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한편, 율란 발트는 욕을 짓씹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이 새 새끼가….”
출정 첫날이라 수장들끼리의 회의도 없어 내일 있을 강행군을 대비하기 위해 빠르게 해산한 참이었다. 그 대신 마나를 안정시키고, 소드마스터의 검기를 통해 밤사이에 습격해 올지도 모르는 마물에게도 미리 경고하고자 검을 몇 번 휘두르려던 율란은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다.
서풍을 타고 미묘한 냄새가 실려 온 것이다. 발정기에 치달은 수컷이 상대를 유혹하기 위해 내뿜는 불쾌한 단내였다. 같은 수컷이 발정한 냄새에 더없는 불쾌감을 느낀 율란은 미간을 찌푸린 채 제 막사를 나와 지카리가 있어야 할 막사의 천을 들쳤다.
“…….”
당연하게도, 지카리는 그곳에 없었다. 율란의 살기가 금세 넘실거렸다. 갑작스레 증폭한 살기에 놀란 새들이 잠에서 깨어나 가지 위에서 푸드덕 날아오르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지키-!”
사자후가 야영을 위해 열과 행을 맞춰 늘어선 막사 천막들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기사들이 깨겠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처음으로 발정 열을 겪는 닭 새끼가 어디로 날아 들어갔을지 뻔했기 때문이다.
율란은 곧바로 니키엘의 천막으로 향했다. 무례를 무릅쓰고 들어가겠다고 말한 뒤 곧바로 입구의 천을 걷어 내자 니키엘이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상기된 얼굴을 하고 율란을 바라보고 있었다.
베개에 부벼져 헝클어진 백금색 머리카락과 장밋빛으로 상기된 뺨, 물기에 젖은 푸른 눈과 왠지 모르게 헐떡거리는 바람에 오르락내리락하는 흉곽과 공기 중에 퍼져 있는 수컷의 페로몬 향에 율란은 인상을 왈칵 구긴 채 니키엘의 천막을 그대로 나섰다.
“이 닭 새끼를 그냥….”
율란이 으득 이를 갈았다. 니키엘의 반응을 보면 그는 아직 지카리의 정체도 모르고 있는 듯했다. 니키엘은 저주받아 광증에 시달리는 수컷들에게 신성력을 주기 위해 그들의 페로몬이 주는 자극에 선천적으로 약하게 태어났다. 그런데 발정기면서 뻔뻔하게 다가가다니, 율란은 지카리를 앉혀 놓고 백금발의 소유자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 성교육을 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율란은 곧이어 기사들이 자고 있던 막사 위 나무에서 고로롱거리고 있는 수리 한 마리를 잡아 올 수 있었다. 전과 같으면 잡는 데에도 애를 먹고 잡은 후에도 발광하며 저항해 힘 좀 썼겠지만, 지금의 지카리에게는 그만큼 반항할 힘이 없는 듯했다. 발정 열을 겪는 데다 니키엘의 신성력을 과도하게 흡수한 탓에 전신이 이완된 상태였던 것이다.
수탉이라도 잡는 사람처럼 검독수리의 발을 부여잡은 율란이 장하게 푸드덕거리는 날갯짓을 성가시다는 듯 말리며 순록의 뿔이 그려진 막사의 천막을 벌컥 열었다.
“…뭐야. 아까 전 그 살기는 또 뭐고.”
브레만 입고 상의는 벗은 채로 오른손 엄지 하나로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던 레이먼이 갑작스러운 방문객에 자리에서 일어나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가슴을 영견으로 닦아 내며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율란을 바라보았다.
율란은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레이먼의 막사 안에 검독수리를 풀어놓았다. 내내 박쥐처럼 거꾸로 매달려 푸드덕거리던 새가 꽥꽥 울어 대며 날개를 퍼덕여 간신히 몸을 바로 했다.
“지키! 실내에선 날갯짓 금지라니까!”
레이먼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율란이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저 발정 난 수탉 새끼가 전하의 막사로 숨어 들어갔다. 성교육 좀 제대로 시켜. 이런 건 다방면으로 저명하신 볼트윅 공작의 업무 아니었던가?”
“뭐? 이놈의 병아리 새끼가 그새를 못 참고-. 아니, 그보다 그게 왜 내 탓….”
레이먼이 더 따져 묻기 전에, 율란은 그대로 천막의 천을 닫아 버리곤 등을 돌렸다. 아직도 니키엘의 상기된 뺨이 생각나 기분이 더러웠다.
그렇게, 그 밤은 누구에게나 번뇌 깊은 밤이 되어 버렸다. 물론 니키엘에게도 말이다. 니키엘은 새벽 내내 알 수 없는 열기에 시달렸다. 가슴이 간질거리고 다리 사이가 조여들어 깊은 숙면을 취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아침에 일어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열이 있으신가?”
아침 세숫물을 가져온 폴이 발갛게 달아오른 니키엘의 뺨을 들여다보고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니키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야.”
니키엘은 일찍 일어나 아침 운동이라도 할 걸 그랬다고 속으로 자조했다. 괜히 달뜬 몸이 몹시나 괴란쩍었다.
‘그러고 보니까 혼자서라도 풀지 않은 지 너무 오래된 것 같은데….’
이곳에 온 뒤로는 적응하느라 바빴고 그 전에는 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 밤샘, 철야, 밤샘, 철야의 나날들이라 욕구고 나발이고 식욕도 없어서, 그나마도 근 손실을 겪을까 봐 의무적으로 음식을 섭취했었다.
‘이럴 때는 운동이 직빵인데 이제 단체 생활이 시작되었으니….’
이렇게 욕구가 쌓였을 때는 근력 운동을 심하게 해 준 다음 쓰러지듯 자 버리는 것이 최고인데 행군 일정상 개인 행동이 용납될 수 없으니 미칠 지경이었다. 니키엘은 쯧, 혀를 차며 세수를 한 뒤 폴이 가져온 간단한 아침 식사를 했다.
여러 종류의 치즈와 버터를 바른 빵, 돼지의 뒷다리를 오래도록 훈연시켜 향을 입힌 햄과 비스킷, 꿀을 먹은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 승마용 브레와 튜닉, 망토를 걸쳤다.
폴은 무채색 일색인 니키엘의 차림이 아쉬운 듯했지만, 행군이 계속될 텐데 차림이야 편한 것이 최고라는 니키엘의 말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것만은 양보 못 한다며 니키엘의 눈 색과 비슷한 사파이어가 달린 작은 머리핀으로 머리를 고정하여 묶어 주었다.
“말 탈 때 머리가 날리는 게 귀찮았는데, 고마워. 폴.”
“뭘요.”
폴은 쑥스러운 얼굴을 했지만 니키엘은 진심이었다. 말을 달릴 때마다 머리카락이 입으로 들어가는 게 몹시 귀찮았기 때문에, 그대로 좀만 더 있었다면 신병 때처럼 머리를 빡빡 밀어 버려 오시니스 전역을 들썩이게 만들 수도 있겠다 싶었던 것이다.
“전하, 준비는 다 되셨습니까?”
밖에서 기사 하나가 니키엘을 불렀다. 막사를 해체하기 위해 허락을 맡는 듯했다. 니키엘은 천막을 걷으며 나갔다.
“다 되었네. 수고해 주시게.”
레이먼의 백록 기사단 소속인지 사슴뿔이 수 놓인 망토를 걸친 기사가 얼굴을 붉히며 아침 인사를 건넸다. 니키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으로 나아갔다.
튜닉 안에 숨겨진 가슴팍이 미묘하게 간질거렸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해야 했다. 그래도 잠을 설쳤던 간밤에 비해 기분 좋은 일이 있었다.
“우리 멋진 진저!”
밤사이에 헤어져 있었던 진저와의 재회였다. 니키엘은 오늘도 눈부신 진저를 향해 팔을 활짝 벌린 채 다가갔다. 진저 역시 니키엘이 반가운지 앞발을 살짝 굴렀다.
진저를 어릴 때부터 보살폈었던 백록 기사단의 종자 하나가 니키엘을 향해 예를 갖추면서도 그런 진저가 희한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는 사람에게 살가운 녀석이 아닙니다. 전하를 몹시 좋아하네요.”
“그런가? 나도 진저가 좋네.”
니키엘이 종자의 말에 함박 웃으며 진저의 목덜미를 연신 쓸어내렸다. 오늘도 잘 부탁한다고 작게 속닥거리기도 했다. 거의 둘만의 세상 같았다.
“전하, 좋은 아침입니다.”
루시안이 그런 진저를 흘끗 보며 다가와 인사했다. 그는 오늘도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니키엘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마주 인사하고는 진저의 등 위에 올라탔다.
루시안이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선글라스 안에 감춰진 세로로 쪽 찢어진 동공이 니키엘의 상기된 뺨을 훑고 있었다.
간밤에 새 새끼가 벌인 난동 때문에 율란의 살기가 넘실거리는 통에 검술 좀 익혔다 하는 기사들은 다들 숙면을 이루지 못했다.
마법사단은 예삿일이라며 서로서로 십시일반 하여 만든 물리력 쉴드를 마법사단의 막사 위로 얇게 쳐 소음 공해로부터 해방되었다지만, 백록 기사단과 검은 가시 기사단은 그럴 수 없었다.
이에 출정 첫날에 이게 뭔 일이냐고 항의하려던 백록 기사단이었으나, 자신들의 수장인 레이먼 볼트윅이 막사에 가둬 둔 지카리 그리프 후작에게 고래고래 무언가를 소리치는 바람에 그냥 입을 다물고야 말았다.
덕분에 간간이 눈 밑이 퀭한 기사들이 있었다. 루시안은 그 소동이 자신의 존귀한 분에게도 한차례 지나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빌어먹을 수탉 새끼. 얼마나 페로몬을 뿜어 댔으면 전하께서 아직도 미열에 해방되지 못한 분처럼 얼굴에 홍조가 도신단 말인가.’
루시안은 속으로 욕을 짓씹으며 니키엘을 향해서는 싱긋 웃어 보였다. 분노에 쪽 찢어진 동공을 보이지 않을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는 그 이후로도 니키엘에게 이것저것 물어 그의 불편을 해소해 주고자 했지만 늘 꼿꼿하던 상체를 살짝 무너트린 니키엘은 멍한 눈을 한 채 대답이 영 시원치 않았다.
그때였다.
“어…? 저자는….”
니키엘이 행군 준비를 위해 막사 밖으로 나와 정돈하고 있던 오릭스 지멘츠 총장을 바라보았다. 니키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릭스 지멘츠가 꼭 다른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상하네…. 오늘은 은발에 흑안으로 보인단 말이야?’
눈색은 매번 바뀌어 보이고는 했지만 니키엘의 눈에 냇은 늘 밤처럼 검은 흑발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회색빛이 도는 은발을 하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니키엘이 뚫어지게 지멘츠 총장을 바라보고 있자 루시안이 살기를 담아 니키엘의 시선 끝에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아침에 일어나 짐을 챙기고 있던 오릭스 지멘츠 총장은 등골이 오싹해져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어쩐 일인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오시니스 왕국의 막내 왕자와, 이상한 검은색 유리를 얼굴에 쓰고 있는 루시안 투르운 공작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