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 말고 구혼 (129)화 (129/130)

129화

그렇게 잠이 든 니키엘의 베갯머리 위로 무언가가 찾아왔다. 그것은 살아 있되 살아 있는 것이 아니요, 그것은 호흡하되 숨 쉬지 않는 자들의 공간이었다. 니키엘의 베갯잇 위로 누군가가 니키엘만을 위해 직조해 둔 꿈이 밀물처럼 밀려온 것이다.

그렇다. 꿈은 밤의 영역이다. 그리고 나시우는 제 영역 안으로 들어온 사랑하는 이를 곱게 보내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늘은 그대에게 무얼 보여 줄까.”

나시우는 고민했다. 예견된 날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그날을 위해 오시니스 곁에 짐승들을 모아 놓았다. 그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맡은 바 역할을 다 해 주길 바라며 나시우는 잠이 든 사랑스러운 이를 바라보았다.

“음, 너무 심각한 꿈을 꾸게 할 수는 없으니까. 오늘은 이걸 보여 줄게.”

나시우는 밤하늘을 베어 낸 듯이 기다란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어 올리며 잠이 든 이의 머리 위로 꿈을 내렸다.

‘냇, 악몽을 먹어 주는 동물도 있대. 그렇다면 그들은 밤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찾아가 악몽을 먹어야 할까. 불쌍하게도….’

문득 떠오른 목소리는 나시우가 요즘 매일같이 듣고 있는 목소리와 별다를 바 없었다. 나시우는 피식 웃으며 아주 오래전 들은 그의 말에 지금에서야 화답했다. 그것도 잠이 든 이의 머리 위에서.

“그럼 그대에게 악몽을 주는 나는 어떤 동물일까. 그대의 동정까지 내 것이었어야 하는데. 그게 못내 아쉽군.”

그러자, 니키엘의 꿈에 무언가 찾아 들었다.

니키엘은 꿈속에서 처음 보는 곳에 와 있었다. 그곳은 흰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건물 안이었다. 해풍과 세월에 무너지기 전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그리스의 신전 같기도 했다.

‘내가 왜 여기에….’

니키엘은 왜 자신이 별안간 이곳에 온 것인지 궁금해졌으나 일단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광산에서 나온 품질 좋은 흰 대리석으로 만든 듯한 신전은 고요했다.

기둥은 고개를 완전히 젖혀야만 그 끝이 간신히 보일 정도로 높아 천장 위에 그려진 그림들이 정확히 어떤 걸 표현한 것인지 구분 가지 않았다. 눈이 아주 좋은 이들만이 그것을 바로 볼 수 있으리라.

외관과 똑같이 흰 대리석이 깔려진 복도를 걸으며 니키엘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갑작스레 온 신전인데, 그 안에서 인기척이 전혀 들리지 않아 살짝 혼란스러웠다. 니키엘은 쭉 걸었다.

그렇게 한참을 끊이지 않는 복도를 걸었을 때, 드디어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렸다. 니키엘은 그이를 불러, 이곳에서 어떻게 나가야 하냐고 물어보려던 참이었다.

“…가혹하십니다.”

목소리는 격양된 상태였다. 누군가 기도 중이었을까? 니키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향했다.

“어찌 제게 그런…. 제가 당신의 종임은 변치 않지만 이는 정말 너무도 가혹하십니다.”

거대한 문 안에서,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니키엘은 천천히 다가갔다. 문은 아주 작은 틈을 두고 열려 있었다. 그의 눈동자만큼의 크기였다. 누군가 있나 보기 위해, 니키엘은 그 좁은 문틈으로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익히 아는 생김이 있었다.

“솔리우스시여, 당신이 제게 주신 모든 시련 중 이보다 더 잔인한 시련은 없었습니다.”

자신의 이복형이자 오시니스의 왕태자인 라피엘이었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로 솔리우스의 상징인 햇살을 본떠 만든 석상 앞에서 무언가 주절거리고 있었다.

‘저놈이 뭐라는 거야. 기도를 저렇게 열심히 한다고? …의외로 신실한 놈이네?’

오만한 구석이 있어 저 말고는 아무도 믿지 않을 것 같던 라피엘이 고개를 숙인 채 경건히 기도를 올리는 모습이 낯설었다.

니키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계속해서 라피엘을 주시했다. 그는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았다. 꼭 무언가를 깊이 고민하는 사람처럼. 왕태자가 하기엔 다소 경박한 몸짓이라 니키엘은 의아한 마음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였다. 라피엘이 고개를 들더니 솔리우스의 석상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주신이시여, 그것이 정녕 그 애의 시련이라면 한낱 당신의 종인 제가 막을 수 있을 리 만무합니다. 형 된 자로서의 마음은 아프지만….”

‘형…? 그러니까, 그 애라는 게 날 뜻하는 말이야?’

라피엘에게는 니키엘을 제외한 다른 형제는 없었다. 예상치 못한 상대의 입에서 자신에 대한 화제가 나왔을 때 의아해하는 사람처럼, 니키엘은 자신이 혹시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문틈을 통해 라피엘을 예의주시했다. 라피엘은 그런 니키엘의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건지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를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아니, 오히려 이 땅에서 주신의 은혜를 받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그러한 시련을 당연히 여기고 또 마땅히 기뻐해야 함이 옳습니다. 사사로이는 제 아우이나, 그 애 역시 위대한 당신의 권속이 아닙니까. 또한 그 애가 그래야만 당신의 위대한 뜻이 이 땅 위에 영광으로 내릴 테니….”

니키엘은 미간을 찌푸렸다.

‘뭐라는 거야, 저 새끼는. 무슨 시련을 말하는 건데.’

어이가 없었다. 뭔 시련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 답답했다. 다른 사람과 알 수 없는 음모를 꾸미는 장면을 봤다면 이렇게 마음이 찝찝하진 않았을 것이다. 관상을 봐, 그럴 놈이다. 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라피엘이 시련을 주니 마니 하고 있는 상대는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석상이었다.

“주신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형 된 자로서의 슬픔은 이만 묻어 둔 채, 저 또한 따르겠나이다.”

아, 그러니까 그 뜻이라는 게 뭔데. 둘이서 무슨 얘길 하길래 나를 갖고 시련을 주니 마니 하고 있는 건데. 니키엘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라피엘이 다시금 말을 이었다.

“자신을 제물로 바쳐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올 수만 있다면 니키엘, 착하고 신실한 저의 아우 역시 기쁜 마음으로 당신의 뜻을 따를 것입니다.”

제에무울? 기쁜 마음으로 뭘 해? 아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갑작스레 어이없는 말을 들어 교감 신경이 너무 흥분했던 까닭일까, 니키엘은 그만 잠에서 깨어나고야 말았다. 눈꺼풀을 번쩍 들어 올린 니키엘의 시야에는 하얀 대리석들도, 멍청한 이복형의 얼굴도 아닌 막사의 가죽 천으로 만든 천장만 보일 뿐이었다. 아침이었다.

“이런 거지 같은….”

“전하, 일어나셨습니까? 세숫물을 올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타이밍에 맞게, 폴이 막사 천막 밖에서 니키엘을 불렀다. 니키엘은 대충 대답했다. 꿈자리가 사나워도 이렇게 사나울 수가 있나. 쯧, 혀를 찬 니키엘은 폴이 가져다준 세숫물과 양칫물로 찝찝함을 씻어 내려 노력했다.

‘제물? 평화? 대체 무슨 꿍꿍이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일전에 오시니스의 건국 신화와 경전을 찾아보았을 때 인신 공양을 뜻하는 구절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라피엘은 마치 니키엘을 바쳐 평화를 이룩할 거라는 듯 말했다. 그것도 신전의 석상 앞에서. 그냥 꿈이라고 치부하기엔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오늘부터 행군이 다시금 시작될 테니 길게 끌 고민은 아니었다. 일단은 라피엘과 자신이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상태이니, 루시안에게 물어 오시니스에 인신 공양이라는 악습이 존재했는지를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생각을 정리한 니키엘이 폴이 가져온 음식을 먹으려던 때였다. 막사 밖으로 진 커다란 그림자가 보였다. 그에 폴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막사의 입구 쪽으로 다가가 방문자의 정체에 대해 물었다.

“누구십니까?”

“…볼트윅일세. 안에 전하께서 계시는가.”

폴이 놀라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니키엘을 돌아보았다. 니키엘도 잠시 놀랐다가 폴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폴이 재빠르게 응수했다.

“전하께서 안으로 들라 하십니다.”

일어나자마자 세수한 뒤 옷을 갈아입고 식사를 시작한 게 다행이었다. 늦은 시간까지 편하지도 않은 침대에서 미적거린 것이냐는 소리를 들을 뻔했다고 생각하며, 니키엘은 안으로 들어오는 레이먼과 눈을 마주쳤다.

“레이먼, 이곳까진 웬일인가. 이리 와 앉으시게.”

“…감사합니다.”

레이먼은 니키엘의 응대에도 막사 안을 먼저 둘러보았다. 무언가를 찾으려 그러는 행동은 아닌 것 같고, 타인의 공간에 처음 와 본 아이처럼 들떠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니키엘은 상황에 맞지 않게 상기된 그의 관자놀이를 흘끗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친구 집 놀러 온 기분인가? 여기저기 구경을 하고 있네.’

니키엘의 생각처럼, 레이먼은 꽤 오랫동안 막사 안 이곳저곳을 구경하듯 살폈다. 그때, 그의 눈길이 침대 옆 여행용 접이식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마법석으로 향했다. 레이먼이 니키엘에게 선물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레이먼의 시선을 알아본 니키엘이 슬쩍 웃으며 말했다.

“날씨가 추워져 저것을 껴안지 않고서는 잠에 들 수가 없어. 저렇게 귀한 선물을 주다니, 고맙네.”

그러자 레이먼이 부드럽게 웃으며 대꾸했다.

“감사 인사는 이미 넘칠 만큼 하셨습니다. 게다가 지척에 두고 요긴히 쓰시는 걸 보니 더 큰 기쁨이 없습니다.”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는 듯 들려 니키엘조차 민망해졌다. 레이먼의 말투는 유려한 구석이 있었고, 다정하게만 들렸던 루시안보다 좀 더 부드러웠다. 흠, 하고 목을 울린 니키엘이 레이먼에게 방문한 용건을 물었다.

“그보다, 아침 일찍 내 막사에는 웬일이야.”

“…새벽 산책을 나갔다가 귀한 열매를 발견하였습니다. 가납해 주시겠습니까.”

레이먼은 정중하게 물었다. 근래에 레이먼은 니키엘에게 시종일관 저렇게 다정한 말투와 정중한 행동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 변화가 어디서 시작했는지 몰라 니키엘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이왕지사 잘 지내는 것이 감정 소모가 없어 기꺼웠다. 토벌이나 마물 연구로 바빠 죽겠는데 계속 같이 지내야 하는 사람과의 관계까지 삐걱거리면 그보다 짜증 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곧 레이먼이 내민 것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나뭇잎에 쌓인 것을 꺼낸 레이먼이 생김새와는 다르게 오래도록 검을 잡아 투박한 손으로 나뭇잎을 걷어 내자, 흑요석처럼 반짝거리는 나무 열매가 드러났다. 오시니스 중부 지방에서 나는 별미, 서치베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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