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
억울한 목소리에는 참되고 바른 신빙성이 덕지덕지 묻어났다. 물론 서준이야 요한이 햄버거를 먹든 피자를 먹든 알 바 아니었으므로 그의 변명을 관대하게 받아들였다.
“뭐, 우리가 이곳으로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만 확인했군.”
그는 혀를 차며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렀다. 그런다고 녹 냄새가 날아가지는 않았지만 기분은 한결 나아졌다. 어차피 사용할 수 없는 자전거에 더 신경 써 봤자 제 속만 상할 뿐이었다. 서준은 가스마스크를 향한 분노를 내면에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준아, 진짜야. 내 혈관은 노폐물 하나 쌓이지 않았어. 깨끗하다고.”
“알았어. 그만해.”
‘이놈이 이런 성격이었나?’
요한이 운동을 꾸준히 하는 것 정도야 톰팃톳에서 모르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렇지마는 건강을 지독하게 챙기는 인상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한 영화의 남자 주인공 역할이 칠순 노인처럼 영양 성분 따지는 건 영 멋이 없지 않은가. 서준은 요한이 땀 흘려 뜀박질하는 모습을 볼 때면 쿼터백 설정이 자신에게 배정되지 않아 안도감을 느꼈다. 종종 요한의 무한히 샘솟는 체력은 탐났지만 노력과 우정, 땀은 전혀 부럽지 않았다.
왜인지 혈관에 집착하는 요한을 이끌며 엉망으로 구겨진 지도를 꺼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 난동에 용케 잃어버리지 않은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요한, 총성이 난 곳이 어느 쪽인지 알겠어?”
“확실하지는 않은데…. 여기쯤?”
끝을 둥글게 깎은 손톱이 C 구역을 가리켰다.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인상을 찌푸렸다.
“내 생각에도 이 근방이었던 것 같아.”
아마 전체적인 위치는 틀리지 않았으리라. 가스마스크가 C 구역의 정반대 편으로 몸을 숨긴 이유도 총성에 원인이 있으리라 짐작되었다.
곰곰이 지도를 살피던 서준의 눈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가스마스크가 간 쪽에 표시가 되어 있어.’
이 지도는 본래 보비의 물건이었다. 그는 지도에 세 군데 표시를 해 두었는데 가스마스크가 사라진 곳은 늪지였다.
서준의 머릿속에 유리그릇을 깨듯 짱알거리는 목소리가 울렸다. 한나는 정말 우주의 존재와 통신했어, 통신했어, 했어…. 서준은 대수롭지 않게 보비의 목소리를 콧바람과 날려 버렸다.
하도 해괴한 일이 벌어지는 밤이다 보니 별것이 다 뇌 주름 사이에서 수런거렸다. 그는 일말의 찝찝함과 함께 지도를 접었다. 이제 서준이 보비에게 해 줄 것이라고는 명복을 빌어 주는 게 전부였다.
“구 합숙소로 가자. 그쪽 건물이 캠프장 안에서는 가장 높아. 거기라면 뭐든 보이겠지.”
하지만 요한은 서준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다.
“네가 습격당한 곳이라며? 괜찮겠어?”
서준을 살피는 눈동자가 희미하게 초조함을 띠고 있었다. 이렇게 든든한 근섬유를 지녔으면서 왜 이렇게 불안해하는 걸까? 서준은 요한의 가슴팍을 두드리며 안심시켜 주었다.
“그런데 그 석궁을 가스마스크가 가지고 있었잖아? 석궁이 두 개 존재하는 게 아니라면 오히려 당장은 구 합숙소야말로 안전할지도 몰라.”
“음….”
요한은 더 고민했지만 더 나은 방안을 찾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구 합숙소 건물로 향했다. 다만 요한은 서준이 구 합숙소에 갔던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가는 걸 제안했다.
“수풀을 뚫고 가자고?”
“응. 준이 네 말을 들어 보면 그때 습격받았을 때 엄폐물이 없어서 더 당황스러웠다며. 주변을 살피지도 못했고 말이야.”
“그건, 그렇지.”
그는 정신없이 앞으로 내달렸다. 구 합숙소의 음산한 풍경도 나중에야 떠올렸지, 막상 도착했을 때는 입 안에 단내가 감돌고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건물 구조상 오히려 바로 아랫부분은 석궁을 날리지 못할 공산이 커. 가장 좋은 건 가스마스크 외의 석궁마가 존재하지 않는 거지만.”
“…….”
요한은 서준이 애써 외면한 점을 꼬집었다. 가스마스크가 어떻게 석궁을 손에 넣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와 석궁마가 따로 존재한다면 이보다 골치 아프기도 어려웠다.
“그러니까 제대로 만든 길이 아니라 수풀로 이동하자?”
“응. 우리가 랜턴을 켜고 움직이지 않으면 이 어둠 속에서는 명중하기가 힘들 거야.”
“하긴, 나를 노린 화살도 죄 빗나갔었지….”
서준은 자신이 습격받았던 때를 기억해 냈다. 생각해 보면 거리가 그토록 가까운데도 이상할 정도로 명중률이 낮았다. 그는 요한과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서준은 입술을 핥은 다음 입을 열었다.
“좋아. 은밀하게 움직이자.”
“어….”
요한은 한동안 침에 젖어 번들거리는 입술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
수풀을 통해 이동하는 건 의외로 힘들었다. 우선 제대로 난 길이 아니니 걷기만 해도 불편했다. 또한 랜턴으로 앞을 보지 못해 제대로 방향을 잡았는지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습격을 받을까 함부로 불을 켜지도 못했다.
그나마 요한이 앞장서 다행이었다. 서준은 따라가기도 벅찼다.
“요한, 우리가 제대로 가는 게 맞을까?”
“우리라는 건 달콤한 울림인 것 같지 않아?”
“내 생각에는 네가 설탕을 안 먹어서 그런 것 같아. 건강한 탄단지 식단을 멀리하고 탄수화물과 설탕, 지방으로 된 식사를 섭취하는 건 어떨까?”
“그런 생활은 근육의 적이야, 준아. 그리고 이쪽 길이 맞아.”
서준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요한만의 방위법이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한동안 조용하던 요한이 문득 입을 열었다.
“준아, 입술에 침 묻히면 터.”
“어, 어? 알지. 그런 건.”
“아, 아는구나.”
그는 왜인지 벌겋게 달아오른 귀를 만지작거렸다. 오른 체온이 다시 적절한 온도로 바뀌었을 때, 요한이 또 중얼거렸다.
“나중에 터서 아프면 꼭 말해.”
사소하기 짝이 없는 당부였다. 기묘한 평온함에 서준은 손과 발이 근질거렸다. 머리로는 지금도 썩 안전하지 않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조급하게 뛰지 않는 심장이 그의 상태를 여실히 나타냈다.
그리고 마침내 구 합숙소의 지붕이 보였다. 서준은 요한의 팔을 붙잡았다.
“그만, 이 앞에 늪이 있어. 하마터면 나도 빠질 뻔했어. 조금 돌아가자.”
서준의 말에 요한이 뺨을 긁적거렸다. 그는 어깨를 돌리며 몸을 풀었다.
“이 근처는 늪지가 많아서 위험…. 준아, 숙여.”
요한이 황급히 어깨를 눌렀다. 서준은 순간 상처를 떠올리고 몸을 굳혔다. 그러나 요한은 다친 팔이 아닌 반대편에 손을 올렸다. 순간적인 일이었고 깊이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그들은 숨죽이고 앞을 보았다.
발을 크고 묵직하게 내디디며 잇따라 걷는 소리가 점차 다가왔다. 서준은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쉴 것만 같아 입을 틀어막았다. 꼬챙이를 든 요한의 손등에 핏줄이 불룩 솟았다. 동시에 장갑을 낀 손이 튀어나왔다.
“거기 누구야?”
거칠게 쉰 남자의 목소리는 낯설었다. 윌리엄이나 보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는 몸을 숙인 요한과 서준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때마침 달빛이 남자를 비추었다. 군모를 쓰고 군복을 입은 남자였다. 어깨가 넓은 다부진 체격으로, 모자를 깊이 눌러쓴 탓에 코 아래밖에 보이지 않았다. 언뜻 드러난 피부는 화상을 입은 듯 벌겋게 수포가 올라왔다.
그 외에는 크게 다치지 않은 듯 행동거지에 불편함이 없었다. 그는 긴장한 어투로 요한을 향해 말했다.
“너희, 여기서 뭘 하고 있지?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마.”
“…….”
요한은 대답 대신 꼬챙이를 느슨하게 내렸다. 서준이 조심스럽게 요한에게 귓속말했다.
“혹시 여기 관리인은 아니지?”
“아니야. 생긴 게 달라.”
그의 대답에 서준의 높게 부풀었던 가슴이 내려갔다. 그는 군인을 향해 질문했다.
“누구십니까? 왜 이곳에 있는 거죠?”
“이쪽이 할 말이야. 너흰 왜 그런 걸 들고 있어?”
“그건….”
너무나 평범한 질문이라 서준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확실히 보통은 바비큐 꼬챙이로 사람 하나 꿸 자세를 하지는 않는다. 그때 요한이 군인의 허리춤을 보면서 말을 걸었다.
“총성이 들리던걸요. 저희야 여기서 캠핑하고 있었죠. 캠프장이잖아요.”
“아, 그렇지. 여기가 캠프장이지.”
요한의 대답에 군인은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고는 다소 뻔뻔한 태도로 대답했다.
“놀라게 했다면 미안하다. 호송 중이던 짐승이 탈출해서 쫓던 중이거든. 좀 과격한 놈이라 빨리 잡아야 해.”
“호송?”
“그래. 사실 더 빨리 잡았어야 했는데 아무래도 우리끼리 해결하려다가…. 어느 조직이건 말단이 괴로운 것 아니겠어.”
군인은 자못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서준의 빈약한 가슴이 군인의 말에 부풀었다.
‘우리라고 했지?’
군인, 그것도 다수의 군인이라면 얼마든지 가스마스크와 상대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총이 있다면 석궁보다야 쓸 만했다. 게다가 믿을 수 없게도 군인은 무전기를 꺼냈다.
“아아, 응답하라. 응답하라.”
휴대 전화도 되지 않고, 전화기는 선이 끊긴 하몽 캠프장에서 군인은 갑작스레 나타난 동아줄이었다. 서준은 감격해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군인에게 가까이 갈수록 물비린내가 났다. 마치 호수 깊숙한 곳, 혹은 식인 괴수에게서 났던 것과 같은 냄새였다.
“본부, 응답하라.”
무슨 조화였을까. 이때 달이 군인의 손을 비추었다.
그가 입술을 가까이 붙이고 중얼거리는 무전기는 끔찍하게 녹아 있었다. 도저히 제대로 된 물건이 아니었다. 부식된 무전기와 닿은 입술도 비슷했다. 화상이라 생각했던 군인의 피부는 산에 닿아 녹아내린 듯한 몰골이었다.
서준의 발이 멈추고 요한이 그를 다급하게 끌어당겼다.
1964년, 레드 레이크 캠프장.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던 그곳에서 대중은 한나 오 랜턴이 정말로 우주와 교신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러나 정부는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