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오릭스 지멘츠 총장은 지난 며칠간 이상한 일을 너무 많이 겪었다.
그 일의 시작은 축성이 끝난 무기를 오시니스 왕국에 건네러 신성국을 출발했을 때부터였다.
꼭 몸 안에 영혼이 갇혀 있는 기분이었다. 의식도 있고 생활할 수는 있는데 자유 의지로 행동할 수가 없었다. 아니, 팔과 다리가 저절로 움직이는데 그렇게 행동해야만 한다고 누군가 속닥거리는 것과 같았다.
사실 축성이 끝난 무기를 긍지 높은 성기사단이 직접 오시니스까지 배송하게 된 일조차 이상했다. 하나 그때는 그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성기사단에 긍지가 높은 자신답지 않게 의심을 품지도 않은 채 말이다.
신성국을 떠나 오시니스 왕국에 도착하면서, 그 징후는 더욱 심해졌다. 간간이 기억이 끊겨 있을 때도 있었다. 하루는 그의 부관인 키슈친 행관이 물었다.
‘대체 왕자궁에는 무슨 연유로 방문하신 겁니까?’
오릭스는 당황했다. 자신이 왕자궁에 갔었다고? 그러나 그런 당황과 달리 오릭스의 입은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방문할 만한 일이 있어 간 것이지, 너는 대체 상관을 얼마나 머저리 등신으로 여기고 있길래 따박따박 따져 묻는 것이냐.’
‘아니, 전 그저….’
‘귀관이 너무 못생겨 더는 대화할 의욕이 없다. 물러가거라, 키슈친.’
평생을 존경하고 따랐던 법황의 외당질인 유리히에게 그런 식으로 심하게 말해 본 적은 처음이었다. 물론 속으로 망나니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얼굴이 못생겼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걸 입 밖으로 내뱉다니. 종교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런데도 입은 멋대로 유리히를 면박 주고 있었다. 오릭스는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수면 아래에 잠겨 있는 것처럼 소리는 웅웅거리며 들리고, 의식도 명확하지 않은 채로 마물 토벌대에 성기사단이 자연스럽게 합류하게 된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는 한편으로는 자신이 유리히를 통해 법황에게 마물 토벌 원정대에 끼게 해 달라는 요구를 보내라고 재촉했던 기억이 나는 것이다.
‘아니, 내가 대체 왜….’
물론 마물 토벌이 중요한 일이긴 하나, 성기사단 총장인 자신은 법황을 옆에서 수호해야 함이 맞았다. 그런데 난데없이 이 원정단에 합류하다니.
멀리서도 확연히 알 수 있을 정도로 살기를 내뿜는 저런 짐승들과 함께하는 이 여정에 말이다.
오릭스는 투르운 공작이 이상한 검은색 유리 너머로 저를 집요하게 응시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꼭 거대한 뱀의 독액을 뚝뚝 흘리는 송곳니 앞에 서 있는 기분이군.’
무시할 수 없는 살기임에도 불구하고 한껏 벼려져 한 사람에게만 날카롭게 겨눠진 터라 유리히 같은 둔탱이는 그 엄청난 살기를 느끼지도 못한 채 말 등 위에서 갑주를 입으며 코를 팔 손가락이 없다며 투덜거리기 바빴다.
저에게 살기를 내뿜는 이유가 짐작 가지 않는 터라 오릭스는 한숨을 내쉬며 저 역시 말의 등 위로 올라탔다. 그때였다.
‘저분이….’
어느샌가 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던 니키엘 오시니스와 눈이 마주친 것이다. 오릭스는 저도 모르게 황홀한 마음이 되어 니키엘을 응시했다.
신성력을 감지하는 능력이 훌륭하여 성기사단의 총장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오릭스는 니키엘의 넘치는 신성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실로, 신의 광휘라고밖에 할 수 없는 신성력이었다.
햇빛 아래 반짝이는 백금발과 푸르른 벽안이 저를 응시하고 있다고 생각하자 절로 영광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사교계에 퍼진 소문이 안 좋다 하여 걱정했는데, 오시니스에 도착한 뒤 본 막내 왕자는 소문과는 다르게 다소 털털한 구석이 있는 미인이었다. 때문에 개인적으로 인사를 나누고 싶었는데 기회가 닿지 않았다. 신성력 때문인지 왕자의 곁에만 다가가면 의식이 흐려지고 기억도 가물가물해졌던 것이다.
멀쩡한 정신으로 이렇게 그를 마주하니 신성력이 밖으로도 티가 날 정도여서 언제든 꼭 안면을 트고 신성국에 초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법황에게도 니키엘에 대해 다시 보고할 생각이었다.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막내 왕자가 사실은 넘치는 신성력의 소유자라는 걸 신의 대리자인 법황께서도 아셔야만 했다.
오릭스가 그런 생각에 빠져 니키엘을 바라보고 있는데, 율란의 말이 다가와 오릭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갑작스레 커다란 검은색 수말과 온통 검은 차림을 한 율란이 시야를 가려 버리자 꼭 밤이 태양을 가린 듯 어두워져 오릭스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를 가로막은 사람이 내뱉은 말은 더욱 가관이었다.
“아침이라 멍한 것이오, 아님 주신의 은혜만 믿고 늘 멍하게 있는 것이오.”
“…그게 무슨, 말씀이 심하십니다, 각하.”
결국 앞면을 쇠로 만든 장갑을 벗어 든 유리히가 코를 파다 말고 놀라 율란에게 따져 물었다.
오릭스도 놀란 참이었다. 오시니스의 대공은 무뢰한 같은 구석이 있다더니 이렇게 대놓고 사람을 면박 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는 인상을 찌푸린 채 율란을 향해 말했다.
“이게 무슨 무례한 말씀이시오.”
“보는 눈 낮추지 않으면 피 볼 일만 생길 거란 뜻이오.”
그렇게만 말한 율란이 고삐를 휙 잡아당겨 말의 머리를 돌렸다. 오릭스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오시니스가 야만국이던가? 이다지도 무례할 수가….”
“그러게 말입니다, 예하.”
두 명의 성기사는 그렇게 한동안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입을 벌린 채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
빠르게 막사와 짐들을 정리한 원정단이 행군을 시작한 시간은 이른 아침이었는데, 간밤의 일로 상태가 그렇게 좋지 못했던 니키엘은 몸을 움직이자 점점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궁에서는 승마를 하지 않았었다. 가만히 있는 말들을 괴롭히고 싶지 않았을뿐더러 보행으로 하루에 행해야 할 유산소 운동을 채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승마 역시 꽤 많은 운동이 되는 것 같았다. 특히 골반 저근육들이 활성화되어 몸의 중심 근육들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어쨌든 그것도 활동인지라 밤새 니키엘을 괴롭혔던 미열이 천천히 사그라드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오늘은 니키엘의 옆자리를 레이먼이 차지했다. 루시안이 후미에서 따라오는 마법사단에게 전달할 것이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열의 좌측 선봉을 맡은 레이먼이 자리를 옮길 수는 없는 일인지라, 니키엘 역시 대열의 맨 앞으로 나서 레이먼 옆에서 행군을 지속해야 했다.
그가 니키엘의 머리핀을 빤히 바라보았다. 다 큰 남자가 너무 화려한 걸 꽂았나 싶어 민망했는데, 레이먼이 꺼낸 말은 전혀 다른 얘기였다.
“전하, 미령하시면 제 말로 옮겨 타셔도 괜찮습니다.”
“으응? 그대의 말을 괴롭히는 일이 되잖아. 그건 싫어.”
레이먼의 청유에 니키엘은 고개를 저었다. 게다가 레이먼과 한 말을 타다니. 아이도 아닌데 같은 말을 타고 가기 싫어 거절하자 어쩐지 뒤에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뭔가 싶어 뒤를 바라보았더니 무표정으로 있던 백록 기사단의 우장군 미네르비나가 입꼬리만 살짝 올려 안 웃느니만 못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제 딴에는 최대한 공손한 미소인 것 같아 니키엘 역시 입꼬리를 옆으로 쭉 늘려 화답했다.
아침 일찍 시작한 행군은 초겨울 날씨라 쌀쌀한 편이었다. 니키엘은 품 안에 품고 있던 온도가 뜨거워지는 돌을 생각하고 레이먼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 보니 그 돌이 참 신묘하던데. 이렇게 좋은 물건을 날 주어도 되겠어? 그대도 추울 텐데.”
“순록은 추위에 강한 짐승입니다, 전하.”
레이먼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순록이야 그렇겠지. 그런데 넌 인간이잖아? 그렇게 말하는 대신, 니키엘은 레이먼의 귓등을 바라보았다. 추운지 벌겋게 달아올라 있는 것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인이 괜찮다 하니 남자들 특유의 알 수 없고 쓸데없는 자존심인가 싶어 두 번 권하지 않았다.
돌은 주위의 온도에 따라 더워지면 따뜻한 정도로, 추우면 뜨거울 정도로 열을 냈다. 그게 제일 신기했던 니키엘은 선물 준 이가 알았다면 기껏 만든 버터를 옆 동네 찰스에게 줬다는 오시니스 속담처럼 헛수고했다고 여길 만한 생각을 했다.
‘루시안에게 원리를 물어봐야겠어.’
마법석이라고 했으니 어떤 원리로 돌이 따끈해지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니키엘이 한창 현대에서 사용하던 USB 충전식 손난로와 이 세계의 마법석의 차이점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앞서가던 율란이 칼을 빼 들며 소리쳤다.
“좌장군, 좌측 공격에 대비하라-!”
그러자 곳곳에서 무기를 빼 드는 소리가 장황하게 울려 퍼졌다. 검은 가시 기사단의 좌장군인 베네딕이 기사단을 향해 손짓했다. 마법사단이 저 멀리서 펼친 쉴드가 율란이 선봉으로 있는 곳까지 펼쳐지는 데 채 3초가 걸리지 않았다. 마법진이 공중으로 떠오르며 마법사단이 주위에 펼쳐져 있던 마나를 한꺼번에 끌어와 공중에 약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뭔 일인가 싶어 멍하니 두 눈을 깜빡이던 니키엘의 말고삐를 당겨 머리를 돌리게 한 레이먼이 진저의 엉덩이를 살짝 차 냈다. 진저가 미네르비나에게로 향했다.
“미네르비나! 전하를-!”
“예, 각하!”
미네르비나가 진저의 말고삐를 쥐었다. 그때였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천지가 뒤틀리는 듯했다. 니키엘의 머리 위로 큰 그림자가 졌다.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삐이익-! 니키엘은 영화 백악기 놀이터에서 본 익룡의 울음소리를 들은 것 같다 생각했다.
니키엘은 숨을 헉 집어삼켰다. 저 멀리서 어마어마한 것이 원정단이 지나는 숲을 향해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