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율란의 말대로 저녁 식사는 막사 안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첫날이라 다른 기사들은 무얼 하며 보내는지 궁금해 둘러볼 생각이었는데 계획을 무산시켰다. 오시니스의 군사 총독이자 출정단의 단장인 율란 발트의 경고 아닌 경고를 무시하면서까지 밖에 나다니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까라면 까야지. 그것이 군대다.’
당연했다. 니키엘은 상명하복이 가장 중요한 집단에서 몇 년간 구르고 구른 병장 출신이니 말이다. 아무리 니키엘이라고 해도 쓰리 스타에게 개길 짬은 없었다.
‘이번 토벌 원정 내내 조용히 눈에 안 띄고 연구만 할 거야.’
그렇게 생각한 니키엘은 막사에 놓인 작은 탁자에 앉아 오늘 본 프니키오에 대해 서술했다. 변신형 마물이라는 것도 자세히 적어 둔 뒤, 날짐승으로 변했을 때 날 수 있는 걸 보면 변신한 그 동물 고유의 성질을 그대로 낼 수 있는 것 같다는 소견도 적어 두었다. 그리고 또 다른 변신형 마물들을 살펴보기 위해 루시안이 준 마법 함에서 가져온 책을 꺼내 뒤져 보았다.
“어휴, 드실 건 다 드시고 하셔요!”
식사를 할 때조차 생각나는 것이 있다 하면 양피지 앞으로 달려가 냅다 적어 내리자, 폴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니키엘을 만류했다.
니키엘은 결국 폴이 덜어 준 육두구를 뿌려 조리한 토끼 고기와 어린 양배추를 구운 것, 설탕에 무친 겨자씨와 무엇을 넣었는지 모르겠지만 매콤한 맛이 살짝 나는 옥수수 구이 등을 양피지가 쌓인 테이블 위에서 먹으며 프니키오에 대해 기술했다. 아직 여정의 초반부라 음식이 풍부한 편이었고, 책을 보며 먹는 식사는 꽤 오랜만이었기 때문에 기분이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그날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폴이 가져온 양칫물로 양치를 하고 두꺼운 양모 이불이 두 겹 깔린 막사의 간이침대에 누워 똑같이 두꺼운 양모 이불을 두 겹 덮은 니키엘은 잠을 청하려 했다. 온종일 저 나름대로 고단했으니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하지만 잠이 들기 전 막사를 나서려는 폴에게 밤 인사를 건넨 니키엘은 진저에 대해서 물었다.
“우리 진저는 잘 자고 있어?”
“오늘 처음 만나셨는데 그사이에 그렇게 정이 드셨어요? 말 여물을 먹이고 모포를 덮어 주었으니 충분히 휴식하고 있을 겁니다.”
폴이 웃으며 어린아이 대하듯 니키엘에게 다정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렇게 안심하며 레이먼이 선물해 준 돌을 끌어안고 밀려오는 수마에 몸을 맡겼을 때였다.
시선이 느껴졌다. 누군가 집요할 정도로 오래 니키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야, 뭐야…. 니키엘은 누구냐고 소리쳐 묻고 싶었지만 가위에 눌린 것처럼 입 밖으로 소리 낼 수가 없었다.
결국 니키엘은 천천히 몸을 움직여 경직 상태를 풀어낸 뒤 겨우 눈을 떴다. 그리고 희미한 어둠 속에서, 누군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누구야.”
니키엘은 상대를 향해 물었다. 잠깐 잠들었다 깬 목소리는 심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상대는 여전히 대답 없이 니키엘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찌푸렸던 눈매가 겨우 펴지고 시야가 돌아오기 시작하자, 니키엘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목에 걸어 두었던 호각을 찾았다. 입에 물고 불려는데 손이 다가와 니키엘의 손목을 막았다.
맞닿은 피부로부터 살짝 찌릿, 하는 감각이 일어났다. 마치 수장들에게 신성력이 흘러들 때처럼 말이다. 니키엘은 설마 싶어 말을 걸었다.
“지카리, 그리프…?”
그러자 남자가 갑작스레 니키엘을 껴안았다. 산책 가자는 말을 들은 대형견 같기도 했다. 니키엘을 껴안은 남자는 덩치가 커다랬지만 다른 수장들처럼 태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니키엘이 팔을 둘러 넉넉하게 껴안을 수 있을 정도였다.
악의는 없어 보이는데…. 아니지, 자는 사람을 내내 빤히 바라보다가 껴안은 것 자체가 성희롱이니 악의가 넘치는 걸까? 하는 의문에 머뭇거렸던 니키엘은 남자가 제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낮게 숨 쉬는 걸 느끼다가 그가 열이 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잠깐, 누군지 모르겠지만, 당신 지금 열나는데…?”
니키엘이 그를 떼어 내려고 해 봤지만 잘되지 않았다. 남자는 니키엘의 품을 파고들듯이 굴었다. 수장들보다 작다 뿐이지 남자 역시 덩치가 우람한 편이라 니키엘이 다 끌어안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때, 막사 밖에서 경비병이 횃불을 들고 순찰을 돌며 휙 지나갔다. 횃불이 막사 천을 비추며 빛이 들자, 니키엘은 그의 머리색이 금결처럼 찬란한 색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남자는 니키엘이 그라실 저택에서 하루 신세를 질 때 찾아온 밤손님이었던 것이다.
남자가 지카리 그리프 후작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잠시, 니키엘은 그를 알아보고 소리를 꽥 질렀다.
“너…! 그때 그놈이지!”
그러자 남자는 정답이라는 듯 니키엘의 품을 더욱 파고들었다. 신성력이 빠져나가는 감각이 심했다. 니키엘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수장들만 제게서 신성력을 가져갈 수 있었던 것 아닌가? 혹시 이 사람이 현재 아파서 신성력이 빠져나가는 걸까? 아니면 이 남자가 정말로 지카리 그리프 후작…? 여러 가지 가설 중, 결론에 도달할 만한 정확한 명제는 없었다.
니키엘은 일단 버둥거렸다. 누군지도 모르는 침입자에게 갑자기 끌어안긴 상태라 황당했기 때문이다.
“나와! 당신 뭐야, 도대체!”
남자는 살짝 밀려나 주었다. 니키엘은 그의 팔에서 힘이 풀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드디어 대화가 통한 것이다. 대체 정체가 뭔데 남이 자고 있는 막사 안으로 들어와 냅다 끌어안는 것이냐 따질 참이었다.
그때, 남자가 고개를 숙이더니 니키엘의 쇄골에 이마를 기댄 채 부비적거렸다. 꼭 응석을 부리듯이.
“나 아프다, 니키….”
“니키? 아니, 언제 봤다고 초면에 반말을? 정체부터 밝히라니까.”
니키는 아무리 봐도 니키엘의 애칭이 분명한데 이제 두 번 본, 그것도 두 번 내내 침실에 몰래 숨어든 놈이 저를 그렇게 부르는 것이 어이없었다. 그러나 상대는 그런 니키엘의 반응이 섭섭하다는 듯 응석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어떻게 나를 몰라줄 수 있나. 나는 그동안 니키만 생각했다.”
“그러니까 초면에 자꾸 왜 이러시냐고요.”
남자는 더 대답하지 않고 계속해서 니키엘에게 안기려고 했다. 덩치도 산만 한 놈이 안기려 들자 니키엘은 더 버티지 못하고 뒤로 넘어가 침대에 툭 눕는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니키엘의 위로 올라타다시피 하여 그의 가슴팍에 제 이마를 문질러 댔다.
“니키, 좋은 냄새가 난다…. 나의 니키….”
“아니 미치겠네. 이봐요, 이것 좀….”
그때, 남자의 목덜미에서 짙은 향이 올라왔다.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읏, 하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분명 체향인데도 후각이 아닌 피부로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어딘가가 간질거리고 견딜 수 없는 기분을 들게 했다. 니키엘은 미간을 찌푸렸다.
“잠, 잠깐만….”
“니키….”
남자는 멍하니 중얼거리며 니키엘의 위로 올라타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틈 없이 달라붙은 두 사람의 몸이 쓸리며 서로의 이곳저곳이 맞닿았다 떨어졌다. 니키엘은 두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읏…. 이봐요, 당신….”
“…하, 좋은 냄새가, 니키에게서….”
남자는 이제 아예 니키엘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숨을 들이마시고 있었다. 목덜미에 느껴지는 호흡이 간지러웠다. 니키엘은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무는 것에만 신경을 쏟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간 뭔가 큰일이 벌어질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저 멀리서, 율란의 목소리가 막사의 천을 뚫고 들렸다. 엄중한 사자후였다.
“지키-!”
거리감이 꽤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목소리의 남자가 움찔 떨더니 상체를 일으켰다. 그가 니키엘을 조용히 내려보는 것이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
“…….”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맞닿은 하체는 여전히 박동하고 있었다. 니키엘은 약간의 수치심과 이대로 있다간 어떻게 되어 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위기감, 온몸을 휘감은 당혹감에 혼란스러웠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끌어안겨져 이 지경이 되다니. 더욱 어이가 없는 것은.
‘씨발! 그렇게 싫지도 않아!’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그렇다. 모르는 남자와 몸을 부비적거리고 있는데 밀어내고 싶을 만큼 싫지도 않았다. 니키엘은 자신이 ‘안 돼! 돼 돼 돼….’와 같은 상황에 처했다는 걸 깨달았다.
번뇌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을 때, 저 멀리서 율란이 뭐라 소리치는 소리가 또 한 번 들렸다. 남자는 천천히 니키엘의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어둠 속에서 니키엘을 지그시 응시하더니 이내 등을 돌려 막사를 빠르게 나가 버렸다.
니키엘은 상체를 반쯤 일으키곤 남자가 나가 버린 방향을 보며 멍하니 두 눈을 깜빡였다.
“뭐야….”
그때였다. 횃불이 휙 가까워진 건지 막사 안에 불빛이 환해졌다. 밖에서 누군가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율란이었다.
“전하, 들어가겠습니다.”
율란은 대답도 듣지 않고 바로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니키엘은 붉어진 얼굴로 이불을 끌어와 제 몸을 가렸다. 제가 왜 그러고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말이다.
“무, 무슨 일이야?”
목소리가 형편없게 갈라진 게 자신에게도 느껴질 정도였다. 제발 자다 깬 사람같이 보이기를 바라며 율란을 바라보았다.
율란은 다행히 니키엘을 보지 않은 채로 막사 안을 휙 둘러보더니 니키엘을 향해 물었다.
“침입자가 들어오진 않았습니까?”
“응? 으응….”
아니, 왜 내가 거짓말을 했지? 니키엘은 당황하여 그게 아니라 침입자가 있었다고 말하려던 찰나였다.
“네, 그럼 편안한 밤 되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말이 나가기도 전에 율란이 인사를 하곤 휙 나가 버렸다.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뒤로 휙 누워 버렸다. 얼굴이 몹시도 뜨거워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