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
악마는 붉은 눈의 도우드였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초록 눈의 도우드가 사람이라는 뜻이다. 안도한 탓일까? 나무젓가락 같은 다리에서 힘이 풀려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기실 마음 가는 대로 하자면 사거리의 대로에서 사지를 뻗고 드러눕고팠다.
‘탈출…. 탈출이 코앞이다!’
왼쪽 눈에서 광명이 비치고 짜릿한 감각이 혀 아래에서 마구잡이로 튀었다. 시큼한 사탕을 혓바닥으로 굴렸을 때처럼 표정근이 아무렇게나 꿈틀거렸다. 영혼은 이미 사거리를 벗어나 푹신한 침대에 드러눕겠다 고래고래 외쳤다. 그러나 둔한 몸뚱이는 아직 이곳에 붙박여 있었다.
서준은 영혼과 몸의 합치를 이루기 위해 마지막 힘을 짜냈다. 범인을 지목하듯 누가 악마인지 가려내기 위해 팔을 뻗었다. 블루종 재킷의 소매에서 토옥, 하고는 무언가 떨어졌다. 저절로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가벼운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구르는 것은 콩이었다.
‘아니, 이거 콩이 아니라 땅콩이잖아.’
장갑을 낀 손으로 주워 든 땅콩은 악마의 사거리와 전혀 어울리는 물건이 아니었다. 엉뚱하고 황당한 등장에 새까만 머리통이 모로 기울어졌다. 대체 어쩌다 땅콩이 그의 소매에 들어갔다가 튀어나왔을까.
그때 서준의 머릿속에 보안관의 터질 듯이 부푼 배와 새하얀 콧수염이 되살아났다. 아무래도 보안관은 침만 튀긴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동시다발적으로 그의 일장 연설이 귓가에 재생됐다. 긴 손가락이 땅콩을 뿌드득 짓눌렀다. 땅콩은 땅콩이지, 콩이 아니야….
땅콩, 땅콩, 땅콩!
너절하게 드러누워 약한 척 비명 지르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부옇게 흐렸던 눈앞이 맑게 개는 기분이었다.
‘살아남으려면 바닥을 기어도 모자랄 판에, 이딴 안일한 마음가짐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나 미쳤냐?’
멍청하게 발발거리던 제 행태가 믿을 수 없이 한심했다. 서준은 땅콩을 꽉 쥔 주먹을 들었다. 뼈 두드리는 소리가 묵직하게 뺨을 때렸다. 입 안쪽의 살이 찢어졌는지 비릿한 내음이 구강을 가득 채웠다. 주먹질한 볼은 얼얼하고 욱신거렸다. 둔한 통증 아래로 아릿한 열기가 올라왔다.
“뭐, 뭐 하는 짓이에요? 이상한 사람이네.”
“사거리에서 못 나갈 것 같아 정신을 놓아 버린 거예요?”
갑작스러운 자해에 두 도우드도 놀랐는지 다툼을 멈췄다. 그들은 싸우던 것도 잊었는지 서로 수군거렸다. 서준은 똑같은 얼굴과, 한쪽 발을 내디뎌 조금도 다르지 않은 자세를 하나뿐인 눈에 속속들이 담았다. 무엇 하나 빠뜨리지 않기 위해 부릅뜬 안구에 실핏줄이 섰다. 부담스러운 시선에 초록 눈의 도우드와 붉은 눈의 도우드가 못마땅한 기색을 흘렸다.
“왜 그렇게 봐요?”
“맞아요. 눈 좀 깜빡거려요.”
그리고 서준은 그들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훌쩍 가까워지자 두 도우드의 파리한 얼굴이 더욱 분명해졌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곧장 입을 열었다.
“도우드, 그리고 도우드. 난 맨손으로 만진 사물의 과거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졌어. 나는 그 능력을 이용해서 너희와 접촉할 생각이야.”
“네? 무슨 헛….”
한 명의 도우드가 콧잔등을 찌푸렸다. 그러나 서준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가 강한 어조로 밀어붙였다.
“네가, 그리고 네가 진짜 도우드라면 내 접촉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지. 안 그래?”
등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새까만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고 핏물이 스며든 입술이 비틀리자 섬세한 얼굴에 스산한 미소가 번졌다. 도발을 숨기지도 않으며 서준은 요요하게 웃었다. 섬뜩한 미모는 비인간적인 감수성을 건드리기 충분했다.
초록색 눈동자와 붉은색 눈동자가 서로를 슬쩍 엿보더니 동시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아요.”
멋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장갑을 벗자 마디가 강조된 길쭉한 손가락이 창백하게 빛났다. 그 손을 향해 마찬가지로 희게 질린 손등 두 개가 양쪽에서 내밀어졌다. 거울처럼 똑같은 흉터가 자리한 손을 빤히 내려다보던 서준의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우리 차례대로 하자. 제발. 내 뇌를 태워 버릴 작정이야? 잘 들어. 난 몸도 안 좋고 머리도 안 좋아서 하나라도 있을 때 잘해야 해.”
“그럼 대체 당신한테 좋은 점은 뭐죠?”
“음….”
대리석 조각처럼 고개를 살짝 숙이고 고민하던 청년이 초록 눈의 도우드가 내민 손목을 살며시 붙잡았다. 매끄러운 천의 감촉이 손바닥에 닿았다.
“글쎄다. 근성?”
그리고 눈앞이 새까맣게 변했다. 존재하는 건 오로지 무음과 암흑이었다. 서준의 이성이 작게 속삭였다. 이걸 존재한다고 여겨도 되는 걸까? 오히려 아무것도 없다고 봐야 옳지 않나. 무언가가 있다면 새까만 세상이 끝없이 이어질 뿐이었다. 공기조차 희박한 비좁은 공간에 갇힌다면 이토록 끔찍할까. 모를 일이었다.
“헉!”
초록 눈의 도우드를 잡았던 손을 놓으며 폐에 고인 숨을 뱉어 냈다. 불시에 내팽개쳐진 초록 눈의 도우드는 눈을 깜빡거리며 서준에게서 뒷걸음질 쳤다. 그녀로서는 서준이 혼자 난동을 부리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붉은 눈의 도우드가 큼직한 보폭으로 다가와 말했다.
“인제 보니 근성도 그렇게 뛰어나진 않은 것 같은걸요? 이렇게 힘들어할 거면 굳이 나까지 확인할 필요 있겠어요?”
바닥에 주저앉아 기침하던 서준이 뻣뻣한 목을 세웠다. 그는 한층 피폐해진 얼굴로 붉은 눈의 도우드를 올려다보았다.
“당연, 하지.”
억센 손이 붉은 눈의 도우드를 낚아채자 황갈색 머리카락이 가볍게 팔락거렸다. 어깨 위에서 떴다가 다시 내려앉은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이 목을 간지럽혔다. 붉은 눈의 도우드가 입술을 조그맣게 오므리고 어깨를 향해 숨을 불었다. 후우…. 내리뜬 눈꺼풀과 부드러운 콧날, 갸름한 턱선이 돋보였다.
아주 잠깐이었다. 겨우 숨을 한 번 내쉬는 정도의 시간. 서준은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붉은 눈의 도우드를 밀었다.
“우웨에엑!”
호기롭게 잡았던 손을 놓고 제 목구멍을 쑤셔 대던 서준이 토악질에 성공했다. 그는 자신이 본 걸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끔찍하고 찬란하고 아름답고 잔인하고 징그럽고 상냥하고 더럽고 맛있고 향기롭고 추악하고 영광되고 철저하고 허술하고 감미롭다 종내에 뇌를 짜부라트리고 내장이 뒤집힐 듯이 메스껍게 변하는 악마의 기록을.
서준에게는 버거웠다. 다른 건 몰라도 일단 위장은 확실히 감당하지 못했다. 속이 뒤집히고 온몸의 체액을 전부 뽑아내고픈 충동이 그를 괴롭혔다. 무엇이든 가리지 않을 터이니 당장 손에 흉기를 감싸 쥐고 제 눈, 코, 입, 귀, 성기, 항문 등 인체 내부와 통하는 구멍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모조리 자르고 벌리고 싶었다. 넓힌 구멍이 속에 든 걸 전부 쏟아 내도록 몸의 생김새를 개조하겠다는 열망이 피어올랐다.
“흐, 읏….”
하지만 이 불가사의하고 폭력적인 욕망은 금방 가라앉았다. 다행인 일이다. 비록 서준이 손에 쥔 건 땅콩밖에 없었지만 뇌가 망가진 채 계속 있었다면 무슨 일을 저질렀을지 쉬이 상상이 갔다. 그만큼 지독한 선동이었다.
입가를 대강 닦고 까끌까끌한 바닥에서 일어났다. 이제 서준은 두 소녀를 전부 조사했다. 역시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붉은 눈의 도우드는 이제 숨기려는 노력도 귀찮은 듯했다. 그녀는 얼굴을 천천히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입술 모양이 완전한 반달을 이루고 이를 드러냈다. 눈썹은 안쓰러운 미물을 바라보듯 처졌으나 만면 가득한 조소를 지우지 않는 한 소용없었다. 초록 눈의 도우드가 조용히 물었다.
“이제 무엇이 옳은 답인지 아시겠어요?”
“응.”
줄줄이 떨어지는 타액을 소매로 닦은 서준이 긍정의 뜻을 보냈다. 팔과 다리에 추를 매단 듯 무겁고 피로하지만 답하지 않는다면 사거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그는 여전히 깜깜한 하늘과 변함없이 기이한 사거리를 보았다. 마지막은 역시 두 도우드였다. 이번에는 고뇌의 시간이 길지 않았다. 사이코메트리를 이용한 검사는 마지막 확인 절차에 불과했다.
서준은 검지끼리 얽으며 꿈지럭거렸다. 자신은 처음부터 착각한 상태였다. 혓바닥이 제멋대로 움직이기 전에 알아차려서 얼마나 다행인지! 그가 가게에서 들었던 건 어디까지나 악마를 가려내는 방법이었지, 사람을 찾는 단서가 아니었다. 이는 무척 비슷하게 들리지만 실은 터무니없이 다른 내용이었다.
규칙을 지키기 위해서는 규칙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보안관의 말이 옳았다. 피가 묻어 선명한 색의 입술이 열렸다.
“이곳에서…. 이 사거리에서 우리 중 살아 있는 사람은 바로 나야.”
악마가 아닌 쪽이 반드시 사람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낮고 깔깔한 목소리가 사거리의 중심에서 느릿하게 울렸다. 그의 성량은 끝이 없는 사거리 전체에 퍼지지 못했지만 두 도우드가 듣기에는 충분했다. 한 명의 도우드와 한 마리의 악마가 한 사람의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답이에요.”
“흐으어….”
마치 허락이 떨어진 것처럼, 서준은 버티지 못하고 서 있던 자리에 그대로 힘없이 앉았다.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엉덩이를 찧은 아픔보다는 눈꺼풀 안쪽의 욱신거림과 능력을 쓴 대가인지 반동인지 모를 두통이 더욱 괴로웠다.
악마가 붉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다가왔다. 도우드의 얼굴을 한 악마는 즐겁다는 듯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걸쳤다.
“어떻게 알았어요?”
악마의 뒤로 시선을 던지자 진짜 도우드는 제자리에서 얼굴을 굳히고 서 있었다. 망부석처럼 한 자리에 못 박힌 그녀는 어떻게 보아도 악마와 접촉하기를 꺼리는 태도였다. 서준은 도우드가 쥔 사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사진, 죽은 사람을 찍은 사후 사진이지? 마침 얼마 전에 찾아본 적이 있거든. 빅토리아 시대 때 유행했던 포스트 모템을 말이야.”
잠든 듯 두 눈을 감고 있던 이유도 단순했다. 사진에 찍힌 도우드는 시신이었다. 더는 눈을 뜨고 생기 있게 조잘거리지 못하는 소녀. 그녀의 부모가 음울한 표정을 지은 건 당연했다. 도우드가 초록색 눈동자를 눈꺼풀 아래로 숨기며 조용히 대꾸했다.
“폐렴이었어요.”
“그래….”
도우드와 직접 접촉했던 때 끝없는 어둠만이 떠오른 건 그녀가 죽음을 맞이한 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이리라. 서준이 손바닥으로 뜨거운 눈가를 꾹 눌렀다. 악마의 부탁인 ‘이 사거리에서 우리 중 살아 있는 사람을 말해 달라’의 정답은 지극히 간단했다. 악마가 지정한 범위는 사거리였다. 즉 우리의 범주에는 서준도 포함되었던 것이다.
‘보안관의 말대로 처음부터 규칙을 제대로 들었어야 했어.’
너무 늦게 깨달은 바람에 하지 않아도 됐을 심적 고생이 막대했다. 가느다란 목이 힘없이 기울어지며 피로를 호소했다. 그때 진이 다 빠진 서준을 향해 악마가 다가왔다. 허리를 굽힌 악마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도우드인 양 굴던 태도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에 등골이 다 오싹해졌다.
“내 부탁을 잘 들어줬으니까 소원을 들어줄게. 자, 원하는 게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