는 일일지는 몰랐지. 그냥 등목만 하면 되는데…. 그게 아니면 공들도 다 같이 등목을….”

“전하와 저희들이 다 함께 등목을요?”

율란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니키엘은 이곳에서 저들과 자신의 성별이 동성이라 할지라도 간단히 함께 할 수 있는 등목조차 힘들다는 걸 그제야 깨닫고 또 한 번 어색한 얼굴을 했다. 그 표정을 빤히 보던 율란이 이내 입을 열었다.

“북쪽에 도착도 전에 사슴뿔을 뽑거나 뱀의 껍질을 벗기는 일은 하고 싶지 않으니 그런 말씀 마시고 저쪽에 잠시 계시지요.”

개소리하지 말라는 듯이 일축하는 율란의 기세에 밀린 니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몇 번이고 자신의 위치를 잊어 다소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을 하는 실수들이 있었기 때문에 빠르게 반성한 니키엘이 멀리 떨어지자 율란이 목을 긁듯이 그르렁거리는 음색으로 레이먼을 바라보았다.

“뱀 새끼 하는 거 보고 몸이 달았나, 공작?”

레이먼이 화사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러는 대공께서는 발정기 맞은 개새끼들이 그러하듯 낑낑거리기 바쁘시군요. 그 고고한 자존심에 니키엘 전하께 머리 한 번 쓰다듬어 달라 꼬리 치지도 못하는 터라 욕구 불만에 시달리시는 듯합니다. 그러지 말고 지금이라도 전하 앞에서 배를 뒤집어 깐 채 헥헥거리시지 그럽니까? 전하께서는 친절하시니 비루먹은 들개의 머리 정도야 쓰다듬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너 이 새끼-.”

“그만들 하십쇼. 전하께서 기다리시는 데다가, 이쪽이 불민한 표정들을 하고 있으니 불안해하시지 않습니까.”

루시안이 그들을 만류했다. 실제로 니키엘은 이쪽을 바라보긴 했으나, ‘계곡에서 씻는 거니 향유 범벅을 하자는 얘긴 못 할 거다, 폴 네 이놈.’ 하는 생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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