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3
잠깐이나마 시간을 소비한 보람이 있도록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졌다. 물론 지금도 요한과 보비, 서준이 괴물의 간식거리가 될 위험은 사라지지 않았으므로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소꿉친구의 수가 대폭 줄어들 판국이었다.
그들은 구름이 지나갈 때만 겨우 얼굴을 내미는 달빛을 쫓아 이동했다.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낡은 지붕이 이정표라는 사실이 어처구니가 없어 크리스티나는 남몰래 쓴웃음을 지었다. 다행히 오늘 밤은 달이 야박하게 굴어 그녀는 씁쓸한 감정을 홀로 곱씹을 수 있었다.
“크리스티나, 멈춰.”
그때 앞서가던 윌리엄이 낮게 속삭였다. 그는 긴장한 듯 어둠 속을 쏘아보며 에어리를 업은 팔에 힘을 주었다.
크리스티나는 윌리엄의 팔뚝에 핏줄이 번뜩 서는 꼴을 보며 침을 삼켰다. 그녀는 터져 나오려는 숨을 틀어막고 앞을 보았다. 가슴팍이 크게 부풀고 이마에서는 땀이 흘렀다. 한결 느슨해졌던 긴장감이 돌아와 손가락과 발가락 끝, 몸의 말단에서부터 저릿저릿한 감각이 올라왔다.
깜빡, 깜빡…. 크리스티나의 눈꺼풀이 안구를 덮고 다시 열렸다. 그리하여 그녀도 알아차렸다. 저 깜깜한 곳 너머에 무언가가 숨을 죽이고 있었다.
“흡….”
아랫입술을 꽉 깨문 크리스티나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상념이 스쳤다. 괴물의 허연 몸뚱이, 내동댕이쳐진 시체, 드넓은 호수, 재밌게 놀다 오라고 인사를 나누었던 부모님, 자신이 젊은 시절과 똑 닮았다며 귀여워해 주시던 할머니의 뜨개질 바구니, 아무렇게나 버린 교과서, 보비가 내밀던 조잡한 포스터와 비디오테이프, 맹렬하게 달리던 신시아의 기니피그.
둥글게 부풀던 공포의 피막이 얇아져 터지기 직전, 그것이 걸어왔다.
그것, 다시 말해 그는 어깨가 넓고 키가 컸다. 얼굴 부근의 윤곽은 그림자로 인해 잘 보이지 않았다. 대신 남자가 걸친 옷이 확실하게 그의 신원을 드러냈다. 윌리엄에게 업혀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던 에어리가 목을 빼꼼히 내밀고 중얼거렸다.
“군인?”
남자를 빠르게 발견하지 못했던 것은 비단 어둠 때문만은 아니었다. 군복의 어지러운 디지털 무늬로 인해 주변과 구분이 어려웠던 탓이다. 윌리엄의 목을 감은 에어리의 팔뚝에서 슬며시 힘이 풀렸다.
군인은 경계하듯 선 그들과 거리를 두고 멈췄다. 그는 군모를 깊숙이 눌러쓰며 입을 열었다.
“너희, 여기서 뭘 하고 있어? 이곳은 위험하단다.”
“아….”
근육이 다 뻣뻣하던 몸에서 서서히 긴장이 풀렸다. 괴물을 만난 직후여서인지 크리스티나와 에어리, 윌리엄은 모두 경계심이 극에 달했었다. 서준이 말한 살인마와 석궁마까지 더해 상상은 안 좋은 방향으로 부풀었다.
하지만 군인의 어투며 행동거지는 그저 평범했다. 마치 그들이 목격한 괴물은 꿈에 불과했다는 듯이. 크리스티나가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저희 좀 도와주세요. 저희는 친구들과 캠프장에 놀러 왔는데 이상한 사람에게 습격받았어요.”
그녀는 에어리를 향해 눈을 굴렸다. 난데없이 괴물을 만났다고 설명해도 다른 사람이 믿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크리스티나의 의도를 파악한 에어리가 맞장구를 쳤다.
“맞아, 방독면을 쓰고 칼을 휘두르는데 미친놈이 분명하다니까? 얼른 경찰에게 연락해야 해요.”
“이 친구가 도망치다가 크게 다쳤어요. 다른 친구들도 있는데 따로 떨어져서 위험해요.”
“저런, 큰일이구나.”
군인이 혀를 차며 다가왔다. 그는 허리춤의 무전기를 꺼냈다. 에어리가 그것을 보더니 과장된 말투로 기뻐했다.
“맙소사, 우린 이제 살았어!”
군인은 눈물을 찔끔 흘리는 에어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는 그녀의 무릎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리 길지 않은 침묵 후 그가 가슴팍의 주머니를 열었다.
“우선 다리에 붕대라도 감는 건 어때? 비상용으로 챙겨 둔 게 있거든.”
“정말인가요?”
군인의 말에 윌리엄이 반색했다. 그는 에어리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에어리는 윌리엄의 부축을 받으며 땅을 디뎠다.
크리스티나도 계속 친구의 다리가 신경이 쓰였던지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에어리는 톰팃톳에서 가장 실력 좋은 치어리더였다. 온갖 묘기에 가까운 치어리딩을 할 줄 아는 그녀의 다리는 특별했다.
“아아, 다행이다.”
에어리가 흐물흐물하게 풀어진 얼굴로 혼잣말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버리고 먼저 가라고는 말했지만 역시 혼자 남는 건 두려웠다. 또한 무엇보다 공권력의 일원과 만났다는 사실은 큰 안도감을 안겨 주었다.
패착이라면 그것이다.
에어리나 윌리엄은 기본적으로 외향적이고 바깥 활동을 좋아했다. 서브컬처에 맹목적으로 파고들지도 않았다. 그나마 이들보다는 내향적인 크리스티나도 제 이름처럼 공구 용품을 만지는 걸 즐기는 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안도했다. 보비와 달리 상반신과 하반신이 나뉜 시체를 오래도록 껴안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그래. 더 가까이 와서….”
붕대를 손에 든 군인이 손짓했다. 에어리가 아픈 다리에 힘을 주지 않도록 주의하며 한 발자국 내디뎠다. 군모 밑 군인의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이상하리만치 다친 얼굴을 그때서야 발견했다. 군인은 일그러진 피부가 더욱 우글쭈글하게 변하도록 환하게 웃었다. 그 틈에서 핏물이 배어 나왔으나 개의치 않았다.
“악!”
그는 에어리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은 행동 덕분에 에어리의 상체가 앞으로 푹 꺾였다. 크리스티나와 윌리엄은 곧장 팔을 뻗었지만 군인이 더 빨랐다. 그는 총을 꺼내 윌리엄의 발치를 겨누었다. 그리고 총성이 울렸다.
타앙, 길게 끄는 총성은 그동안 영화나 드라마, 혹은 뉴스에서 들었던 것과 달리 소리보다는 충격에 가까웠다. 번쩍이는 빛과 고막이 먹먹해지는 자극.
크리스티나는 느리게 눈을 끔뻑거렸다. 그녀는 자신이 흙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어어….”
소음기를 부착하지 않은 지근거리의 사격은 크리스티나의 근육을 놀라게 했다. 그녀는 몇 번이나 침을 삼키고 손가락을 말았지만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마치 오감을 잃어버린 듯한 공포가 밀려왔다.
“윌리엄!”
영원히 이어질 듯 두렵던 무통은 에어리의 경악에 날카롭게 찢어졌다. 밀랍을 녹여 귓구멍을 막은 듯 느껴지던 감각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자리에 윌리엄의 비명이 자리 잡았다. 후각과 시각, 청각이 일시에 몰려왔다.
에어리가 울고 있었다. 그녀는 다리에서 피를 흘리는 윌리엄을 보면서도 움직이지 못했다. 군인이 그녀의 목을 팔뚝으로 졸랐다. 그는 총구를 크리스티나에게 돌린 채 입을 열었다.
“그래, 너희는 지금 어디로 가는 중이라고?”
그리고, 비로소 7월 5일의 자정을 앞둔 시간, 선지자의 관자놀이에 차가운 쇠가 닿는다.
서준은 앞을 보았다. 호흡이 마치 물고기가 뭍으로 나온 듯 간헐적으로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가슴이 마구잡이로 펄떡거렸다. 사리를 판단해야 하는 두 눈에는 목에 핏대를 세운 요한만이 비친다. 사실 머리통에 총구가 조준된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눈알을 굴리는 것이 전부였다.
군인은, 그러니까 정말 정체가 군인인지조차 확신하지 못할 거동 수상자가 망가진 무전기를 들고 중얼중얼 혼잣말하는 순간 서준의 척추를 타고 강렬한 불길함이 올라왔다. 미래를 예지하는 자의 날카로운 육감 따위가 아니었다.
우선 그의 차림새가 유난히 눈에 박혔다. 당연했다. 보비와 진하게 포옹한 시체도 군복을 입지 않았던가? 서준은 이를 악물었다. 왜 살아 움직이고 말을 하는 군인과 상체와 하체가 나뉜 시체를 연결하지 못했는지 제 어리석음에 치가 떨렸다.
서준은 입을 다물고 요한의 손등을 두드렸다. 미리 정한 수신호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평소 인상과 달리 기민한 성미의 요한이라면 이 흉흉한 낌새를 알아차리리라 믿었다. 사실 눈치가 바닥을 기어도 알아야 하는 때이기는 했다.
문제는 그들의 목적지는 저 앞에 있건만 군인이 정면을 가로막고 있다는 점이다. 서준이 뒷걸음질을 쳐야 할지, 아니면 홀로 낮게 흥얼거리는 군인의 주변을 돌아가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였다. 서준을 위해 변명하자면 매우 짧은 틈이었다. 그러나 광인의 시간 감각은 무릇 범인과 다르기 마련이다.
군인은 얼굴을 번쩍 들고는 서준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 가니? 어디 가니? 어디 가니?”
군인의 모습은 진실로 미치광이와 다름없었다. 서준은 자동 녹음기처럼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오글오글한 입술을 보며 등줄기가 섬뜩해졌다. 요한이 서준을 잡아당기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군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희는 친구들을 만나러 가야 해서요. 먼저 가 보겠습니다.”
“응? 아니야. 너희도 따라와. 내가 안내해 줄게.”
“아니요, 괜찮….”
그와 오래 대화하고 싶지 않았던 서준이 대답하자 군인이 요한을 향해 총을 꺼내 들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요한이 무심코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그는 속임수였다. 군인은 꼬챙이를 지닌 요한이 멀어지는 순간 곧바로 서준을 향해 달려들었다.
“준아!”
“큭!”
목을 조르는 팔뚝의 힘이 대단했다. 목젖이 압박당하자 손과 발에서 힘이 풀렸다. 핏물에 젖고 너덜너덜하게 녹은 피부의 냄새가 콧구멍으로 파고들었다. 시큼하고 어딘가 탄내가 섞여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군인은 관자놀이에서 미간, 그리고 정수리까지 총구를 미끄러뜨렸다. 새까만 머리카락을 총신으로 파헤쳐 두피를 건드렸다. 그는 요한을 향해 활짝 웃었다.
“극비 프로젝트야. 민간인은 몰라야 해. 극비 프로젝트니까, 이해하지? 따라와. 친구들을 만나게 해 줄게.”
***
구 합숙소 안으로 들어서자 그곳에는 꽁꽁 묶인 친구들이 선객으로 와 있었다.
1층 구석에 크리스티나와 에어리가 서로의 팔이 한꺼번에 결박되어 몸을 구긴 채 웅크리고 있었다. 그들의 팔을 묶은 건 에어리의 여름 점퍼였다. 심지어 셔츠까지 벗겨진 탓에 그녀는 상반신에 민소매 티 한 장 외에는 걸친 것이 없었다. 드러난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윌리엄은 더욱 상황이 나빴는데 그는 머리와 다리에서 피를 흘리며 정신을 잃고 지저분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양 손목은 에어리의 셔츠로 꽁꽁 묶여 피가 잘 통하지 않는지 어둠 속에서도 손가락 끝이 허옇게 뜬 것이 보일 지경이었다.
돌연 들리는 발걸음 소리에 크리스티나가 흠칫 놀랐다. 그러나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올린 그녀는 마주친 얼굴에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을 흘릴 듯 그렁그렁한 눈빛이 눈꺼풀에 가려진 뒤 쉰 목소리가 크리스티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요한! 우리를 구하러 온 거야?”
“안타깝고, 불행하고, 아쉽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