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3
당연하지만 인제 와서 서준의 야박한 마음씨에서 측은지심이 솟아난 건 아니었다. 그는 아직도 용케 허리춤에 매달려 달랑거리는 쌍안경을 만지작거리며 뇌까렸다.
“지금까지 우리가 보비를 찾지 않은 이유가 달리 있어? 어디까지나 위험해서 그랬지.”
서준은 위험이라는 단어에 특히 강세를 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자신의 눈빛이 부디 진실처럼 보이기를 바라며 입술에 침을 발랐다.
“말이야 바른말로, 가스마스크와 괴물이 어슬렁거리는 캠프장에서 노닥거릴 틈이 어디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잖아. 괴물은 새까맣게 탔고, 가스마스크야, 뭐어….”
연쇄 살인마의 비참한 최후는 서준이 굳이 말을 보태지 않아도 충분했다. 자기 합리화가 길게도 이어졌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왕 이렇게 된 거 가엾은 보비를 위해 시신 정도는 수습해야 그 불쌍한 친구의 용기 있는 최후를 위한 마지막 도리가 아닐까 해. 그리고 겸사겸사 보비가 가지고 있는 차 열쇠를 찾아서 에어리를 안전하게 병원까지 옮기는 거지.”
서준은 보비를 용감하다고도, 불쌍하다고도, 하다못해 친구라고도 여기지 않았으나 혀는 기름칠한 듯 매끄럽게 움직였다. 요한이 슬쩍 서준의 손등을 잡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도 준이의 의견에 찬성해. 가스마스크가 보비를 납치하고 우리를 다시 찾아왔던 시간을 생각해 보면 뒷정리를 다 하고 왔다고 보기는 어렵지.”
그가 말하는 뒷정리가 책상 서랍 따위가 아닌 건 분명했다. 서준도 내심 주억거렸다. 가스마스크는 공포 영화의 살인마답게 잔혹한 살인 외에도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시신을 모독했다.
당연하지만 그러한 처리 방법은 번거롭고 손이 많이 가 빠르게 끝낼 수 있는 작업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가스마스크는 서준을 비롯한 일행을 잡으러 오느라 보비를 처리할 틈이 없었으리라. 요한이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띠고는 덧붙였다.
“하루가 길었잖아. 조금 이르지만 인제 그만 따뜻한 집으로 돌아가자.”
차로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 거리를 두고 타향살이 십 년은 보낸 듯한 어투에 기가 막혔다. 그러나 그의 말끝에 묻어나는 피로는 진실했다.
두들겨 맞은 듯 통증을 호소하는 몸뚱이와 고약한 냄새를 실어 오는 미풍, 피부에 끈적하게 들러붙는 공기…. 긴장이 풀리자 너나 할 것 없이 지치고 고된 얼굴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피곤함에 찌든 눈빛이 마음속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그러면 에어리 상태가 더 나빠지기 전에 얼른 움직이자.”
에어리의 손을 붙잡고 있던 크리스티나가 자신의 눈가를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흙으로 지저분해진 무릎을 털었다. 에어리는 친구에게 뭐라고 말을 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갈비뼈에서 올라오는 고통이 그녀의 입을 막았다.
“크르으윽….”
“그만, 움직이지 마. 에어리. 윌리엄, 너도 에어리하고 일단 여기서 쉬고 있어. 차 열쇠는 우리가 찾아올게.”
“고마워. 크리스티나.”
“고맙긴! 너도 많이 다쳤잖아. 에어리를 혼자 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크리스티나의 씩씩한 목소리가 스산한 공기 속에서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서준은 길쭉한 사지를 구물구물 폈다. 얼결에 손이 떨어져 나간 요한이 눈꼬리를 늘어뜨렸지만 무시했다.
“크리스티나. 가스마스크가 보비를 끌고 갔던 쪽으로는 요한하고 내가 찾아볼게. 너는 골든과 산막 쪽을 다시 살펴봐 줘. 혹시 열쇠를 짐 사이에 뒀을지도 모르니까.”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뭐? 내가? 왜!”
이해하며 대꾸하는 목소리와 반발이 뒤섞였다. 난데없이 귓전에서 울린 소리에 크리스티나가 어깨를 움츠리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갑작스러운 호명에 골든이 개구리처럼 펄쩍 튀어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반응에 되레 낯이 굳은 쪽은 서준이었다. 그는 골든의 가슴팍을 검지로 꾹 눌렀다. 강하지 않은 힘에도 골든의 발뒤꿈치가 슬슬 밀렸다.
“왜…냐고? 이유를 몰라서 그러는 거야? 연쇄 살인마와 정체불명의 우주 괴물이 점거했던 캠프장을 둘러보는데 그럼 크리스티나가 혼자 움직여야 한다, 그런 뜻이야?”
말 한마디에 골든이 노폐물로 탈바꿈했다. 바닥에 누워 숨을 빠르고 가늘게 내쉬던 에어리가 뾰족한 눈길로 그를 노려보았다. 애당초 이들과 그리 친하지도 않았던 골든은 억울한 지경이었으나 친구들이 죄 죽거나 사라진 마당에 그의 편을 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그들이 멀쩡히 살아 있어도 골든의 편을 들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는 공연히 분한 기분이 들어 흐느적거리는 손가락이라도 잡아채려 했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요한이 아니었다면 그는 겨울철의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관절을 만져 볼 기회가 있었을 터이다. 다만 요한의 몸놀림은 그 숱한 상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재빨랐고 골든에게 기회를 줄 만큼 너그럽지 못했다.
“말로 안 되니까 손부터 나가는 건 참 꼴불견이지. 골든, 너희 아버지가 학교 초청 강연에서 하신 말씀이야.”
불행히도 골든은 얼핏 다정하게 올라간 입꼬리에 옅은 비웃음이 서렸다는 걸 모를 정도로 어리석지 못했다. 그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짓씹듯 말했다.
“애초에 인선을 나누는 게 이상하지 않나? 평소처럼 네가 크리스티나 툴박스와 같이 가면 될 일일 텐데?”
그 나름대로 논리적인 반론이었다. 하지만 골든의 연약한 전의를 꺾어 버린 것은 요한의 억센 손아귀 힘이나 흉흉한 시선 따위가 아니었다. 맥없이 마디마디가 툭 끊어지고 사포로 문지른 듯 거친 목소리였다.
“네가 싫어.”
서준은 자신을 뒤로 숨기듯 밀어 낸 손목을 잡아 끌어 내리며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골든, 혹시 네가 모를까 봐 하는 말인데 난 너와 단둘이 있는 건 상상만으로도 끔찍해. 자전거 잃어버린 장소 알려 줬다고 나를 죽어라 괴롭힌 네가 싫어. 보여? 너와 같이 걸을 상상만으로도 피부에 발진이 일어났어.”
서준이 새하얗기 그지없는 팔뚝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비록 그들이 함께 목숨을 걸고 괴생명체 X와 연쇄 살인마 가스마스크를 쓰러뜨렸다 한들, 골든을 비롯한 금·은·동 트리오가 서준을 과녁으로 삼았던 일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서준은 왜인지 당연한 말을 듣고 얼이 빠진 골든의 얼굴을 보며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상냥한 크리스티나가 골든을 잠시 구석으로 끌고 가 위로했다. 어깨를 늘어뜨리고 산막 방향으로 사라지는 골든의 등이 무척 초라했다. 크리스티나가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하는 듯했지만 별 소용없었다.
서준은 그녀의 주인공에 걸맞은 친절한 태도가 골든 따위에게도 향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하지만 크리스티나에게 골든과 어울리지 말라고 조언할 처지도 아니어서 그는 다른 곳을 살폈다.
요한은 가슴팍의 주머니 속 말린 촉수를 바라보며 해맑게 웃는 중이었다. 어쩐지 섬뜩한 기분이 들어 얼른 시선을 돌렸다. 그 잠깐 사이에 서준이 자신을 본 것을 알아차린 요한이 재빨리 말을 걸었다.
“준아, 너는 꽃이 정말 좋다면서 끓는 물을 부어 버리는 사람을 어떻게 생각해?”
“그런 미친놈이 있어?”
“그렇지? 세상에는 이상한 사람이 참 많아. 무서운 세상이야….”
그는 크리스티나와 골든이 걸어간 방향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도대체 요한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서준은 혀를 차며 다른 곳으로 신경을 돌렸다.
‘에어리와 윌리엄….’
그들은 특히 부상 정도가 심했으므로 대기조로 빠진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서로를 바라보는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보자 덜걱 걱정이 들었다. 다행히 보비와 금·은·동 트리오 중 둘만 죽어 나갔으나 아직 하몽 캠프장을 탈출하지 않은 시기에 저들만 놔두어도 괜찮을까?
아직도 이 장소는 하몽 캠프장이라는, 바깥과 단절된 불길한 세상이었다. 공포 영화의 법칙에 따르면 커플의 명줄은 기하급수적으로 짧았다.
‘윌리엄이 지금까지 한 언동을 봤을 때 아픈 여자 친구를 건드릴 것 같지는 않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법이다. 서준이라고 트럭에 치였다가 공포 영화 속 선지자로 다시 태어날 줄 알았는가. 더군다나 그 역시 제 나름대로 전우애라는 감정이 슬쩍 솟아난 터였다.
서준은 슬그머니 그들에게 다가갔다. 윌리엄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제 심기를 표현했다. 언제 봐도 신기한 재주였다. 서준은 헛기침을 한 뒤 윽박질렀다.
“너희끼리 있는다고 이상한 일 하면 안 돼. 섹스 말이야, 섹스. 이런 비위생적이고 개방적인 공간에서 손잡기 이상의 진도를 나갈 생각은 꿈도 꾸지 마.”
인정한다. 서준이야 그 나름대로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충고랍시고 건넸으나 그의 태도는 언짢게 받아들이기 충분했다. 특히 고통에 신음만 내뱉던 에어리는 얼마나 기가 막혔던지 말이 술술 나왔다.
“끅, 서준. 너, 그렇게 안 생겨서는 머릿속이 정말 음탕하구나?”
에어리의 타박과 더불어 윌리엄은 경멸스럽게 서준을 바라보았다. 아마 다리에 힘만 들어갔다면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주먹질을 했으리라. 곱게 간직한 첫 입맞춤조차 촉수와 끝내 버린 서준은 억울해 미칠 지경이었다.
멸시를 배부르게 얻어먹은 서준은 그들과 헤어진 뒤 요한과 나란히 걸었다. 윌리엄이 피로한 낯으로 그들을 배웅했다.
에어리의 용태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이렇다 할 광원이 없는지라 자연히 발걸음이 느려졌다. 하몽 캠프장은 원래도 정돈이 잘되어 있는 고급스러운 레저 시설이 아니었다. 하물며 온갖 난투가 벌어진 다음에는 꼴이 아주 엉망이었다.
서준과 요한은 보비가 끌려갔던 방향으로 정처없이 걸었다. 보비가 떨어뜨린 양철 냄비를 발견했을 때는 반갑기까지 했다.
‘그나마 눈이 어둠에 익숙해져서 다행이지.’
서준은 물먹은 솜처럼 늘어지려는 몸에 억지로 힘을 주었다. 그의 옆에는 뺨이 발그레한 요한이 있었다. 생기가 돌아 윤기가 나는 것이 몹시 괴기스러웠다.
하기야 오늘 겪은 건 전부 그런 종류였다. 괴상하고 기이한 일투성이였다. 심지어 크리스티나와 에어리가 외계에서 온 오징어를 불에 구워 버리지 않았나? 이보다 더한 사건이 벌어질 리가!
순간 서늘한 돌풍이 불었다. 서준은 제 뺨을 쓰다듬는 찬 바람을 기껍게 맞이했다. 갑자기 속이 시원해졌다. 자연히 그의 얼굴 근육도 한결 느슨해졌다. 입가에 꾸밈없는 미소가 그려졌다.
요한은 그 모습을 천천히 음미했다. 도자기처럼 깨끗한 이마와 미간부터 매끄럽게 이어지는 콧날, 강퍅한 기세가 엿보이는 볼과 검게 멍든 입술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마지막은 새까만 눈동자였다. 자갈처럼 반들반들하고 윤기 나는 그것이 평온함에 젖어 있었다. 따라서 요한은 주장한다. 자신의 검지가 서준의 눈가를 쓰다듬은 것은 불가항력이었노라고.
하지만 그것은 요한의 사정에 불과했다. 난데없이 얇고 무른 눈꺼풀이 눌린 서준은 털 뽑힌 거위처럼 경악했다. 순식간에 뺨과 귓불이 새빨갛게 변했다. 두 안구가 뜨거운 물기로 젖어 들고 동시에 아랫배가 후끈한 열기에 감싸였다.
순간적인 접촉은 서준의 육체에 분명한 변화를 가져왔다. 후덥지근하고 달짝지근한 공기가 요한과 서준의 간격 사이로 부풀었다.
그때 통증과 같은 욕구가 서준의 머릿속에서 플래시백을 터뜨렸다. 윌리엄과 에어리에게 한 번 말했던 탓일까? 그는 평소라면 결코 입 바깥에 꺼내지 않았을 망측한 단어를 또다시 쉽게 혓바닥 위에 올려 버렸다.
“나와 섹스하려고 하기만 해 봐! 네 면상을 갈겨 버리겠어, 요한!”
새 울음 하나 들리지 않는 야심한 시각의 텅 빈 길에 섹스가 크게 울렸다.
“섹…스?”
이 과감한 단어 선정에 과연 요한도 뻣뻣이 굳었다. 하지만 서준은 그의 사정도 모르고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씩씩거렸다. 서준에게도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수많은 공포 영화에서 적을 무찌른 뒤 방심에 젖어 섹스하는 커플이 숱하게 나온다. 그리고 그것은 사망 플래그였다. 비록 서준과 요한은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으나 그는 잊지 않았다. 지나가듯 들은 요한의 사소한 말이 서준의 심장에 가시처럼 박혀 자그마한 틈새를 벌려 놓았다. 서준은 이를 악물고 따지듯 요한에게 쏘아붙였다.
“인제 와서 섹스하는 건 죽음의 고속 도로 하이패스야. 난 다 알아, 요한.”
숫제 으름장을 놓는 태도였다. 그러나 요한은 서준의 갑작스럽고 엉뚱한 대화에 화를 내거나 당황하는 대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 알아? 이상하네. 준이 너는 모르는 것 같은데….”
요한은 눈을 계속 뜨고 있다가 생각나면 감는 듯 기이하게 움직였다. 그의 느릿한 어조는 개미처럼 서준의 귓바퀴를 타고 올라왔다.
“사람에게 신뢰를 주는 몸짓이란 게 있거든. 열심히 공부했는데 왜 내 말을 안 믿을까?”
“뭐?”
차분한 응대였다. 조용하고 담담한 어투가 이어졌다. 하지만 말투만 멀쩡했지,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준아, 난 너를 좋아해. 솔직히 나는 네가 먼저 눈치를 챌 줄 알았어. 그래도 모르겠다면 내가 스스로 말할게. 내 평생에 걸친 사랑의 역사를!”
요한의 새파란 눈이 반짝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