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5
당연하게도 디코이 모텔은 9층 이상의 건물이기야 하였으나 한 층의 방이 99개까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안내문도 그렇고 아주 제멋대로 구는 모텔이군.’
서준은 허름한 복도의 붉은 카펫을 밟으며 속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승강기 버튼을 누르자 깐깐하기 짝이 없는 안내문은 그의 머릿속에서 깔끔하게 휘발됐다. 지금 서준에게 중요한 건 한 끼 식사였다.
***
“어, 배부르다.”
계산을 하고 나오는 서준의 얼굴에서 반지르르하게 윤기가 돌았다. 늦은 아침 겸 점심 겸 저녁은 의외로 무척 훌륭했다. 이것저것 고민했지만 현실적으로 그의 배를 채울 만한 식당은 모텔 근처의 멕시코 요리를 중점으로 한다는 퓨전 음식점이 전부였다.
본디 꾸준한 수요는 공급자의 나태함을 부르기 마련이라 서준은 미심쩍은 마음을 내려놓지 못한 채 식당에 발을 들였다. 하지만 후각을 자극하는 기름진 냄새와 더불어 짙은 스모크 향, 기름 튀는 소리까지…. 그는 자신이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는 걸 인정했다. 이후로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철판 위에서 지글거리는 폭립은 전체적으로 매콤한 양념을 발라 살코기가 겉은 바삭하고 속은 야들야들하니 뼈에서 쭉 뜯어 먹는 맛이 있었고, 볶음밥은 쌀이 가볍게 흩날렸지만 독특한 향이 났다. 만약 장갑을 끼지 않았더라면 손가락을 빨아 가며 게걸스럽게 먹었으리라.
유타피아의 세트 메뉴도 썩 좋아 나무랄 데 없었지만 그때는 보안관의 설교를 듣느라 돌을 씹어도 모를 지경이었다. 서준은 기름기 묻은 입술을 훔치며 후식으로 주문한 아이스크림까지 깔끔하게 먹어 치웠다. 물론 아이스크림도 느끼하지 않고 뒷맛이 개운했다.
서준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식당을 빠져나왔다. 식당 내부의 공기가 후끈했기 때문인지 차가운 바람조차 기꺼웠다. 그는 뜨뜻미지근한 눈빛으로 식당을 돌아보았다. 감히 디코이 모텔과 비슷한 수준이라 여긴 제가 어리석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등받이가 빨간 가죽 의자조차 가게 주인의 심리적 노림수였던 게 분명했다. 서준은 부른 배를 두드리며 무익한 상념에 빠져들었다.
‘한 끼 더 먹고 싶은데….’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차양 아래에 잠시 멈춰 도로를 달리던 차를 응시하던 검은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어차피 지금 출발하긴 늦었으니 하루 더 머물면 되는 일이었다! 서준의 입꼬리가 꿈틀 올라갔다. 그는 제 선택을 흡족히 여기며 내일을 향한 기대로 가슴을 부풀렸다.
이렇게 기분이 좋은 날이 요 근래 있었던가. 고작해야 안락한 잠자리, 맛있는 식사에 불과하건만 이토록 마음이 들뜬다는 사실이 새로웠다. 서준은 방긋방긋 웃었다. 집 떠나면 고생 운운했던 과거는 산뜻하게 지워 버렸다. 몸이 편하다는 건 늘 그렇지만 사람을 게으르게 만드는 법이다.
팔랑팔랑한 걸음으로 모텔에 들어간 서준은 한결 자비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편의점이며 비디오 대여점 따위가 눈에 들어왔다. 어제는 그야말로 돌진하는 소처럼 달려와 주변을 둘러볼 틈도 없었다.
손이 슬금슬금 주머니의 지갑을 확인했다. 곰 인형이 달린 지갑은 얌전히 제자리를 지키는 중이었다. 서준은 혀를 내밀어 얇은 입술을 쓸었다. 어차피 오늘은 온종일 늦장을 부릴 예정이라 오락거리가 필요하던 참이었다. 그는 가볍고 상쾌한 손길로 편의점의 문을 열었다.
어디의 주유소에 딸린 편의점과는 달리 느슨하면서도 평범한 분위기가 흘렀다. 서준 외에도 두어 사람이 매대 앞을 어슬렁거렸고 직원은 심드렁하니 벽시계만 올려다보았다. 잠시나마 같은 직종에 종사했던 노동자로서 서준은 그를 이해했다. 그도 한결같이 시계만 바라보던 때가 있었다….
‘뭐, 그거야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고.’
이제 자신은 노동자가 아니었다. 자유민은 우쭐거리며 오늘 밤 제 배를 채울 주전부리를 엄선했다. 오랜 고민 끝에 맥주 서너 캔과 짭짤하고 바삭한 감자칩 과자와 말린 오징어, 땅콩과 호두 등 볶은 견과류가 담긴 봉지를 집어 들었다.
드릴 같은 양 갈래 머리를 한 여자의 뒤에 줄을 섰다. 초콜릿 한 통을 소중하게 품은 여자가 떠난 뒤, 그도 계산한 먹거리를 검은 봉지 속에 넣었다. 그러고는 방앗간을 무시하지 못한 참새처럼 비디오 대여점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행태가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마치 만유인력의 예시로 교과서에 실어도 될 지경이었다.
서준은 익숙한 분위기의 대여점을 낯설게 바라보았다. 이게 몇 년 만이던가? 제가 공포 영화 속에서 환생했다는 기가 막힌 망상에 빠져 살 때는 도무지 두려워 찾아올 수 없었다. 게다가 요즘 세상은 얼마나 편리해졌던가! 비디오 플레이어는 중고 매장에서나 볼 법한 물건이었다. 대세는 양장본처럼 두꺼운 비디오가 아닌 얇은 DVD가 차지한 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는 이곳이 좋았다. 오래된 플라스틱과 먼지 냄새가 나고, 손때가 묻은 비디오테이프 갑은 색이 바랬다. 테이프에 붙인 라벨 종이는 색이 누렇게 변했다. 인터넷에 검색해도 제목 한 줄 나오지 않는 영화가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폐를 채우는 건 친숙하면서도 어색한 공기였다. 얼굴 근육이 이완하며 자연스러운 웃음이 걸렸다.
기실 그가 발바닥이 닳도록 다녔던 곳은 한국이었으나 대여점 특유의 비슷비슷한 생김새가 영혼을 자극했다. 서준은 악어의 이빨을 뒤적이는 악어새처럼 골고루 돌아다녔다. 그럭저럭 사람이 어정거리던 편의점과는 달리 대여점은 무척이나 한산했다. 덕분에 긴 팔과 다리를 휘적거리며 마음껏 나다녀도 부딪힐 일이 없었다. 서준의 팔뚝에 매달린 새빨간 플라스틱 장바구니가 달랑거렸다.
“흐음.”
인상을 찌푸리고, 침음을 흘리고, 턱을 쓰다듬고…. 표정만 보면 국제 콩쿠르의 심사 위원이 따로 없었다. 기나긴 고민 끝에 선정한 작품은 총 다섯 점이었다.
〈식인귀VS불가사리: 등골 터지는 새우〉
〈spooky stories〉
〈물려받은 애니메트로닉스는 살인광〉
〈벗어날 수 없어! 반복되는 일주일의 누디스트 비치〉
〈식인귀VS불가사리2: 금발은 패륜아〉
촌스럽고 자극적인 타이틀이 냉혹한 심장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서준은 홀린 듯이 비디오테이프를 덥석덥석 주워 담았다. 화끈한 밤을 책임질 친구들이 빨간 플라스틱 장바구니 안쪽으로 차곡차곡 쌓였다.
흡족한 표정으로 계산대로 걸어가자 인기척을 느낀 점원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입가의 침을 팔뚝으로 슥 닦았다. 점원은 졸던 꼴을 들킨 게 민망한지 뻐드렁니를 드러내며 겸연쩍게 웃었다. 유독 맑은 것이, 듣는 사람까지 기분 좋게 만드는 명랑한 목소리였다. 높이 쌓인 비디오 사이로 점원이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공포 영화를 좋아하시나 봐요.”
“그런 편이죠.”
그가 장바구니를 받아 들어 안쪽에 있던 테이프를 꺼내 바코드를 찍었다.
“모텔 이용객이시죠? 머무시는 객실을 알려 주세요. 그러면 구태여 반납하러 오시지 않아도 저희가 수거하는 서비스를 이용하실 수 있으세요. 무료로요.”
“999호요.”
손이 몹시 바지런한 청년이었다. 점원은 발간 뺨을 씰룩이고는 서준이 고른 테이프에 대해 이것저것 추임새를 넣었다.
“물려받은 애니메트로닉스는 살인광, 이거 아주 물건이죠. 잔인하지만 그만큼 영상미가 뛰어나요. 특히 힌두교의 칼리 신처럼 사람 머리를 든 장면이 충격적이죠. 아, 누디스트 비치도 인기 많아요. 아무래도 제목 때문인지 착각하는 손님이 있거든요.”
“착각이요?”
“타이틀이 이렇다 보니까요. 야한 내용이 많이 나올 줄 아나 봐요. 사실 정말 수위가 높은 건 애니메트로닉스인데.”
“흠.”
별 어려움 없이 대꾸를 하는데 대여점 점원의 시선이 슬쩍 아래로 향했다. 서준의 양손에는 늘 그렇듯 파란 장갑이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라텍스 장갑을 낀 초췌한 인상의 남자…. 점원은 입을 꾹 다물고 얌전히 제 일을 했다. 서준도 우울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이런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그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물어보지도 않은 사람에게 사실 전 결벽증이 있답니다, 하고 응답하는 것도 이상했다.
“대여 기간은 하루입니다. 직접 반납하실 거면 내일 자정까지만 반납하시면 돼요. 번거로우시면 그냥 비디오 플레이어에서만 빼서 올려 두시면 되고요. 아, 그리고 비디오가 파손되지 않도록 주의해 주세요. 두 번 다시 안 올 생각인지 종종 망가뜨리는 손님이 있거든요.”
다행히 점원은 본연의 유쾌하고 활발한 태도를 되찾았다. 그는 히히 웃으며 검은 비닐 봉투에 비디오테이프를 담아 주었다. 서준은 봉투를 받으며 자신의 가슴팍에나 겨우 머리 꼭대기가 닿을 점원을 내려다보았다.
“대여 기간이 짧네요?”
“대신 가격이 다른 곳보다 훨씬 싸잖아요. 여기 주인이 모텔하고 같아요. 거의 취미로 운영하시는 셈이죠.”
점원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서준은 한동안 비디오 대여점을 다니지 않아 평균 가격을 알 길이 없었으나 절대적으로 싼 값이라는 건 부정하지 못했다. 점원이 덧붙였다.
“게다가 여기 손님이라고 해 봤자 어차피 모텔 숙박객 대상이고요.”
서준은 그의 대답에 쉽게 납득했다. 하기야 이토록 외진 모텔에서 사람들이 오래도록 머무는 일은 드물 것이다. 대부분 서준처럼 지나가는 길에 피로를 풀기 위해 눈이나 붙이려 오는 것이다. 거개 하루, 길어야 이틀이 고작일 터였다.
꺽다리는 그렇게 승전보를 올린 장수와도 같은 마음으로 위풍당당하게 제 객실로 돌아갔다. 승강기에 오르고 복도를 걷는 동안 품에 껴안은 검은 비닐봉지가 더없이 든든했다.
주전부리가 든 봉투를 침대 위로 던지고 날래게 비디오 플레이어 앞에 주저앉았다. 오랜만에 취미를 즐길 생각에 숨이 헐떡거리고 손이 발발 떨렸다. 그는 대여점 직원이 강력히 추천한 ‘물려받은 애니메트로닉스는 살인광’부터 볼 작정이었다. 어디까지나 높은 영상미 때문이지, 결코 높은 수위 탓이 아니었다. 서준이 자기 합리화를 하며 봉투를 탈탈 털자 덜그럭거리며 비디오가 떨어졌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뭐야.”
하나밖에 없는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서준이 빌린 비디오테이프는 전부 다섯 개였는데 왜 하나가 더 늘어났단 말인가? 직접 빌렸던 걸 하나씩 골라내자 처음 보는 비디오테이프가 덩그러니 남았다.
비디오테이프에 붙은 누런 라벨에는 ‘실제상황’이라는 단출한 제목이 전부였다. 심지어 출력해 붙인 라벨이 아니라 손글씨였다.
‘실수로 들어갔나?’
서준은 대여점의 정경을 떠올렸다. 하기야 계산대가 복잡스러웠으니 무심코 하나 더 집어넣었을지도 모른다.
‘제목이 실제상황인 걸 보아하니 절대 실제 상황은 아니겠군.’
머릿속으로 파운드 푸티지 형식의 영화가 몇 개 스쳐 지나갔다. 파운드 푸티지는 페이크 다큐멘터리의 일종으로, 성공만 한다면 적은 제작비로 큰 수익을 거둬들이는 게 가능한 장르였다. 덕분에 아마추어적인 작품도 숱하게 쏟아졌는데, 이는 서준의 취향과도 꼭 부합했다.
그는 한쪽으로 밀어 놓은 ‘물려받은 애니메트로닉스는 살인광’과 ‘실제상황’을 번갈아 보았다. 계획대로라면 점원이 저지른 실수는 무시해야 옳았다. 그러나 서준의 손은 ‘실제상황’을 비디오 플레이어에 집어넣었다.
찬 바람이 드는 창문을 닫은 후 후다닥 침대 위로 올라가 바지런히 향락을 준비했다. 운동화를 던지듯이 벗은 서준은 우선 과자며 견과류 봉지를 죄 뜯었다. 다음으로는 아직 서늘한 기가 남은 맥주캔을 연인처럼 베개맡에 일렬로 세우고, 고심 끝에 딸기 맛 맥주를 골랐다.
왼손으로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표면을 잡고 뚜껑을 오른손 엄지로 밀어 올리자 캉, 경쾌한 소리와 거품이 솟아올랐다. 혀를 내밀어 흰 포말을 날름 핥았다. 입술에 묻은 거품이 빠르게 녹아내렸다. 아예 냉장고에 넣지도 않고 침대에서 끝장을 보겠다는 의지의 발로였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