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포영화 속 선지자로 환생했다 (70)화 (70/156)

#069

2. 신뢰와 믿음의 가족경영 최저임금 주유소

서준은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많은 준비를 했다. 깨끗하고 건강한 치아를 위한 칫솔, 치실, 치약에 날씨의 변화를 고려한 여름 잠옷, 겨울 잠옷, 특히 극세사로 된 담요는 필수품이었다. 물론 한 번도 쓰지 않은 새하얀 속옷까지. 그러나 생필품은 아무리 아껴 사용해도 닳는 법이고, 도로를 달리는 만큼 줄줄이 새어 나가는 기름이면 두말할 것 없다.

“으음.”

낙후된 도로를 벗어나자 그럭저럭 아스팔트가 갈라지지 않은 길이 나왔다. 하지만 흰 이마에 새겨진 주름은 선뜻 펴지지 않았다. 서준은 왼쪽 눈으로 계기판을 힐끔거렸다. 금방이라도 연료 부족 경고등이 깜빡거릴까 봐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자연스럽게 운전대를 잡은 손에 불쑥 힘이 들어갔다. 급박하게 굴 일은 아니었다. 그의 애차는 당장 주유하지 않아도 달리는 데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란 현실과 동떨어진 망상에 무게추를 두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서준은 차에 기름이 절반 이상 차 있지 않으면 마음이 초조해지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는 정말 자신이 이런 사소한 불안증에 시달릴 줄은 몰랐다.

‘장시간이고 단시간이고 운전을 해 봤어야 알지….’

첫 여행길이자 첫 운행 길이었다. 미력한 경험이 서준의 발목을 잡아끌었다. 그는 버튼을 눌러 창문을 열고 정수리를 슬쩍 내밀었다. 위험한 짓이었으나 주간 고속 도로 제 4-4-4호선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덜컹거리는 트럭만이 도로를 달렸다.

해는 아직 높이 뜨지 않아 바람이 제법 선선했다. 서준은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방수포로 덮인 짐칸을 눈에 담았다. 그도 영 못 써먹을 머리를 지닌 건 아닌지라 오랜 시간 주유소를 거치지 못할 가능성은 대비해 두었다. 트럭 짐칸에는 경유를 담은 연료통이 제법 많이 실려 있었다.

그래도 불안했다.

눈가 밑은 거뭇거뭇하니 쑥 들어가고, 희게 튼 입술은 여러 번 물어뜯어 희미하게 철분의 맛이 났다. 가만히 있어도 오한이 들어 그리 추운 날씨가 아님에도 재킷 지퍼를 목까지 여몄다. 서준의 지친 눈동자가 룸 미러에 비치는 핼쑥한 낯짝을 담아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귀신이 차를 운전한다고 기겁할 몰골이었다. 사실 이 모든 불안증의 원인은 자명했다.

‘귀신에 좀비라니, 이 세상은 미쳤어.’

바로 옥수수밭에서 마주친 모든 존재였다. 죽은 몸뚱이를 이끌고 돌아다니던 트레이시와 베일리, 그들을 조종하던 에이프릴, 유골을 찾아 달라 부탁하던 피어까지.

그때는 도망치기 급급해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좀비를 만나도 숨이 차 헉헉거리기 바빴고, 시체를 엮어 움직이는 허수아비를 맞닥뜨려도 몸을 굴리느라 정신없었다. 피어? 겉으로 보이기야 사지 멀쩡하니 의사소통 원활한 그 아이도 정체는 귀신이었다. 심지어 옥수수밭으로 그를 끌어들인 원흉!

물론 피어는 서준을 바깥세상으로 탈출시켜 준 일등 공신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피어가 하악을 달각거리지 않았다 한들 귀신은 귀신이었다. 워낙 감성적인 이별을 한 탓에 인지가 늦어졌다. 피어의 마지막은 아지랑이처럼 따스하고 희망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가속 페달을 밟고, 삭아 빠진 봉고차를 지나가자 서서히 눈에 낀 콩깍지가 떨어져 나갔다.

객관적인 사실만 나열하자면 무려 이 세상에는 연쇄 살인마, 우주에서 날아온 괴물, 귀신, 귀신이 만들어 낸 움직이는 시체 등이 존재하는 것이다. 현실을 깨달은 서준의 비좁은 목구멍에서 괴성이 터져 나왔다. 비명은 오래도록 울려 퍼졌다.

***

멀리서 빨간 점이 어른거렸다. 서준이 눈을 가늘게 뜨며 노려보듯 앞을 보았다. 옥수수밭은 벗어났지만 여전히 도시는 멀었고 인적은 드물었다. 곧 그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주유소였다.

트럭이 속도를 늦추며 방향을 꺾었다. 비록 여분이 많이 남아 있어도 기름은 다다익선인고로, 서준은 기운 없이 처진 입꼬리를 올렸다. 세계의 구조에 한탄하느라 쉼 없이 달려온 몸뚱이가 구석구석 통증을 호소했다. 잠시 운전을 멈추고 피로를 풀고픈 욕구도 컸다. 팔뚝이며 허벅지, 목뒤까지 욱신거리지 않는 부분을 찾기가 더 쉬웠다. 이윽고 목을 주무르며 트럭을 천천히 세웠다.

주유소는 무척 허름했다. 멀리서 볼 때는 빨갛다고 생각한 지붕은 색이 바래 다홍색에 가까웠으며 기둥은 기름 낀 바닷물처럼 얼룩덜룩했다. 주유 노즐의 손잡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아 때가 타 놀랍도록 지저분했다. 거기에 공기 속에 떠다니는 기름 냄새는 또 어찌나 고약한지! 서준은 제 코를 움켜쥐었다. 숨 쉬는 것조차 망설여졌다.

하지만 표시된 기름의 가격은 몹시 훌륭해 그는 군말 없이 주유를 시작했다. 아직 갈 길이 멀었고 돈은 아낄수록 좋았다. 트럭의 짐칸에 몸을 기댄 서준의 시선이 멍하니 허공을 맴돌았다. 날씨는 여전히 쾌청했다. 새하얀 뭉게구름이 해를 가려 기분 좋을 정도로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살랑거리는 바람을 느끼며 팔과 다리를 쭉 펴니 노곤함이 몰려왔다. 서준은 졸음을 쫓으려는 듯 고개를 거칠게 흔들었다. 이어 그의 손이 자연스럽게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곧 깜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홀로 부산을 떨었다. 긴장이 풀린 골통이 뇌 주름까지 훌훌 풀어 버렸는지 큰일을 저지를 뻔했다. 담배를 글로브 박스에 넣어 둔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는 기름이 느리게 채워지는 소리를 들으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맛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레몬 시가에 그새 버릇이 들었는지 영 입이 심심했다. 다만 주유소에서 불을 붙이는 건 도저히 제정신으로 할 짓은 아니었다. 서준은 뉴스에 방화범으로 나오는 제 얼굴을 상상하다 집어치웠다. 끔찍했다.

‘차라리 껌이나 사탕을 살까….’

총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눈깔이 안쪽의 편의점을 향했다. 으레 주유소가 그렇듯 이 낡아 빠진 곳도 구색을 갖춰 놓았다. 물론 먼지가 끈적하게 달라붙은 유리창 하며 너저분한 외부 매대의 꼴을 보아하니 관리하는 수준이 주유소나 편의점이나 오십보백보였다. 문 옆에는 어디에 썼는지 모를 쇠사슬까지 굴러다녔다.

전직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은 쓸데없이 깐깐하게 굴며 구시렁거렸다. 게다가 그가 아무리 투덜거려 봤자 인근에 다른 편의점이 있을 리도 없었다. 연쇄 살인마, 우주 괴수, 좀비, 귀신, 악령 등이 증명하듯이 세상은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미력한 우주의 먼지는 지갑과 휴대 전화를 챙겨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으헉.”

그러곤 한심한 감탄사를 뱉어 냈다. 편의점 내부는 바깥에서 느꼈던 인상이 고스란히 이어졌다. 청소를 연례행사처럼 하는지 누런 때가 구석구석 끼어 있고 전등이 강력히 교체를 요구하며 불규칙적으로 깜빡거렸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추레한 몰골이 아니었다. 편의점 문 오른쪽에 있는 카운터 옆에는 길쭉한 유리 상자가 진열되어 있었는데, 그 속에는 과학 실습실에서나 볼 법한 해골 모형이 서 있었다.

이 당당하기 짝이 없는 전시에 서준의 섬세한 심장이 크게 뛰었다. 그는 하나뿐인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반면 직원은 카운터 안쪽에 앉아 잡지를 보는 중이었다. 직원으로 말하자면, 모자를 써 짙은 색의 머리카락이 한층 더 어두운색으로 보였으며 눈매는 심드렁했다. 태도는 한결같이 평온하고 평범했다. 기껏 방문한 손님을 향한 반응은 눈짓 한 번이 전부였다. 물론 사교성이 궁한 서준에게 딱 맞는 응대였다.

그는 간신히 유리 상자에서 눈을 뗐다. 주눅 든 모습을 숨기려는 듯 괜스레 천장에 달린 폐쇄 회로 TV를 당당히 바라보고는 어깨를 폈다.

편의점 내부는 직사각형의 공간에 매대가 내 천자 모양으로 놓여 있었다. 카운터 바로 맞은편 매대에는 불꽃놀이용 폭죽 세트가 걸려 있었고, 옆으로 돌아가면 간식거리며 온갖 잡다한 생활용품을 팔았다.

고심 끝에 자잘한 주전부리용으로 과자며 사탕, 껌 따위를 고르자 어느새 품에 한가득 쌓였다. 차곡차곡 포개진 간식을 카운터에 와르르 쏟자 직원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서준은 속으로 혀를 찼다. 카운터 구석에 대강 말린 포스터며 성가셔하는 표정이며, 이 직원은 게으름을 부리던 중이 틀림없었다.

속으로 혀를 차며 기계음을 듣던 서준의 시선이 마치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직원의 등 뒤를 향했다. 수많은 담배가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그의 차에는 레몬 시가가 수북했다. 갑에서 꺼낸 양으로 노트르담 성당을 건축해도 될 수준이었다. 그러니 이성적으로 따져 볼 때 얌전히 과자나 껴안고 나가는 게 옳았다. 하지만 끈기와 인내는 부평초처럼 어디론가 흘러갔다. 서준은 냉큼 입을 열었다.

“저 담배 한 갑 얼마예요?”

“담배요? 레드 패밀리 말씀하시는 건가요.”

직원은 여전히 성가시다는 태도로 기하학적 무늬가 들어간 담배 한 갑을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6.15달러예요. 평균이죠. 그러면 담배도 같이 계산할까요?”

“아, 예. 예, 잠시만요. 동전이 어디에 있더라.”

레몬 시가에게서 벗어나겠다는 마음이 서준의 신체 말단을 조종했다. 최근 이것도 그렇게까지 나쁜 맛은 아니지… 따위의 헛된 망상이 슬금슬금 몸집을 키워 나가서 심란해졌던 참이다. 얼른 자신의 혀가 불량품에 익숙해지지 않도록 조처해야 했다.

하지만 본디 몸을 날렵하게 움직이는 재주가 없는 서준이었다. 허둥거리는 손길이 동전 몇 개를 바닥에 떨어뜨리는 실수는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25센트 동전이 맑은 소리를 내며 바닥과 부딪혔다. 서준은 길쭉한 몸을 구부려 쭈그려 앉았다. 동전은 카운터와 바닥의 틈으로 들어가 은회색 빛을 반사했다.

“아이고.”

앓는 소리를 내며 서준의 손이 동전을 끄집어냈다. 그는 손바닥에 놓인 동전을 바라보며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턱 아래에 벌겋게 열이 올랐다. 은색으로 빛나야 할 동전에는 나쁜 농담처럼 검붉은 자국이 쓸려 있었다.

“저기요, 주워 드려요? 깊이 들어갔어요?”

머리 위에서 직원이 귀찮은 티를 숨기지 않고 말했다. 서준은 하나뿐인 눈을 크게 뜨고 느리게 호흡했다. 그는 침을 삼키고 대꾸했다.

“아니요, 아니. 괜찮습니다. 제가 꺼낼게요.”

직원은 그러시라며 무관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곧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인 소음이 귀를 간지럽혔다. 동전을 쥔 주먹은 가볍게 떨렸다. 부정하고픈 마음이 절실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살인 허수아비를 경험했다. 예방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수는 없었다.

마침내 서준은 결심했다. 비록 두통, 치통, 관절통, 근육통을 겪더라도 수상쩍은 돌다리는 두드리고 건너야 했다. 그는 느릿하게 눈을 떴다. 새까만 눈동자가 얇은 고무장갑 위에 놓인 동전을 향했다. 조지 워싱턴의 머리 위로 핏물이 절묘하게 지나갔다. 사실 붉은 기는 얼마 없었다. 미처 굳지 못한 혈액은 색이 너무 짙어 검은색 장미 꽃잎 같았다.

장갑을 벗자 창백하고 길쭉한 손가락이 드러났다. 푸른 핏줄이 돋은 흰 손등이 머뭇거렸으나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짧게 잘린 손톱이 바닥을 긁고, 지문 사이로 피가 스며들었다.

쿵! 묵직한 소리가 카운터 아래쪽에서 났다. 직원이 인상을 찌푸리며 잡지를 덮었다.

“손님?”

짜증이 서린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서준은 허둥거리며 일어섰다. 그는 정수리를 문지르며 다른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아, 괜찮아요. 잠깐만요. 잠시요. 예, 아버지. 저예요. 당신의 건장한 아들이요.”

서준은 재킷에서 꺼낸 휴대 전화를 귀에 딱 붙이고는 뒤돌았다. 호들갑을 떠는 모습에 직원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예? 보비가 초콜릿을 먹다가 토했다고요? 오, 저런…. 하지만 아버지, 솔직히 보비는 20년을 살았으면 장수한 편이라고요. 아, 울지 마세요. 제가 당장 갈게요!”

그는 들으란 듯이 바락바락 소리치고는 휴대 전화를 거칠게 뒷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서준은 언짢은 표정을 짓는 직원에게 서둘러 말했다.

“미안해요. 아니, 글쎄, 보비가 먹으면 안 될 걸 먹었다잖아요?”

“보비가 누군데요?”

“남의 집 개요. 그보다 그 포스터, 얼른 붙이는 편이 좋아요. 사장들은 직원이 노는 꼴을 못 본다니까.”

아무 말이나 지껄인 서준이 둘둘 말린 포스터를 삿대질하며 바람처럼 편의점을 빠져나갔다. 발바닥에서 불이 나는 듯했다. 고약한 기름 냄새, 바짝 마른 입, 초록색 바닥, 장갑 속 메마른 핏자국, 어디선가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 모든 감각 기관이 활짝 열려 그곳으로 수많은 자극이 통과했다.

서준은 황급히 자신의 트럭 운전석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정신없이 움직인 탓에 문을 닫을 때 다리가 끼었지만 고통을 느낄 새도 없었다. 그의 손이 우악스럽게 운전대를 돌렸다. 룸 미러에 비친 낯빛은 끔찍했다. 안색이 희다 못해 푸르게 질렸다. 검푸른 입술이 부들부들 떨리고 뺨이 움찔거렸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트럭이 주유소를 빠져나갔다. 서준은 기껏 주유한 기름을 죄 바닥에 흩뿌릴 기세로 달렸다. 그는 비명 지르듯 생각했다.

‘사람을 쥐어짜서 기름을 짜내는 친환경을 표방한다고?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 저긴 가족 경영 주유소가 아니라 가족 경영 살인마 집단이잖아!’

그리고 트럭이 사라진 몇 시간 후, 노랗고 작은 자동차가 주유소로 입성했다. 장수풍뎅이처럼 둥글고 귀여운 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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