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6
3. 악마는 사거리에서
“밤늦게까지 이게 무슨 꼴이야.”
트럭 앞 유리에 서준의 피로한 얼굴이 비쳤다. 가로등 하나 없는 도로는 깜깜해 오직 트럭의 전조등만이 앞길을 밝혔다.
사람 잡는 주유소의 일로 경찰과 실랑이를 벌이던 서준이 자신의 아늑한 트럭에 도로 몸을 구기게 된 건 어처구니없는 소식 때문이었다. 과거를 읽는 위대한 초능력자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엉덩이를 뭉그적거리며 늦장을 부리던 경찰관이 빠릿빠릿해진 것은 주유소에 큰불이 났다고 연락이 온 후였다. 그는 ‘뭐? 꼬리가 탄 개가 어쨌다는 거야? 똑바로 말해!’ 하며 짜증을 부리다 날파리 쫓듯 서준에게 꺼지라는 식으로 손짓했다. 장소가 장소인 만큼 전혀 없는 일은 아니었으나, 등골이 오싹한 일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이유가 무엇이건 이제 그곳에 소방관이며 경찰이 몰릴 터이니 서준이 더 입을 댈 필요도 없었다. 그의 양심도 이만하면 충분하다며 등을 떠밀었다. 서준은 양심의 조언에 따라 재빨리 그곳을 벗어났다. 일말의 찝찝함이야 남았으나 고작 그따위 궁금증을 해결하겠답시고 사람 잡아 기름 짜는 주유소에 다시 들를 마음은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어쨌든 신고했다는 안도감이 서준의 어깨를 든든하게 받쳐 주었다. 그러나 당장 자리를 벗어나야겠다는 좀생이 근성을 발휘하고 한 시간이 지나서야 현실을 깨달았다. 그는 종일 굶은 데다가 살인자의 코앞에서 도망치느라 심력을 크게 소모한 상태였다. 중력의 영향을 과하게 받은 몸뚱이가 힘없이 늘어지고 텅 빈 배 속에서 음식물을 요구했다. 묵직한 피로는 그의 눈꺼풀에 매달려 응석을 부렸다.
문제는 다급하게 운전대를 잡느라 무작정 출발해 버렸다는 점이다. 일직선으로 쭉 뻗은 도로의 주변으로는 사시나무만 빼곡했지 숙박할 여관은커녕 이렇다 할 민가조차 보이지 않았다. 물론 트럭이라는 포근한 공간이 있는 만큼 밤이슬을 맞으며 노숙할 걱정은 없었다. 그도 여건이 되지 않을 때는 적당히 한갓진 곳에 차를 세우고 눈을 붙일 각오도 한 바였다. 그렇지만 지금만큼은 푹신한 침대와 몸을 깨끗이 씻을 수 있는 욕탕이 몹시 그리웠다.
‘트럭에서 자면 영 삭신이 쑤신단 말이지….’
더군다나 차에서 야숙할 때면 창을 두드리는 바람이며 짐승 우짖는 소리가 사람을 불안스럽게 만들었다. 당장 서준에게 필요한 건 안락한 휴식처였지, 불길한 상상과 망상으로 가득한 비좁은 운전석이 아니었다. 긴장으로 어깨가 쭈뼛 선 서준이 글로브 박스에서 꺼낸 지도를 후다닥 펼쳤다.
“어디 보자, 솔트레이크시티까지는 가는 길이 너무 멀고. 그나마 들를 만한 데는 스노우빌인데. 아니지, 여기 관광지였나?”
하도 톰팃톳에만 처박혀 살다 보니 이 길이 저 길 같고 저 길이 이 길 같았다. 외로운 눈동자가 희미하게 떨리는데 문득 빛이 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얼굴을 들자 전등알이 조르륵 달린 간판이 요란하게 번쩍거렸다. 빨간색과 초록색이 번갈아 깜빡거렸다. 눈이 따갑도록 현란한 빛 속에서 서준은 어렵사리 글자를 읽었다.
“웰컴 투 유타피아…. 유타피아?”
유토피아를 잘못 읽은 줄 알고 눈을 끔뻑였지만 철자는 유타UTAH가 맞았다. 이름으로 말장난하는 동네가 톰팃톳 말고도 있다니 통탄할 따름이었다. 그래도 서준에게 있어서는 갑자기 나타난 동아줄이었으므로 기꺼운 마음으로 운전대를 돌렸다. 트럭이 탈탈거리며 높게 자란 사시나무 군락을 지나쳤다.
밤이 늦어서인지 유타피아는 고요했다. 딱 한 군데만 빼고.
눈부신 네온사인 불빛이 달린 술집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간판에는 b.y.d라고 적혀 있었는데, 이것이 어떤 단어의 약자인지 아니면 그대로 읽는지는 알 수 없었다.
불빛이 환하게 나는 건 비단 간판만이 아니라 가게 내부도 마찬가지였다. 근처 가정집에서 항의하지 않을까 싶은 정도로 흥청거리는 그림자가 바깥까지 길게 늘어졌다. 거기에 후각을 자극하는 고기와 기름 냄새라니…. 저도 모르게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잠도 잠이었지만 코를 찌르는 냄새에 허기가 도졌다.
서준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홀린 듯이 근방에 트럭을 세웠다. 블루종 재킷 주머니에 지갑과 휴대 전화를 찔러 넣은 그는 마치 대낮처럼 마구 떠들어 대는 술집의 문을 열었다. 유려한 곡선의 스윙 도어를 밀고 발을 내디뎠다.
허우대가 멀쩡한 청년은 순간 우뚝 멈추어 섰다.
둥근 틀에 가느다란 봉이 맞춰 끼워진 윈저 체어와 둥근 목제 테이블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벽에는 사슴이며 곰의 대가리가 박제되어 새까만 눈동자를 반들거렸다. 카드놀이를 즐기는 남자와 그 맞은편에서 물을 홀짝거리는 일행, 비좁은 공간을 어떻게든 파고들어 바삐 술잔을 나르는 급사(관청이나 회사, 가게 따위에서 잔심부름을 시키기 위하여 부리는 사람)에 양념을 발라 구워 겉 부분이 살짝 탄 양고기나 머스타드 소스를 듬뿍 뿌린 소시지, 열이 피어오르는 구운 감자까지…. 마치 영화에서나 보던 서부 시대의 술집 같은 분위기였다.
신묘한 발놀림으로 술집을 누비던 급사가 새로운 손님을 알아차리고는 한쪽 눈을 깜빡 감았다. 그는 애교 있는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재밌죠? 그런 콘셉트예요. 낮에 오면 키우는 염소도 볼 수 있어요. 여기 주인이 빅토리아 시대 때 이주해 온 사람 후손이라나.”
유쾌하게 떠든 급사는 쟁반 위 맥주잔을 달강달강 흔들며 떠났다. 서준은 잠시 얼이 빠져 문 앞에 서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빈자리에 털썩 앉았다. 술에 취한 남자가 아무렇게나 두드리는 피아노 건반을 배경음 삼아 연신 풀 하우스를 외치는 취객의 카드를 슬쩍 훔쳐보니 막상 손에 든 건 백 스트레이트였다. 풀 하우스, 풀 하우스를 연호하다 앞으로 엎어지는 꼴로 보아선 목숨을 건 도박까지는 아닌 듯했다. 정신이 쏙 빠져나갈 것 같은 경쾌한 공간이었다. 시들거리던 눈이 어느새 맑고 산뜻한 빛을 뿜었다.
“메뉴판이요. 아, 그리고 선지급이에요.”
바텐더가 가져다준 메뉴판을 받으며 서준은 우선 한 끼 식사한 다음 숙박할 곳이 있는지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주문을 한 뒤 물을 마시며 촌놈 티를 풀풀 풍기는 서준의 귀에 짜랑짜랑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그도 당연한 것이 시끄럽게 떠든 사람은 바로 서준의 옆자리에 있던 중년 남자였다.
“아, 내 말을 들어 봐. 여기 사거리 분명해. 악마가 나오는 사거리가 분명하다고!”
“저 친구 또 취했네. 요즘은 악마에 꽂혔나 봐? 그래, 마술은 자네도 영 글렀다 싶지? 그나저나 악마라니, 왜 아주 천사의 오거리도 있다고 하지 그러나.”
“이 양반이 허구한 날 속기만 했나! 글쎄, 들어 봐. 철물점 둘째가 시 미술 대회에서 대상을 탄 거 말이야. 그게 그 집 둘째 실력으로 말이 되나? 분명 사거리의 악마와 거래를 한 게 분명해.”
“자네가 우리 집에 들른 후 사라졌던 딸아이 인형 결혼반지가 철물점에서 발견된 거에 비하면 놀라운 일도 아니지. 이 친구야, 그거 도금이었어.”
“큼, 큼!”
갈색 머리카락이 거의 이마 선 뒤쪽으로 물러난 남자가 얼굴을 붉히고 괜히 헛기침을 해 댔다. 덕분에 옆에 앉은 서준의 몸이 툭 치였다. 서준은 속으로 구시렁거리면서 슬금슬금 거리를 벌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중년 남자는 뻔뻔스레 지인에게 큰소리쳤다.
“내가 그것만 가지고 이러려고? 철물점 둘째가 제 친구한테 하는 이야기를 내가 똑똑히 들었다니까. 한밤중에 사거리에서 만난 쌍둥이의 부탁을 들어주었더니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해서, 어? 미술 대회에서 입상하고 싶다고 한탄했다고. 그랬는데, 보게. 대상이라고, 대상!”
“똑똑히 엿들은 게 아니라? 그리고 철물점 둘째 그림이 그렇게 못나지도 않아. 뭐냐, 아방가르드. 심사평에도 아방가르드함이 있다고 적혀 있었는데. 그보다, 자네 여기서 이렇게 술 퍼먹고 있어도 괜찮겠어? 집에서 싫어한다며.”
“흥, 우리 집 여편네라면 지난주에 친정으로 돌아갔어. 내 얼굴이 꼴도 보기 싫다나. 남자가 놀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이해심도 없는 누구 덕분에 집 꼴이 아주 엉망이야.”
서준이 즐겨 보는 영화의 장르에 악마는 종종 등장했으나, 아직도 그의 내면은 한국인 비율이 높아 악마와는 조금 문화적 거리감이 있었다. 서준은 제 취향이 아닌 소재에 그들의 이야기를 건성건성 들었다.
그러나 가까이 앉은 죄로 인해 온갖 시시콜콜한 정보를 듣게 되었다. 더군다나 중년 남자의 지인은 요약, 정리에 재능 있는 편이었다. 그는 중년 남자가 한 말을 깔끔하게 간추렸다.
“그러니까 자네 말은 사거리에서 만난 악마의 부탁을 들어주면 악마가 소원을 이루어 준다 이 말인가?”
“그렇지! 안 듣는 체하더니 잘 듣고 있었군, 그래.”
중년 남자가 벌겋게 달아오른 볼을 문지르며 식탁을 치자 서준의 물잔이 덜컹 흔들렸다. 곧 중년 남자의 지인이 혀를 끌끌 찼다.
“그러면 그게 소원 들어주는 요정이지 악마는 왜 악마야.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그건 말일세, 부탁을 제대로 들어주지 못한다면 악마에게 끔찍한 일을 당하기 때문이지! 악마는 사특한 뱀의 눈으로….”
“뱀의 눈? 주사위 숫자가 1밖에 안 나오는 그거? 같이 주사위나 던지면 재밌겠네. 정말 숫자가 1밖에 안 나오면 내가 술도 사 줄 수 있어!”
백 스트레이트 카드를 쥔 남자가 몸을 가누지 못해 가게의 기둥에 머리를 기대며 소리쳤다. 그의 입가에는 맥주 거품이 묻어 있었다. 중간에 뚝 끊겨 버린 말에 중년 남자의 지인이 팔을 툭 치며 물어보았다.
“그래서 끔찍한 일은 무슨 일인데?”
내내 심드렁하다가 조바심을 내는 게 재밌었는지 중년 남자가 껄껄 웃으며 대꾸했다.
“그야 나도 모르지! 중요한 건, 악마의 규칙에는 늘 함정이 도사린다는 거야.”
그때 서준이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급사가 재바른 손길로 쟁반 위의 그릇을 차곡차곡 내려놓았다. 뜨끈하게 구운 소시지와 맵게 조린 콩, 수북하게 쌓인 양배추와 시큼한 피클, 세 종류의 소스, 마지막으로 흰 거품이 그득하게 올라간 맥주였다. 절로 입가에 침이 고이고 위장이 쪼그라들며 꼬르륵 우는 소리를 냈다.
‘악마고 자시고 우선 밥이나 먹자.’
서준은 손바닥을 비비고는 떨리는 손으로 포크를 집어 들었다. 손이 요동치는 게 허기 때문인지 후각을 자극하는 기름진 스모크 향 때문인지 헷갈렸다. 날카로운 포크의 끝이 탄력 있는 소시지를 꿰었다. 위장이 당장 저 기름진 고기를 내놓으라며 윽박질렀다. 그리고 입을 크게 벌리고 소시지를 씹으려 할 때였다.
꽝, 하며 다시 식탁이 흔들렸다. 서준의 소중한 저녁 한 끼도 잠시 중력을 거슬렀다. 저도 모르게 그릇을 꼭 껴안은 서준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의 옆자리인 중년인의 왼쪽, 즉 서준보다 두 칸 옆에 앉은 늙수그레한 남자가 텅 빈 유리잔을 세게 내려놓았다.
배가 둥글게 튀어나온 남자는 새하얀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르고 가슴팍에는 보안관 배지를 달았다. 녹색 바지에 폭이 넓은 벨트를 찼고, 그보다 색이 옅은 셔츠에 긴 진녹색 넥타이를 맸다. 카우보이모자에 검은색 점퍼를 입은 외양은 어딜 보아도 보안관다운 모습이었다. 코끝이 새빨간 보안관이 불만에 찌든 어조로 크게 성질을 부렸다.
“요즘 놈들은 규칙이 장난인 줄 알지!”
그리고 하필이면 소시지를 크게 한입 베어 문 서준과 눈이 마주쳤다. 보안관의 벌건 눈이 사냥감을 찾은 맹금류처럼 번쩍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