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포영화 속 선지자로 환생했다 (34)화 (34/156)

#034

말하자면 골든은 존재 자체가 히든카드였다.

설령 브래스를 잡아 죽이거나, 그를 인질로 삼아 정보를 털었다 한들 가스마스크가 골든에 관해 알 수 있는 사실은 그가 하몽 캠프장에서 도주했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어떤 이유에선지 골든은 돌아왔다. 아마 마약을 하느라 정신머리가 이상해진 탓이겠지만, 서준은 그 점에서 골든을 이용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는 어딘가 어리바리한 골든의 손에 과도를 쥐여 주었다. 표정은 영 믿음직스럽지 않았으나 적어도 제가 들고 있을 때보다는 위협적이었다. 급조한 계획은 놀라울 정도로 순조롭게 진행됐다. 서준과 요한, 윌리엄이 가스마스크의 이목을 끄는 동안 골든은 거머리처럼 벽에 달라붙어 내려갔다. 물론 처음의 예상과는 달랐다. 그는 가스마스크가 계단으로 도주할 경우를 가정한 비장의 수였다.

서준을 비롯해 크리스티나와 친구들은 노련한 사냥꾼이 아니었다. 따지자면 진부한 이야기 속 한 명씩 살해당할 사냥감에 불과했다.

그러니 준비했다. 모든 행동에 대비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가능성이 너무 작았다. 추한 발버둥이라 해도 좋았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숨을 쉬고 존재를 누리기 위해서 학생에 불과했던 청년들은 몸부림쳤다.

그 결과, 가스마스크는 무기를 잃고 3층 높이에서 추락했다. 비록 서준을 밧줄 삼아 고도를 줄여 버렸지만….

“흐으아아아!”

골든의 목구멍에서 빈약한 기합이 튀어나왔다. 그는 제법 겁을 먹은 눈치였다. 단련해 놓은 근육이 아깝도록 팔이 떨렸다. 빈곤한 상상력을 뛰어넘는 가스마스크의 저력을 코앞에서 목도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골든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은 어디까지나 허여멀건 하고 기괴한 생김새의 괴물이었지, 방독면을 쓰고 하몽 나이프를 휘두르는 정신 이상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골든의 손은 그가 가장 불신하면서 욕망하는 존재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 가스마스크의 허벅지 안쪽에 찔러 넣은 과도가 살과 근육을 파헤치면서 억지로 방향을 틀었다.

[끄으… 아악!]

효과는 대단했다. 방독면으로 막혀 한층 멀게 들리는 목소리가 선뜩한 괴로움을 토해 냈다. 그의 비명은 곧 서준의 기쁨이었다.

‘됐다!’

역시 다리는 이렇다 할 방어구를 하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휘두른 도끼가 가스마스크의 무릎 아래를 스쳤지 않았던가? 그때 서준은 도끼를 위협하는 용도로 이용했다. 하지만 본디 날붙이란 날카로운 부분을 이리저리 마구 내지르는 것보다 찍었을 때 힘이 더 가해진다. 특히 사람의 넓적다리 안쪽에는 주요한 혈관이 지나간다.

서준도 자세히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공포 영화 속 연쇄 살인마란 무릇 파이널 걸이 최후의 일격을 날리지 않으면 몇 번이고 되돌아온다.

그래서 서준은 생각을 역전시켰다. 죽지 않는 한도에서 가스마스크의 기동력을 없애 버리는 데 가장 효과적인 건 무엇일까? 길게 고민할 일도 아니었다. 바로 두 다리였다.

혈관을 제대로 끊어 놓았는지 새빨간 핏물이 과도가 만든 틈으로 울컥울컥 흘러나왔다.

[큭!]

골든이 성공했다는 희열에 얼굴을 붉힐 새도 없이 가스마스크가 그의 가슴팍을 찼다. 망치 같은 발꿈치가 명치 한가운데를 제대로 가격하자 골든은 비명 한번 내지르지 못하고 뒤로 자빠졌다.

그는 용케 손에 쥔 과도의 손잡이를 놓지 않았다. 그러나 골든의 손에 남은 건 손잡이뿐이었다. 가스마스크의 허벅다리에는 여전히 날이 박혀 있었다.

방독면 안쪽에서 뜨끈한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는 괜히 살을 파헤쳐 손바닥만 한 날붙이를 꺼내려 들지 않았다. 살인에 조예가 깊으신 분답게 당장 뺐다가는 출혈이 심각하리란 걸 아는 눈치였다. 그는 텅 빈 총을 땅바닥에 강하게 내던졌다.

‘속은 걸 안 모양이지.’

방아쇠를 당겨도 아무것도 나가지 않았으니 모르면 그도 대단했다. 서준은 마른 목구멍에 침을 삼켰다.

가스마스크의 표정이 어떨지 그는 볼 수 없었다. 그저 어렴풋이 그려 내는 건 가능했다. 하얗게 튼 입술의 한쪽 끝이 기이하게 올라갔다. 차게 식었던 장기가 희열喜悅이라는 열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꼴 좋다, 새끼야.’

채신머리없이 올라가는 입꼬리를 겨우 진정시킨 서준이 요한을 힐끔거렸다. 잠시나마 시간을 버는 동안 그는 주먹을 단단히 말아 쥐고 있었다. 성한 곳이 없는 엉망이 된 손이었다.

그러나 통증을 갈무리한 요한은 산뜻하게 미소 지으며 부러 서준과 눈을 마주쳤다. 가공할 만한 인내심에 절로 혀가 내둘러졌다. 만약 제가 저만한 부상을 당했다면 바닥을 구르며 눈물과 콧물을 뺄 자신이 있었다. 그는 요한이 손바닥 안쪽에 숨겨 놓은 상처로부터 애써 눈길을 돌렸다.

“준아, 너는 배우가 돼도 잘할 것 같아.”

낭랑한 목소리가 밤하늘을 갈랐다. 굉장히 뜬금없게 느껴지는 한마디였다. 서준은 새끼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후비적거린 뒤 요한에게 되물었다.

“내가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한다 이거야?”

“너의 그런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언사를 단점이라고 부르지 않을게.”

하는 말만 들으면 충분히 결함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가느다란 눈초리가 요한의 먼지가 낀 정수리와 잔상처가 나도 곧고 날렵한 모양새의 이마와 콧대, 깊게 팬 안와 속 푸른 눈과 피딱지가 붙은 입술을 노려보았다. 피가 엉긴 살덩이가 부드럽게 열렸다.

“그냥. 나는 네가 더 좋아졌다고.”

그는 쉬지 않고 입을 움직이면서도 무릎을 굽혀 비교적 멀쩡한 손으로 상당히 큰 돌덩이를 쥐었다. 요한의 섬세한 손끝은 수많은 돌 중 모서리가 유독 날카로운 것을 용케 골라냈다.

“뭐?”

그리고 서준으로 말할 것 같으면, 당황스러워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나 이곳은 프롬 파티장이 아니었다. 그들은 턱시도를 입지 않았으며 코르사주를 주고받지도 않았다. 이곳은 괴물과 연쇄 살인마가 날뛰는 하몽 캠프장이었다. 당장 네가 한 말의 뜻과 이유, 근거와 주장을 내놓으라며 따질 때가 아니었다.

서준의 시선이 요한을 향하는 것과 동시에 가스마스크가 그들에게 한 걸음 내디뎠다. 바짝 약이 오른 연쇄 살인마의 존재는 아직 동양적인 감수성을 내면에서 버리지 못한 서준에게 악마보다 더한 두려움을 안겨 주었다. 피부에 소름이 돋고 점차 염통이 조여 왔다.

가스마스크가 목을 기괴하게 꺾으며 다가올수록 잠시나마 손가락과 발가락 끝까지 온기를 전해 주던 희열은 등유처럼 흔적도 남기지 않고 날아갔다. 그의 걸음마다 피 냄새가 점점 짙어졌다.

요한도 쓸데없이 입을 놀리는 대신 슬그머니 다리 사이의 간격을 벌렸다. 그는 자연스럽게 서준의 앞으로 나섰다. 가스마스크의 흉험한 모습이 매섭게 단련된 너른 등에 가려졌다. 견갑골이 돌출되어 꿈틀거렸고 탄력 있는 근육이 등에서 어깨로, 어깨에서 팔로 이어졌다.

“긴장하지 마…. 몸에서 힘을 빼고 평소처럼 움직여야 해.”

보이지 않는 얼굴은 다정한 목소리로 힘든 주문을 내밀었다. 그러나 서준은 이 요구를 몸소 실천하는 육체를 보고 있었다. 억지로 긴장과 흥분을 억누르는 요한이 당장 코앞에 존재했다.

서준은 헐떡이는 가슴을 누르고 의식적으로 몸을 이완시켰다. 어느새 뻣뻣하게 굳었던 팔과 다리가 느슨해졌다. 요한이 옳았다. 아무리 수적으로 우세해도 제대로 행동하지 못한다면 필패하리라.

“으응.”

서준은 요한을 따라 비슷한 돌을 찾아 손에 꽉 쥐었다. 손바닥을 파고드는 까슬한 촉감에 살가죽이 까졌다. 하지만 이것조차 없다면 승률은 더욱 낮아질 게 분명했다.

그는 불안하게 크리스티나가 있을 구 합숙소의 가파른 지붕을 올려다보았다. 에어리는 둘째 치고 체조에 재능이 없는 크리스티나가 내려오는 데 제법 시간이 걸릴 터였다.

서준은 남몰래 목표를 정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크리스티나가 마지막 일격을 날리기 쉽게 가스마스크를 포박하면 될 일이었다. 그녀에게 다 잡은 가스마스크를 내민다면 이 끔찍한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포악한 마음이 서준의 내면에서 움트기 시작했다. 그런 감정을 기민하게 알아차렸을까?

손가락을 잃고, 한쪽 다리까지 못 쓰게 된 가스마스크가 더욱 빠르게 요한과 서준을 향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온다!”

서준이 깔깔한 목에 힘을 줘 외쳤다. 그러나 그들이 알지 못했던 것은 오는 건 가스마스크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 소리는 멀리서부터 들렸다. 하지만 요한과 서준은 연쇄 살인마를 두고 다른 곳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렇기에 가장 먼저 그것을 알아차린 건 높은 곳에 있던 크리스티나와 에어리였다.

“저게 뭐지?”

푸르스름한 달빛을 받아 창백한 손가락이 그것을 가리켰다. 새하얀 점으로 보이던 그것은 빠른 속도로 몸집을 키웠다. 크리스티나의 눈이 크게 홉뜨였다. 아니다. 커진 게 아니라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방비할 틈도 없이 도착했다.

마치 트랙터로 옥수수밭을 추수하듯 나무가 우수수 쓰러졌다. 짙은 냄새를 풍기던 수림이 일거에 고꾸라졌다. 나무의 뿌리가 죄 뽑히고 두꺼운 몸통이 부러졌다.

미친 듯이 날뛰는 사나운 물결이 해일처럼 다가왔다. 그것, 괴생명체 X이자 정부가 붙인 복잡한 명칭까지 지닌 그것은 굉음과 포효로 자신을 주장했다. 땅이 울리고 나무가 흔들려 쓰러졌다. 새하얀 몸뚱이와 여러 개의 촉수는 여전히 반지르르한 빛이 감돌았다.

크르르륵, 크르르륵 우는 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바닥을 구르던 골든이 괴로워하며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 가스마스크조차 그것이 만든 진동에 몸을 휘청거렸다.

서준은 망연하게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것과 그의 거리는 대단히 가까웠다. 대략 열 걸음 남짓한 간격이 전부였다.

때로 위치는 동일한 사물을 목격해도 다른 감상을 만들어 낸다. 지금 서준이 느끼는 바가 그러했다. 그는 산막에서 괴생명체 X와 마주한 적 있었다. 그러나 그때 서준은 가장 뒤편에 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너무 크잖아….”

당장 마주친 그것에 헛웃음까지 나왔다. 실제 크기는 그대로일 것이다. 하지만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촉수 괴물의 형상이란! 서준은 이대로 까무러치고 싶어졌다.

그는 군인이 떠들어 댄 우주의 존재라는 말을 이해했다. 이토록 까마득하고 압도적인 생명체가 과연 지구에서 태어났을 리 없었다.

다소곳하게 모인 촉수 하나가 움직였다. 서준은 여전히 얼빠진 얼굴로 그것을 보다 촉수 하나의 길이가 대단히 짧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 요한이 잘라 버렸지. 인식과 동시에 그는 요한이 입을 뻐끔거리는 우스꽝스러운 몰골을 보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왜 요한은 물고기가 숨을 쉬듯 저러는 걸까? 아니, 아니다. 서준은 제 귓구멍을 통과하는 것이 이명에 불과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요한은 계속 소리치고 있지만 제가 알아듣지 못했을 뿐이다.

이윽고 물속 공기 방울에 갇히기라도 했다는 양 거품처럼 터져 나오는 그의 다급한 외침이 우렁우렁 울렸다.

“서준!”

요한이 서준의 팔뚝을 잡아당겨 끌어안았다. 그리고 멈추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괴물이 노린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촉수의 그림자는 서준과 요한을 덮으며 높게 뻗어 나갔다. 그것은 길게 늘어나 구 합숙소를 향했다.

“아악!”

크리스티나와 에어리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굴렸다. 천운으로 그들은 지붕에서 나동그라지지 않았다. 지붕을 친 촉수는 다시 돌아오지 않고 3층 창문 안쪽으로 불쑥 들어갔다. 에어리의 낯이 삽시간에 희게 질렸다.

“안 돼, 빌리!”

그녀의 절규와 함께 창가에 걸린 촉수에 붉은 선지피가 무참하리만치 쏟아졌다. 지붕 위에 요령 좋게 매달려 있던 에어리의 상체가 뒤로 쓰러질 뻔했다. 크리스티나가 겨우 잡아채지 않았다면 그녀는 3층 높이에서 그대로 곤두박질쳤을 것이다.

“에어리, 정신 차려. 에어리!”

크리스티나가 간곡하게 에어리의 뺨을 쳤다. 그들도 당장 그곳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때 촉수가 슬금슬금 창문에서 빠져나왔다.

서준은 그리 친분 있는 관계는 아니었으나 아는 얼굴이 무참히 살해당한 광경이 달갑지 않았다. 그런데 툭, 떨어지는 상체는 윌리엄의 육신이 아니었다.

군인이었다.

꼴이 엉망이어도 살아는 있었던 군인은 촉수의 손길에 의해 몸이 두 조각으로 뭉텅 잘려 버렸다. 배꼽에서 조금 윗부분과 그 아랫부분으로 나뉜 육체는 놀랍게도 완벽한 황금 비율이었다.

다만 서준은 조화롭기까지 한 그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전생을 비롯해 현생까지 미술에 조예가 깊지 않고 교양 또한 부족한 그가 내뱉은 말이라고는 한심하게도 비루한 욕설에 불과했다.

“미친, 저게 뭐야….”

애석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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