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6
억울함에 혀까지 꼬였다. 그녀는 눈물을 찔끔 흘리며 군인에게 삿대질했다.
“그래 놓고 우리더러 미끼가 되라고! 하지도 않았겠지만, 대체 뭘 믿고 그따위 계획을 세운 거야? 그 알량한 총? 혼자 총만 있으면 다 될 것 같아?”
“아니야. 나 혼자가 아니야. 우리 소대는 모두 나와 같이 있어. 봐, 내 옆에도, 옆에도 있잖아. 너희가 조금만 도와주면 가능해.”
군인은 에어리의 비난에도 눈을 번들거리기만 했다. 그러고는 제 양옆을 고갯짓했다. 그 모양새가 어찌나 섬뜩한지 서준은 무심코 그의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희뿌연 혼령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만이 있을 뿐이었다. 에어리가 허옇게 뜬 낯으로 윌리엄의 머리를 껴안았다.
“보비가 들었으면 좋아했을 텐데.”
그때 크리스티나가 망연하게 중얼거렸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보비는 어디 있어?”
뒤늦게 보비의 부재를 파악한 크리스티나를 향해 요한이 안타깝다는 듯 웃었다.
“보비는 이제 우리와 함께할 수 없어….”
아련하게 말끝을 흐리자 크리스티나가 양 손바닥을 내보이며 발을 굴렀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알아듣게 설명해 봐. 요한.”
“아, 가스마스크가 납치해 갔어.”
“뭐?”
설명이 너무 간략했다.
“경비 초소로 같이 가던 중에 가스마스크와 마주쳤어. 이쪽이 셋, 그쪽은 하나였지만 석궁을 들고 쏘아 대서 우리도 겨우 목숨만 건졌어. 보비는 건지지 못했고….”
서준이 은근슬쩍 끼어 말을 보탰다. 크리스티나가 입술을 뻐끔거렸다. 그녀의 창백한 피부가 점점 푸르게 질려 갔다. 지금까지 우주에서 온 괴물에게서 도망치고 정신이 나간 군인과도 사투를 벌였다. 그런 와중에 설마 하던 살인마가 기어이 등장하고야 만 것이다.
서준은 비록 미래를 꿈꿀 뿐 사람의 마음을 읽지는 못하지만, 크리스티나가 어떤 생각일지는 손쉽게 알아맞힐 수 있었다. 과연 예상한 대로 곧 그녀가 이를 갈며 소리쳤다.
“이 거지 같은 캠프장!”
가히 세상의 주인공과 같은 감상을 품어 감개무량한 순간이었다. 그때 에어리가 헛숨을 들이마셨다. 그녀는 윌리엄의 머리통을 부드러운 손길로 먼지투성이 바닥에 내려놓은 후 절뚝거리며 다가왔다.
“잠깐, 서준. 그러면 여기서 네게 석궁을 쏜 건 가스마스크였단 말이잖아? 젠장, 브래스가 아니었다니.”
에어리의 말에 크리스티나도 서준을 바라보았다. 부르튼 입술과 잔상처가 난 뺨, 거뭇하게 가라앉은 눈매…. 초췌한 안색이었다. 그러나 이 안쓰러운 몰골에도 서준은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문제는 그가 머뭇거리는 것 자체로도 대답을 얻기 충분하다는 점이다. 에어리가 양 볼을 꾹 누르며 한탄을 내뱉었다.
“맙소사! 그, 가스마스크는 발에 모터라도 달렸단 말이야? 어떻게 서준을 앞지른 거지? 설마 비밀스러운 샛길이라도 있었던 게 아닐까?”
비밀스러운 샛길! 그녀는 스스로 내뱉고도 놀라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에어리의 눈이 불안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곳곳에 어둠이 도사려 무엇 하나 정확하지 않은 풍경은 불길함이 자라기 충분한 토양이었다.
뺨을 문지르던 손바닥이 어느새 이마에 닿았다. 에어리는 고개를 흔들며 주저앉았다.
“우리 이럴 때가 아닌 것 같아. 여기에 정말 숨겨진 통로라도 있다면 얼른 도망쳐야 하잖아.”
낮은 곳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애달팠다. 쿰쿰한 먼지 냄새를 맡으면서도 윌리엄은 옷이 더러워지는 건 신경 쓰지 않고 에어리에게 기어갔다. 그는 울상을 짓는 연인의 어깨를 껴안았다.
“에어리, 우린 여기서 나갈 수 있어. 우린 살아남을 거야.”
“빌리….”
꼭 이럴 때 저런 말을 해야 할까 싶어 서준이 이목구비를 한껏 구길 때였다. 그 꼴을 조용히 지켜보던 요한이 마침 생각났다는 듯 툭 던져 말했다.
“아, 그렇지. 가스마스크의 정체는 하몽 캠프장의 관리인이야.”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에어리가 윌리엄을 밀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충격적인 소식에 무릎과 허리의 부상을 잊은 듯한 모습이었다. 뒹구는 윌리엄을 뒤로한 채 크리스티나도 깜짝 놀라 한 발자국 다가왔다. 그러잖아도 새하얀 얼굴에서 더욱 핏기가 사라졌다.
“정말이야, 요한? 관리인이 서준을 습격하고 보비를 납치한 사람이라고?”
“경비 초소에 시체가 잘린 대신 전화기 줄이 잘려 있던 걸 보면 확실해.”
“세상에, 보비가 옳은 날이 오다니 내일은 태양이 아니라 달이 뜨겠어. 드라마도 아니고 대체 무슨 일이람.”
‘공포 영화 속 세상에 온 걸 환영해.’
혀를 끌끌 차는 에어리를 향해 서준이 연민의 눈길을 보냈다. 드라마는 아니지만 대강 비슷한 세상이었다.
“잠깐, 너희, 잠깐만….”
그런데 군인을 잡은 뒤 도통 입을 열지 않던 골든이 갑자기 팔을 휘적거리며 끼어들었다. 그는 요한과 서준의 사이를 가르며 들어왔다.
땀내를 풍기는 몸뚱이가 달갑지 않아 서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반면 요한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는 골든이 이리저리 내두르는 팔을 낚아채 단단히 고정했다.
“무슨 일이야, 골든?”
“요한, 요한 젠틸. 아니지, 난 너한테 말하려는 게 아니라.”
골든이 대뜸 서준을 노려보았다. 아니, 자세히 보면 그저 쳐다보는 것도 같으나 워낙 눈빛이 강렬해 사실상 쏘아보는 것과 진배없었다. 서준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그는 평소 금·은·동 트리오에게 워낙 괴롭힘을 당해 별 대단하지 않은 행동에도 오금이 저렸다.
그러나 골든의 눈매에는 오묘한 구석이 있었다. 아직 약에 취한 기운이 남아 있었으나 사리 분별을 못 할 정도는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머뭇거리는 입술이 평소와 달랐다. 제 패거리들을 이끄는 보통 때라면 거들먹거리며 행패를 부렸어야 옳았다. 하지만 지금 친구들은 어디로 갔는지 그는 홀로 이곳으로 왔다.
생각해 보니 묘한 점은 더 있었다.
애초에 골든은 왜 이곳으로 왔으며, 미리 약속이나 한 듯이 자신들을 도와줄 수 있었단 말인가? 서준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오늘 겪은 사건 중 도무지 생소하지 않은 일이 더 드물다지만 또 그가 모르는 일이 벌어졌다. 또…. 선지자라는 이름에 부끄럽게도 서준은 도통 자신의 미래를 점치지 못했다. 마치 눈꺼풀을 강제로 들고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듯 안구에 명멸하는 빛은 그 내용이 한없이 단편적이었다.
일례로, 바로 눈앞의 골든이 잃어버린 자전거의 행방을 말한 뒤 얻어맞을 미래는 예지하지 못한 전적이 있지 않던가. 서준의 머릿속에서 생각이 엉겨들었다.
복잡해지는 머릿속의 실타래를 끊어 버리듯, 주저하던 골든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점쟁이, 너를 공격했다는 석궁을 쏜 사람은 아마 브래스일 거야.”
몹시도 뜬금없는 진실과 함께.
서준은 잠깐이나마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귀로 소리가 통과하기야 했다. 그러나 난데없이 브래스의 이름을 듣자 그저 어안이 벙벙했다. 에어리가 주먹을 꽉 쥐고 휘둘렀다.
“그것 봐, 역시 브래스야!”
“브래스?”
되물은 것은 요한이었다. 푸른 눈이 골든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속에 무엇이 들었을지 모를 투명한 시선이었다.
그는 먼지를 털듯 가볍게 골든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가볍게 쥔 듯하던 손아귀의 힘이 점차 우악스럽게 변했다. 결국 골든은 어깨가 빠질 듯한 고통에 이를 악물고 요한을 밀쳤다.
“무슨 짓이야? 저리 치워, 요한.”
“너무 가까이 오지 말고 적정한 거리를 유지해. 준이한테 마약 중독이 옮으면 어떡하려고 그래? 말하고 숨 쉬는 것도 주의해 줘. 네가 생산하는 이산화 탄소는 유독하다고.”
마약은 잠깐 곁에 섰다고 옮는 전염병이 아니었으나 요한의 태도는 몹시 단호했다.
“무슨, 사람을 마약 중독자처럼 대해?”
골든이 씩씩거리며 발을 굴렀다. 서준은 그가 스스로 자각이 없다는 점이 놀라웠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요한, 치워 봐. 날 공격한 게 브래스라니 무슨 말이야?”
요한에게 저지당해 서준과 세 걸음 이상 떨어진 골든의 얼굴이 유독 침울했다. 상시 뻣뻣하게 세우고 다니던 목은 어쩐지 조금 앞으로 숙였으며 낮에는 햇살을 받아 붉게 빛나던 금발은 어두운 밤의 그늘에 색을 빼앗겨 새까맣게 보였다.
“우리가 하몽 캠프장에 온 건 브래스의 계획이었어.”
천천히 골든의 입술이 열렸다….
***
해가 아직 중천에 떠 있을 무렵, 편의점에서 쫓겨나듯 나온 금·은·동 트리오는 숲길을 걷고 있었다. 리처드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브래스를 돌아보았다.
“이 길이 맞아? 우리도 그냥 정문으로 들어가는 게 나았을 것 같은데.”
리처드의 불평에 브래스가 입가에 음탕한 미소를 띠었다.
“정문으로 들어가면 기록이 남을 것 아니야. 우리가 하몽 캠프장에 그냥 놀러 가? 내가 말했잖아. 캠프장에 크리스티나가 있다니까. 크리스티나만이 아니야. 에어리도 있다고, 제기랄. 그 죽여주는 몸매로 호수에서 옷을 입고 놀겠어?”
그는 천박한 손짓을 하며 리처드의 종아리를 퍽 찼다. 리처드는 뒤를 돌아보며 무어라 구시렁거렸지만, 뒷주머니에 흰 가루가 든 봉지를 찔러 넣자 곧 조용해졌다. 브래스는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폈다.
“아, 좀 믿어 봐. 이 샛길로 가면 정문이 아니어도 캠프장 건물하고 통하거든. 내가 미리 자리 봐 뒀는데 거기서는 호수가 훤히 보여. 위치에 따라서는 산막 창문도. 무슨 말인지 알겠어?”
브래스가 제 뒤를 따라오는 골든에게 시시덕거렸다. 그는 여자를 탐내는 정도가 심했다. 골든은 성욕보다는 약과 술을 통해 얻는 쾌락에 더 관심이 컸다. 하지만 약을 구해 오는 브래스에게 그만두라 면박을 놓을 마음도 들지 않았다.
대신 그는 길가에 쌓인 고물을 괜히 발로 들쑤셨다. 그러자 위태롭게 쌓였던 잡동사니가 우르르 쏟아졌다. 돌아갈 때 귀찮겠구나, 하는 생각이 짧게 머릿속을 스쳤지만 다시 정돈할 성품도 아닌지라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
“너!”
“뭐, 뭐야.”
갑작스럽게 고함을 친 서준에게 일순 눈길이 쏠렸다. 사정을 설명하던 골든도 눈을 끔뻑거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을 바라보며 서준은 분통을 터뜨리지도 못하고 입술만 깨물었다. 하여간 이놈의 금·은·동 트리오는 그의 인생에 도움이 된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