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
윗니와 아랫니가 절로 부딪혔다. 딱, 딱 소리가 먹먹한 귓구멍으로 파고들었다. 삽시간에 손과 발의 체온이 떨어져 차가운 얼음덩어리 같았다. 그러나 벌벌 떨리는 육신의 말단부와 달리 머리통은 마치 불이 붙은 듯 뜨거웠다. 열 때문일까?
시야가 온통 붉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제 피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서준은 곧 그 새빨간 것이 요한의 손바닥에서 난 구멍에서 튄 액체임을 알게 되었다.
오감을 지워 버리는 고통은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차라리 억지로 눈을 감았다 뜨면 의식이 맑게 갤까 싶었으나 이도 불가능했다. 그의 오른쪽 눈에 꽂힌 막대가 서준의 눈꺼풀을 강제로 들리게 했다.
먼 곳에서 석궁을 쏘던 가스마스크가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그렇다. 그는 흉기를 든, 썩 나무랄 데 없는 풍채를 지닌 살인자였다. 자빠진 상태에서 하나 남은 눈알을 도르륵 굴리니 마치 거인이 걸어오는 양 거대하게 느껴졌다. 풀을 밟는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숨이 가빠졌다.
“요한. 요한…. 제발 정신 차려….”
서준이 힘겹게 목소리를 쥐어 짜내어 요한을 불렀다. 대답은 없었다. 희뿌옇게 흐린 시야 속에서 그의 가슴팍에 길게 돋아나듯 꽂힌 볼트만이 유독 선명했다.
서준은 재차 요한의 이름을 부르는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살이 씹히며 쇠의 맛이 혀를 적셨다. 눈이고 입이고 구분할 필요 없을 정도로 피로 물든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서준은 원망과 증오를 담아 가스마스크를 노려보았다. 그는 검붉게 얼룩진 세상에서 홀로 여유로웠다. 그는 정말 공포 영화의 무시무시한 살인마처럼 비쳤다.
하지만 서준의 인식은 스스로 부정했다. 이 말도 안 되는 세상이 진짜로 현실이라면, 공포 영화의 클리셰라 치부했던 설정 놀음을 뒤로하고 제대로 생각한다면 기이하게만 여겨졌던 부분도 해명할 수 있었다.
우선 가스마스크의 신출귀몰한 출현이었다. 애초 그는 가스마스크가 이동 수단으로 제 자전거를 사용하지 않았나 의심했었다. 그러나 사실 서준의 자전거를 멋대로 탄 사람은 마약에 절어 버린 골든이었다.
그렇다면 가스마스크는 어떻게 자신보다 먼저 하몽 캠프장에 올 수 있었을까?
답은 놀랍도록 단순했다. 애초에 가스마스크는 한 사람이 아니었다. 가스마스크가 공포 영화에 등장하는 괴인이라 무시무시한 체력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나는 능력을 지녔다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했다.
서준은 피눈물을 흘리며 요한을 끌어안고 버둥거렸다. 일직선으로 다가오는 가스마스크로부터 벗어나고자 벌레처럼 기었다. 몸을 꿈틀거릴 때마다 머리가 아팠다. 차라리 기절한다면 나을 고통이었다.
“흐, 흐이익…! 살인자, 살인자!”
다행인지 불행인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비명 덕에 혼절하는 기쁨조차 누릴 수 없었다. 보비는 온 세상 사람들의 밤잠을 깨우기라도 할 요량인지 목청이 터져라 소리를 내질렀다.
“흐으….”
그때 찌르륵, 찌르륵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렸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육신을 난도질하려는 도살자가 코앞에 있건만 손가락 한 치의 길이만 한 풀벌레 울음이 귀에 들어올 건 또 뭐란 말인가?
그러나 보비의 꼴사나운 고함이 현실감을 일깨웠듯 작은 풀벌레가, 피부에 들러붙는 피비린내와 더운 땀이, 축축하게 젖은 공기가, 손바닥을 간지럽히는 잡풀이, 손톱 틈으로 파고드는 흙 알갱이 또한 삶을 나타냈다. 명백하게 실체를 지닌 물질로써 감각을 자극했다. 생존의 증거였다.
잠시나마 기절 따위를 원한 나약한 정신에 진절머리가 났다. 보비가 일깨워 준 비루하기 짝이 없는 현실감을 곱씹으며 서준은 초점이 맞지 않는 눈을 희번득거렸다. 별 잡생각이 다 드는 걸 보아하니 이놈의 화살이 뇌를 살짝 찌르긴 한 모양이었다.
서준은 단 한 번도 죽음을 원하지 않았다. 그로 말하자면 또래의 소년 소녀를 희생시켜서라도 살아남고자 한 훌륭한 이기주의자였다. 이 끈질긴 모리배는 억척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당연하게도 지금까지 요한의 손바닥과 함께 연결된 부위에서 말도 못 할 통증이 욱신거렸다. 그러나 뻗어 있어 봤자 그 고통조차 못 느낄 처지가 될 게 뻔한지라 서준은 억지로 볼트를 잡았다.
단단하고 묵직한 그것은 제법 서늘했다. 서준의 이가 악물렸다. 장담컨대 오늘 하루 겪은 고통의 총량이 평생치를 아득히 뛰어넘을 터였다.
그리고 그는 살기 위해 너덜너덜한 입술을 다시 깨물었다.
“끄흑, 으…. 아아아악!”
서준의 목구멍을 비집고 나온 것은 흉하고 사나운 비명이었다. 이성이 모조리 증발한 괴성이었다. 귓구멍으로 자신의 머리통에 꽂힌 막대기가 안구를 뭉그러뜨리고 요한의 손바닥을 헤집는 소리를 또렷하게 들렸다.
그는 왼손으로 요한과 손을 겹쳐 고정하고, 오른손으로 볼트를 잡아당겼다. 손바닥 안의 근육과 핏줄, 뼈를 긁어내는 감각에 구역질이 올라왔다. 부들부들 떨리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죽으면 고통조차 없을 터이니 이조차 달가워야 마땅했다.
손에 든 것을 아무렇게나 던져 버리자 흙바닥에 선명한 색의 피가 후드득 흩뿌려졌다. 녹색 이파리에 핏자국이 점점이 달라붙었다. 데굴데굴 굴러가던 볼트는 멀리 가지 못하고 발치에서 멈췄다. 그것의 끄트머리는 여전히 날카로웠는데, 다행히 안구가 아주 뽑히지는 않은 듯했다. 물론 눈은 이미 망가져 제구실하지 못했다.
서준은 더운 숨을 뱉으며 겨우 한 몸에서 벗어난 요한을 발로 밀었다. 몸뚱이 한번 묵직했다. 가스마스크는 여전히 한갓진 태도로 서준의 발악을 구경했다. 확고한 우위를 파악한 모양새가 참으로 눈꼴셨다.
왼쪽 눈으로 노려보는데 어슬렁어슬렁 걷던 그가 돌연 석궁을 들었다. 서준의 가슴이 크게 헐떡거렸다. 그러나 가스마스크는 서준이나 요한의 대가리를 날려 버리는 대신 도주를 시도한 보비에게 응징을 가했다.
“끼엑!”
보비는 맥없는 비명과 함께 뒤로 자빠졌다. 그의 허벅지가 핏물로 빠르게 젖어 들기 시작했다. 곧이어 가냘픈 울음이 이어진 덕분에 구태여 그쪽을 보지 않아도 보비가 살아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썩 긍정적인 반응은 아니었다. 가스마스크는 보비에게 흥미를 잃은 듯 발걸음을 재촉했다. 서준은 여전히 깔깔한 목에 힘을 주어 요한을 불렀다.
“…요한. 요한, 정신 차려. 씨발, 너라도 도망가야 할 거 아니야. 요한….”
그러나 서준의 목소리는 허공에 의미 없이 흩어지기만 할 뿐으로 요한을 움직이지도, 가스마스크의 발을 묶지도 못했다. 지독한 비참함이 그의 목을 죄어 왔다.
서준의 몸은 뒤로 기지도 못하고 개암나무의 두꺼운 기둥에 막혔다. 머리가 앞으로 조금 기울자 오른쪽 눈구멍에서 피가 울걱 쏟아졌다. 핏자국은 뺨에 길게 자국을 남겼다. 서준의 행동을 촌극처럼 바라보던 가스마스크가 손뼉 치는 시늉을 했다.
“저 개, 씨발 새끼가….”
눈앞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르자 놀랍게도 진통 효과가 나타났다. 그렇다고 서준의 팔다리에 기운이 솟아나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이런 때에 그의 손바닥에 잡히는 건 개암 하나밖에 없었다.
서준은 볼 안쪽 살을 깨물며 바닥을 득득 문질렀다. 그는 손에 잡히는 흙을 마구잡이로 움켜잡았다. 땅을 파내듯 몇 번이고 흙더미를 던졌다. 흙 사이사이에 숨은 돌멩이에 손바닥이 찢어지고 손톱에 금이 갔다. 별반 소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손이 멈추지 않았다.
가스마스크는 그런 서준을 흙장난하는 어린아이처럼 내려다보았다. 그는 기어이 서준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요한을 폴짝 뛰어넘는 발재간에는 익살마저 서려 있었다.
이윽고 서준의 앞에 주저앉아 고개를 기웃거렸다. 안구 보호대의 불투명한 막 너머로 관찰하는 눈빛이 느껴졌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몸에 뭐 그리 볼 것이 많은지 꼼꼼하게 뜯어보는 시선이었다. 서준은 지지 않고 쌍심지가 선 눈길로 가스마스크를 노려보았다.
반들반들 빛나는 방독면과 검은 우비는 이제 익숙했다. 다만 하몽 나이프는 먼저 저승으로 떠난 가스마스크가 가지고 있어서인지 새로운 가스마스크에게는 없었다. 대신 그의 허리춤에는 손도끼가 매달려 있고, 손에는 석궁이 건성으로 들려 있다.
이 허술한 손짓으로 가스마스크는 서준과 요한의 목숨을 장난감처럼 취급했다. 순간 뒷골에 열이 훅 올랐다.
“야 이 씹새끼야, 우리 죽이고 넌 뭐 멀쩡할 것 같냐? 넌 네 친구처럼 될 거야. 내장이고 위장이고 죄 갈려서 죽어 나자빠지겠지. 그리고 너희 같은 살인자 장례 치러 줄 사람이나 있겠냐? 어? 대충 가져다 버리겠지. 젯밥은 딱 수준 맞춰서 시체에서 나온 구더기나 먹으면 되겠네. 왜 말이 없어. 너무 좋아? 저기 가 보니까 딱 식성 나오더만. 씨발, 할 짓도 없어서 망한 영화 코스프레나 하고 다니면서 쪽 안 팔려? 나이 잡수실 대로 잡수시지 않으셨어요? 응?”
퉤, 피 섞인 침이 방독면에 들러붙었다. 가스마스크가 제 명줄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으나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말을 길게 한 탓인지 턱이 다 아팠다. 서준의 고개가 힘없이 아래로 기울었다.
[그런 나쁜 말은 하지 말아요! 예쁜 입이 추저분해지잖아요, 서준.]
그러자 가스마스크가 과장된 어투로 짐짓 서글프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데 어쩐지 그 목소리가 귀에 익숙했다. 비록 방독면을 통과하는 바람에 평소보다 낮게 들렸으나 분명 기억에 있는 목소리였다.
서준은 천천히 턱을 들었다. 가스마스크는 여전히 한 손에 석궁을 쥔 채 방독면을 벗는 중이었다. 서준의 하나밖에 없는 눈이 크게 홉뜨였다. 눈동자가 정면을 향해 못 박혔다. 목구멍이 말라붙은 듯 공기만 빠져나왔다. 새액새액 숨 쉬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이제 하늘은 검지 않았다. 검푸르던 색은 보랏빛을 지나 붉고 푸른색이 뒤섞여 엉망이었다. 무질서하고 난잡한 색의 하늘, 그러나 이렇듯 어둡지 않은 빛깔 속에서 서준은 똑똑히 목격했다.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일견 우스꽝스러운 콧수염을 한 친숙한 낯짝을.
혀가 얼어붙은 듯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이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전신이 끈적끈적하게 녹아내려 손도 발도 뒤섞이는 비현실적인 감각을…. 서준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프레드….”
프레드 프랭크는 눈썹 끝을 내려 특유의 불쌍한 표정을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정말 유감이에요. 서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