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
요한은 사냥 직전의 날짐승처럼 고요했으나 창고 안에 있는 사람은 초인적인 육감을 발휘한 모양이었다. 인기척이 느껴졌을 리도 없는데 목을 긁듯 쉰 기침 소리를 크게 내더니 곧 애원하기 시작했다.
문을 열어 주세요, 제발요…….
애처로운 목소리에도 요한은 성급하게 창고를 열지 않았다. 요한은 우선 작업복 입은 남자를 떠올렸다. 그는 이것이 직원 전용 창고라고 말했으며 절대 열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곳은 남자의 편의점인 듯했으며 그의 주장은 일견 타당해 보였다.
그러나 남자의 주의와 창고 속 간청을 사회 통념적으로 비교했을 때, 요한은 무엇이 옳은지 쉽게 판단할 수 있었다. 그는 손잡이를 붙잡으려다 잠시 멈췄다. 손잡이에는 무언가 끈적하고 검은 액체가 묻어났다. 순간 피인가 싶었지만 더 미끄럽고 냄새가 고약했다.
한숨을 내쉰 요한은 벽에 대강 손을 문지르고 손잡이를 돌렸다. 창고는 잠겨 있지 않았는지 쉽게 열렸다. 물론 기름칠을 덜 한 철제문답게 힘겨운 소리를 내기야 했다. 깜빡, 깜빡 흔들리는 형광등의 창백한 빛이 문이 열린 공간으로 쏟아졌다.
희고 푸르스름한 빛이 점점 범위를 넓혀 가더니 마른 다리를 비추었다. 연약한 인상의 여자가 철제 선반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그녀가 몸에 걸친 것이라곤 새하얀 슬립뿐으로, 양말은 고사하고 신발조차 없었다. 희게 튼 입술이 힘에 부친 듯 메마른 숨을 내뱉었다. 어둠이 완전히 가시지 않아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여자가 무척 피로한 기색인 것은 확실했다.
새까만 창고 안에서 여자의 눈이 간신히 뜨였다. 처음에는 흐릿하게 초점이 맞지 않던 눈동자가 점차 또렷해졌다. 그녀는 요한을 바라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도와주세요, 제발.”
여자가 봐 달라는 듯이 다리를 움직이자 발목을 꽁꽁 묶은 케이블 타이가 그제야 존재감을 드러냈다. 요한은 양팔을 등 뒤로 돌린 부자연스러운 자세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당장 창고 속으로 뛰어드는 대신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껌과 사탕을 번갈아 보았다. 요한은 결국 무가당 사탕을 카운터 위에 올려 둔 다음 창고 안으로 발을 옮겼다.
창고는 생각보다 넓다면 넓고, 좁다면 좁은 애매한 평수였다. 짐을 치운다면 그럭저럭 공간이 남겠지만 창고라는 이름답게 별별 잡동사니에 판매 용품이 상자째 쌓여 있었다.
“어둡네요. 여기 불 들어올까요?”
큼직한 손이 벽을 더듬으며 스위치를 찾았다. 그러나 한참을 이리저리 만져 보아도 손에 걸리는 게 없자 요한은 차라리 휴대 전화를 손전등 대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때 여자가 여전히 거칠고 쉰 목소리로 알려 주었다.
“줄을 당기는 방식이에요. 조금 더 들어와서…. 네, 중앙쯤에.”
“와.”
여자의 설명에 따라 손을 뻗자 천장에서 길게 내려온 줄이 있었다. 그것을 잡아당기자 필라멘트에 전류가 흐르며 불꽃이 튀고 백열전구에 불이 들어왔다. 갑자기 대낮처럼 밝아지진 않았으나 광원이라고는 열린 문으로 들어온 빛이 전부였던 창고가 둥그스름하게 밝아졌다.
요한이 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건 바로 이때였다. 전체적인 윤곽만이 그려지던 조금 전과 달리 세세한 부분까지 보였다. 우선 그녀는 부상자였다. 단순히 손과 발이 묶이기만 하지 않고 전두골 부근이 검붉은 액체로 젖어 머리카락과 엉겨 있었다. 흐른 액체가 이마까지 흘렀는지 오른쪽 눈썹과 눈꺼풀이 붉었다. 백열전구의 빛을 받아 정수리 부근이 유독 환했다. 적색 머리카락이 꼭 붉은 기가 도는 금발 같았다.
여자의 상태를 본 요한은 눈길을 돌려 전구를 검지로 툭 건드렸다. 물론 요한이 아무리 물리, 수학, 과학과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다지만 그도 백열등을 처음 조우하는 영광을 누린 건 아니었다. 다만 이 창고의 백열등은 마치 크리스티나의 할머니 돌리의 집에 있는 다이얼 전화기를 봤을 때와 비슷한 감상을 안겨 주었다.
요한은 입을 헤벌리고 썩 밝지 못한 전구를 구경했다. 속이 탄 건 여자였다. 그녀는 액체가 말라붙어 움직이기 힘든 눈꺼풀 대신 다리를 움찔거리며 요한을 불렀다.
“저기, 저기요. 지금 이럴 시간 없어요. 언제 그 미치광이가 돌아올지 몰라요. 그 사람이요. 여기 사장. 그 사람 제정신이 아니에요.”
“아, 그런가요. 그것참 곤란한 일이네요.”
요한은 여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입맛을 다셨다. 그는 다시 뒤를 돌아 편의점 내부의 폐쇄 회로 TV가 있는 부근을 곁눈질했다. 요한이 여자를 다시 돌아봤을 때 그의 태도는 몹시 뜨뜻미지근했다. 책임감을 비롯한 타인을 도와주겠다는 의욕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신경이 온통 다른 곳에 쏠린 기색을 여자는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사실 모르는 게 더 어려웠다.
“혹시 제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그런가요? 오, 제발. 믿어 주세요. 전, 전 당신과 같아요. 그저 이곳에 잠시 들렀을 뿐인 고객에 불과하다고요.”
여자의 이름은 레이지였다. 그녀는 마른 목을 축이듯 침을 삼키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저기, 저 밖에서 개 우는 소리가 들리죠? 제 개예요. 저는 개를 데리고 이곳에 잠시 기름을 넣으러 들렀을 뿐인데, 흐윽…. 내, 내 목숨처럼 소중한 아이가 무슨 짓을 당하고 있는 걸까요. 아아…. 정말로, 정말로 이곳 사장은 위험해요. 전 기름을 넣고 목이 말라 편의점에 음료를 사러 들어왔는데 아무도 없었어요. 그런데 뒤에서 갑자기 머리를, 머리를 때렸던 것 같아요.”
“머리?”
“네. 제 머리에, 이 상처 말이에요.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곳이었어요. 오, 옷도 벗겨져서. 사장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나는 너희처럼 멍청한 비계를 잡는 게 취미야.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그런 끔찍한 말을 듣자 정말 혼란스럽고 무서웠어요. 그 남자요, 사장은 제 손수건으로 자신의 손을 닦으며 나갔죠.”
“아, 그렇군요.”
“저는 필사적으로, 정말 필사적으로 아무라도 좋으니 제 말을 들을 사람이 있었으면 했어요. 그리고 당신이 제 목소리를 들은 거예요.”
“음, 그래요?”
“네, 그러니 가까이 와서 이걸 좀 풀어 주세요….”
레이지가 어깨를 들썩거렸다. 자신의 등 뒤를 보이려는 듯한 몸짓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몸을 움직이기 불편했다. 요한이 레이지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평소 날렵하게 움직여 그리 티가 나지는 않지만 그의 몸은 탄력 있는 근육의 비중이 높았다. 요한은 제 딴에는 대단히 진지한 말투로 물어보았다.
“레이지 씨, 혹시 CCTV 영상 따로 저장하는 방법 알아요?”
“CCTV요? 그런 건 갑자기 왜….”
갑작스러운 질문에 레이지는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녀는 늦지 않게 스스로 답을 찾아냈다.
“아아! 경찰에 보여 줄 증거로 삼을 셈이군요. 할 수 있어요.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닌걸요.”
빠르게 찾아서인지 정답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러니저러니 능력만 갖췄다면 요한 입장에서야 편의점 사장이건 창고에 갇힌 여자건 상관없었다. 그는 이를 드러내며 만족스럽게 씩 웃었다.
요한은 레이지의 발치에서 웅크리고 있던 몸을 빠르게 일으켜 뒤를 보았다. 창고의 열린 문 앞에 당황스러운 기색의 남자가 서 있었다.
언뜻 보였던 주황색 옷 때문에 주유소와 편의점의 사장인가 착각할 뻔했으나 남자는 다른 사람이었다. 러닝셔츠에 그대로 작업복을 걸친 차림새 대신 챙이 달린 야구모자와 유니폼 조끼를 입은 직원이었다. 허리춤에는 멍키 스패너 등 공구를 장비할 수 있는 띠가 둘러져 있었다. 무엇보다 이 남자의 정수리에는 짙은 갈색 머리카락이 풍성하게 나 있었다.
그는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 요한과 레이지를 한 명씩 차례대로 보았다. 직원이 머뭇거리며 창고 밖에서 굳어 있자 레이지가 다급하게 외쳤다.
“도와주세요! 저 여기에 갇혔어요. 제발 나가게 해 주세요.”
“다, 당신들 뭐야?”
“귓구멍이 막혔나요? 갇혔다고요!”
“어, 어어. 예.”
그는 부모를 찾는 듯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포기한 채 창고 안으로 발을 들였다. 양팔로 가슴팍 언저리를 보호하듯 어깨를 움츠린 자세였다. 직원은 썩 영민하지 못한 머리를 지닌 듯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이 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저는 여기 사장에게 폭행당하고 감금당했어요.”
“우리 사장님이요?”
“아, 같은 말을 몇 번이나 하는 거예요? 시간도 없는데!”
직원의 비협조적인 태도에 괴로운 건 레이지였다. 그녀는 어리바리한 직원 대신 요한에게 다시 부탁했다.
“저 사람은 안 되겠어요. 다가와서 제 손목 좀 풀어 주세요. 그러면 발목은 제가 알아서 해 볼게요.”
“음….”
요한은 레이지와 직원 사이에서 턱을 매만졌다.
“두 사람은 처음 보는 거죠?”
“맞아요. 저는 뒤에서 습격당했는데, 여긴 너무 어두워서…. 그래도 바깥의 소리가 조금은 들렸어요. 당신이 들어와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레이지가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직원을 돌아보자 그 역시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님이 그런 사람인 줄 저도 몰랐다고요. 최저 임금이나 받으면서 일하는데 이런 내밀한 사정을 알 리가 있겠어요? 가족이라면 모를까. 그나저나 사장님이 담배를 피우러 나가서 다행이에요. 편의점 내부가 아니면 주유소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피워야 하거든요.”
직원이 왼손을 이마에 얹으며 중얼거렸다. 그의 오른손은 유니폼 주머니에 들어가 꿈지럭거렸다. 덕분에 요한은 인제야 그의 가슴에 달린 명찰을 보고 이름을 알아냈다.
“알았어요, 번. 그나저나 당신은 여기 직원이니 CCTV 조작을 할 줄 알겠네요?”
“예? 뭐. 나름대로, 간단한 기본 조작이라면야….”
번의 대답에 요한이 시원스레 미소 지었다. 상황과 도통 걸맞지 않은 표정에 번이 이상한 걸 보았다는 듯 몸을 움찔 떨었다. 그의 유니폼 조끼에는 주머니가 여럿 달렸는데, 번이 손을 넣은 주머니는 입구가 위쪽이었다.
그러나 번이 몸을 뒤로 돌리며 팔이 흔들린 탓에 입구가 사선으로 난 주머니에서 동전이 떨어졌다. 창고의 바닥은 편의점 내부처럼 고르지 않았다. 시멘트를 제대로 바르지 않아 찬기가 올라오는 울퉁불퉁한 지면에서 동전은 겨우 한 바퀴를 빙글 돌았다. 그러나 이 순간 창고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동전에 쏠린 것 또한 당연했다.
우연한 조건이 갖춰져 그것은 느리게 회전했다. 기묘한 광경이었으리라. 동전은 금시에 팩 드러누웠다. 부지불식간에 지나간 짧은 꿈결 같은 순간이었다.
사실 엄밀히 따져 별일은 아니었다. 지저분한 바닥에 동전 하나 떨어진 게 뭐 그리 대수겠는가? 하지만 이곳에 요한이 있었다. 그는 바닥에 누운 동전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는데, 우리 동네는 캘리포니아에 있지만 시합 때 던지는 동전은 늘 조지아주 동전이었어.”
갑작스럽고 엉뚱한 발언이었다. 레이지와 번이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요한은 그러나 말거나 태연한 낯짝으로 말을 이었다.
“왜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는데…. 아무튼 복숭아가 있는 쪽이 공격, 아닌 쪽이 수비. 그리고 나는 늘 선공이 마음에 들더라.”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요한은 번의 어깨를 붙잡고 그의 아랫배를 후려갈겼다. 끄윽…. 허리가 꺾이고 번의 입술이 오므라들었다. 동그랗게 벌린 입에서 침이 튀었다. 힘이 빠진 다리가 바닥으로 주룩 미끄러졌다. 레이지의 가슴팍이 빠르게 오르내렸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다리를 버둥거렸다.
“무슨 짓이에요? 대체, 대체 이게 무슨 짓이에요?”
요한은 자신의 행동 이유나 원리를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눈을 까뒤집고 쓰러진 번의 옷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주머니는 당연하고 바지 속, 셔츠 안쪽까지 꼼꼼히 살핀 요한이 레이지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행히 총을 숨기지는 않았나 봐요.”
“아니, 갑자기 왜 그 사람을….”
요한은 레이지의 의문이 타당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 사장이 하는 짓이 대담하잖아요? 직원 모르게 가게 안에서 사람을 습격하고, 그걸 또 아무나 드나드는 창고에 처박아 둔다는 게…. 가능할까요? 뒤처리에 신경 쓰는 편도 아닌 것 같던데. 이걸 정말 모를 수가 있을까 싶어서요.”
“그, 그렇지만 만약에 틀리면 어떡하려고요?”
“아, 그러면 당연히 사과해야죠.”
어깨를 가볍게 추어올린 요한의 손이 번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나왔을 때 그의 손가락에는 주사기가 하나 있었다. 요한은 정체불명의 우윳빛 액체를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확실한 건, 그게 영양제는 아닐 터이다. 레이지가 버석한 입가에 침을 바르고 간절히 바랐다.
“그럼, 그럼 이제 얼른 저를 풀어 주, 흣!”
그녀는 말을 하던 중 짧게 신음을 내질렀다. 요한이 레이지의 몸에 주사기를 꽂아 버린 것이다. 그녀는 믿을 수 없어 제 핏줄 속으로 파고드는 바늘과 요한을 번갈아 보았다. 손가락으로 주사기를 꾹 누르던 요한이 레이지와 시선이 마주치자 눈을 곱게 접어 가며 웃었다.
“당신도요. 아니라면 미안해요?”
이, 씹….
곧 그녀의 눈이 흐려지더니 레이지는 말을 끝내지 못하고 옆으로 쓰러졌다. 완전히 정신을 잃은 레이지를 내려다보던 요한이 아, 하고 자신의 정수리를 벅벅 문질렀다. 어차피 레이지는 묶여 있으니 번에게 놓는 편이 한결 나았던 게 아닌가. 요한은 멋쩍은 표정으로 목을 주물렀다.
“나도 참 실수를 많이 한다니까.”
이런 덤벙대는 면모를 서준이 귀엽게 여겨 준다면 참 좋을 텐데, 아마도 부질없는 희망이리라. 이미 저지른 일은 되돌릴 수 없으니 그는 마음을 가볍게 먹기로 했다.
요한은 번의 허리춤에 있던 멍키 스패너를 제가 쥐었다. 차가운 쇠의 감촉이 미적지근한 온도의 손바닥과 맞닿았다. 그는 그것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그러면 이제 어떡할까….”
깡, 가뿐히 휘두른 소리가 맑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