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포영화 속 선지자로 환생했다 (68)화 (68/156)

#067

“어, 우, 와, 오, 으….”

서준이 모음만 내뱉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반쯤 무너진 트레이시와 베일리를 양옆에 두고 허수아비가 몸을 기울여 앉아 있었다. 아무래도 살인 허수아비께서는 보는 눈이 없으니 편하게 쉬시던 모양이신데, 어르신 본연의 모습이 참으로 해괴망측했다.

허수아비에 에이프릴이었던 몸뚱이를 길게 늘이고 찢어 붙인다면 저런 모양이 될까. 목과 팔, 다리가 뜯겨 허수아비의 끄트머리에 억지로 꿰여 있었다. 뼈와 혈관이 길게 늘어나 간신히 연결되어 있었으며 드문드문 피부 바깥으로 나와 있는 장기가 움찔거렸다. 예를 들어 에이프릴의 허파는 배꼽 부근에 뜯긴 살가죽 아래로 쏙 흘러나와 대롱거렸다. 잔혹하게 살해당한 양 가엾은 모양새였다.

그러나 작은 얼굴에 길쭉하게 갈라진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휘파람 같은 웃음소리를 듣는다면, 그 누구도 에이프릴을 희생양으로 보지 못하리라. 에이프릴의 얼굴이 달린 허수아비가 입을 열었다.

“안녕, 피어를 데려왔구나.”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상상 이상으로 징글맞은 몰골에 간이 입 바깥으로 튀어나올 뻔한 서준은 벌렁거리는 가슴을 꾹 눌렀다. 그는 순간적으로 피어의 눈을 가려 주어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나 피어는 에이프릴이 아니라 그의 발치를 보는 중이었다.

“엄마….”

“피, 피, 피, 어.”

“모호땐 아히가아아, 와꾸나아아하.”

트레이시와 베일리의 몸에서 팔이며 다리, 옆구리 살 등이 뭉텅뭉텅 떨어져 뒤섞였다. 그들의 육체는 이제 그저 하나의 살덩어리로 보였다.

“피어, 보지 마.”

서준이 피어와 붙든 손을 잡아끌었지만 아이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앞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아니요. 괜찮아요. 처음부터 헤어질 결심을 하고 여기까지 왔으니까. 괜찮아요.”

연방 괜찮다 중얼거리는 피어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서준은 피어를 말리는 대신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들의 계획에 이별은 필수 불가결했다. 꽉 잡은 손을 놓은 서준은 에이프릴의 앞까지 걸어갔다. 이제 정체를 대놓고 드러낸 허수아비가 경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왜 여기까지 왔어? 차라리 죽을 때까지 도망치지 그랬어.”

밀짚모자를 써 표정은 보이지 않았으나 그가 어떤 미소를 짓고 있을지야 뻔했다. 야유, 실소, 조롱! 에이프릴이 든 갈퀴는 당장이라도 서준의 뱃가죽을 찢고 안에 든 내용물을 긁어내 버릴 듯이 위협적이었다. 든 이의 흉험한 마음을 고스란히 반영한 흉기였다. 그것이 까딱… 하고 흔들렸다.

“피어, 그 손을 놓고 이쪽으로 와. 널 괴롭힌 부모님을 죽이면서 함께 놀자.”

목장갑을 낀 손이 트레이시의 안면을 가리켰다. 그녀의 육체 중 그나마 멀쩡한 부분은 이제 턱이 빠진 얼굴밖에 남지 않았다. 트레이시는 에이프릴의 말을 따라 하며 밝게 웃었다.

“함께, 놀자.”

“난 그런 걸 바라지 않아.”

희게 질린 낯으로 피어가 빠르게 중얼거리자 에이프릴이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아무리 노력하여도 공감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는 갈퀴를 바로잡았는데, 허수아비와 결합한 몸뚱이가 무척이나 키가 커서 그것만으로도 위압적이었다.

“왜? 나를 괴롭힌 사람한테 복수하는 건 즐거워. 네가 해 보지 않아서 아직 모르는 거야. 아니면, 나보다는 그 남자가 더 믿음직스러워? 이해가 안 가네.”

에이프릴이 보기에 불룩한 블루종 재킷을 입은 청년은 키가 큰 것 외에는 도무지 장점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지금은 그가 서준과 피어를 내려다보는 중이 아니던가. 곧 에이프릴이 가볍고 상쾌한 목소리를 냈다.

“아하! 저 사람이 너를 여기서 내보내 주겠다, 뭐 그렇게 말하기라도 한 거야?”

틀렸다. 따지자면 내보내 준다고 말한 쪽은 피어였다. 서준은 차게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 내려는 손가락을 간신히 구부렸다.

“피어, 그런 건 불가능해. 이 드넓은 옥수수밭을 처음 온 사람이 어떻게 빠져나가? 그전에 트레이시와 베일리한테 죽을 텐데.”

“글쎄. 저 꼴을 보면 날 죽이기는커녕 혼자 서지도 못하지 않나?”

“이런, 들켰어? 사실 트레이시랑 베일리는 운동 부족이거든. 정말 한심한 어른들이지!”

깔깔거리며 웃는 거짓말쟁이는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서준은 에이프릴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물론 치아가 소중했으므로 아주 잠시였다. 그의 불손한 눈초리에 에이프릴-허수아비는 입가에 고소를 띠고는 느릿하게 다가왔다. 철퍽, 철퍽 살덩이가 차지게 부딪치는 소리는 진저리가 날 정도로 참혹했다. 이제 서준과 에이프릴은 고작해야 열 걸음 남짓한 거리를 앞두고 있었다.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어?”

“이래 봬도 우주에서 날아온 괴물하고도 대면한 적이 있어서 지구산은 토종 같고 그래.”

서준은 한껏 허세를 부리며 팔짱을 꼈다. 에이프릴은 말하는 개똥벌레를 보는 시선으로 서준을 내려다보았다. 세상에는 오로지 진실만을 말해도 전달되지 않는 슬픈 경우가 있는 법이었다. 에이프릴이 어린 목소리를 꾸며 냈다.

“난 정말 피어와 친해지고 싶어. 그러니까 이렇게 하자. 피어를 준다면 나는 당신을 옥수수밭에서 나가게 해 줄게.”

“뭐?”

갑작스러운 제안에 피어의 작은 어깨가 팔딱 뛰었다. 트레이시였던 살덩이를 음울하게 힐끗거리던 피어의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에이프릴은 이간계를 쓰려는 걸까? 순간적으로 서준의 머릿속에 손자병법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낡은 책자를 뒤적거리던 머리통을 흔들었다. 허황한 생각이었다.

피어와 서준 사이를 갈라놓는다 쳐도 에이프릴이 얻을 것은 미미했다. 어른이 아이를 내치는 꼴을 관람하며 사특한 마음에 일용할 양식을 줄 수야 있으리라. 하지만 그런 짓을 해 봐야 에이프릴은 눈앞에서 불쾌한 과거를 재연할 뿐이다. 혹은 피어의 희망을 꺾어 버리려는 심산일까? 셀 수도 없을 만큼 구조 요청을 보낸 끝에 겨우 만난 서준에게 버림받는다면 피어는 절망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감정에 크게 의지하는 영혼의 메커니즘에 따라 피어를 악귀로 재탄생시키려는 사특한 모략의 일부일 수도 있다. 하지만 피어의 의지로 벼려진 굳센 눈동자는 그러한 망념을 날려 버렸다.

피어 또한 그간 숱하게 도망쳐 왔다. 어정쩡한 기분으로 에이프릴 앞에 선 게 아니었다. 대체 에이프릴은 무슨 꿍꿍이속으로 저런 제의를 한 걸까? 서준은 왼쪽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긴 속눈썹이 그늘을 만들었다.

“피어를 내주면 그다음에는 내 시체를 도로에 던져 두려고? 너희 같은 놈들이 하는 짓이야 뻔하지. ‘내가 약속한 건 어디까지나 옥수수밭을 떠나게 한다는 거였지, 살려 준다는 뜻은 아니었어.’ 뭐, 이러려고? 퍽이나 믿겠다, 새끼야.”

“어떤 인생을 살면 그렇게 의심으로 가득해져? 난 정말 무사히 내보내 주겠다고 하는 거야.”

“보비, 골든, 프랭크와 한동네에 살면 그렇게 돼. 그나저나 네가 왜? 어디서 주워 먹은 시체에 동정심이 담겨 있던?”

서준의 빈정거림에 허수아비가 목을 갸웃 기울였다. 다만 허수아비는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모가지를 구부리는 행동이 불가능했고, 결과적으로 에이프릴의 가죽과 근육으로 엉겨 있던 대가리가 덜렁덜렁 흔들리는 광경을 자아냈다. 아이처럼 작은 머리통이 장대에 매달려 갸우뚱거리는 장면은 대단히 끔찍했다.

“난 지금까지 옥수수밭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을 단 한 명도 살려 보내지 않았어. 이는 틀림없는 내 실수야. 인정해. 나도 설마 내가 이렇게나 외로워질 줄 몰랐거든.”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가 낭랑히 울려 퍼졌다.

“특히 나와 완전히 같은 죽음을 맞이한 피어에게 진심으로 우정을 느껴. 가족이 부담스럽다면 친구부터 되자.”

“난 아닌데? 혼자만 가지는 감정을 우정이라고 부르지는 않아.”

피어가 딱 잘라 말했다. 야무진 아이의 얼굴은 식초를 마신 듯 잔뜩 찌푸려졌다. 그리고 서준은 기묘한 감각과 마주했다. 에이프릴이 내뱉는 말은 독사처럼 사특했고 일견 피어를 손아귀에 쥐려는 듯했다. 그러나 이 발바닥이 근질거리고 등골이 곤두서는 기분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팔짱을 낀 손이 느슨해졌다. 이것은 예지자로서 단련된 육감 따위가 아니었다. 혼자 엉뚱한 착각에 빠져 한평생을 외톨이로 살아왔기에 잡아챈 직감이었다.

“이 살인 허수아비가 자비를 베푸는 거야.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여. 설마 살아남는 것보다 오늘 처음 본 피어가 소중하다…는 건 아니지? 설마.”

“아.”

얇은 입술이 저도 모르게 벌어졌다. 밀짚모자의 그늘에 가려진 눈이 찬찬히 그를 응시했다. 관찰하는 듯한 눈빛이 서준을 꿰뚫었다. 그리고 서준 또한 에이프릴의 황갈색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너. 처음부터 날 죽일 생각이 없었구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타인이 숨기려 한 은밀한 비밀이 그의 말초 신경을 흥분시켰다. 에이프릴의 눈가가 움찔 떨리는 꼴이 전부 보였다.

피어가 당황스러워하며 서준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서준은 피어를 내려다보았다. 아이가 말한 이야기 속에 정답이 있었다. 그는 피어에게 눈짓하고는 에이프릴을 돌아보았다. 흉하지만 사람에게 생리적인 공포감을 안겨 주는 압도적인 형상의 오브제를.

“너는 부기맨이나 침대 밑의 괴물이 되고 싶은 거야.”

“…….”

스산한 바람이 그들 사이로 불었다. 옥수수가 흔들리며 싸락싸락 소리를 내면서 저들끼리 부딪쳤다. 묵직하게 익은 열매가 저들끼리 툭, 툭 닿았다.

“트레이시나 베일리도, 너도…. 나한테 살인 허수아비에 관해 이상할 정도로 자세하게 알려 줬었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목구멍을 긁으며 새어 나왔다. 로렌 부부는 자연스럽게 다가와 사람인 척 굴다가 본색을 드러냈다. 아니, 드러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되새겨 보면 그들은 부러 끔찍한 모습을 연출했다.

처음부터 대뜸 뱃가죽을 열고 다가왔다면 서준은 그들과 말 한마디 섞지 않고 도주하기 바빴으리라. 그러나 로렌 부부는 사람인 양 행세하며 살인 허수아비의 이름을 슬쩍 흘렸다. 살인 허수아비의 잔인하고 공포스러운 면모를 은근히 흘렸다.

다음으로는 에이프릴이다. 그는 로렌 부부와 달리 살인 허수아비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설명했다. 무작스러운 공포와 무시무시한 과거를 지닌 저주를 흩뿌리는 괴물의 설화를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서준은 옥수수밭에 들어오기 전까지 ‘살인 허수아비’라는 괴물에 관해 전혀 들은 바 없었다. 그야 당연했다. 에이프릴은 옥수수밭에 발을 들인, 길을 벗어난 사람을 모조리 죽였다.

살인의 이유로는 무엇이든 좋았으리라. 다리가 필요하니 충분히 모을 만큼 죽였을 수도 있고, 제가 괴로웠으니 무분별하게 원한을 품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생전의 살인 욕구를 마저 채우려 들었을 수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건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도로 옆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던 로렌 부부의 봉고차는 에이프릴의 마지막 기회였으리라. 하지만 그는 본인 말대로 실수를 저질렀다. 자신이 죽을 때와 비슷한 조합과 광경에 트레이시와 베일리를 흉살한 것이다. 직접 손쓰지 않은 피어도 옥수수밭에서 헤매다 아사했다.

그리고 서준이 피어의 구조 요청을 듣기 전까지 아무도 이곳에 들르지 않았다.

“에이프릴, 넌 불필요한 군살이 필요한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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