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
평소 나태하게 굴던 두뇌가 가열하게 돌아갔다. 채널 DULC233E이 틀어졌다는 건 다시 말해 몇 분 후 침대 밑에서 정체불명의 그것이 온다는 뜻과 상통했다. 이마에 땀이 찔끔 흘렀다.
서준은 아둔하게 굴던 조세프를 비웃은 것을 사과했다. 왜인지 아등바등하던 조세프의 마지막 모습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밝게 웃으며 몰래카메라를 준비했다는 조세프, 물 한번 잘못 끓였다가 도미노처럼 인생이 무너지기 시작한 조세프, 항의 전화 했더니 귀신이 찾아온 조세프, 화장실에서 못 볼 꼴 실컷 본 조세프, TV 전깃줄 한번 뽑았다가 손이 익어 버린 조세프, 카메라를 부수려다 실패한 조세프, 침대 밑으로 끌려 들어가 최후를 맞이한 조세프…….
생각은 계속 이어져 조세프의 몸에서 나왔을 피 웅덩이까지 떠올랐다. 카펫을 적시던 핏물을 기억하자 서준은 어디서 그런 기력이 샘솟았는지, 메뚜기처럼 풀쩍 뛰어올랐다. 갑자기 힘을 준 탓에 허벅지가 얼얼했지만 무시하고 달렸다. 이제 탈출구는 창문밖에 없었다.
침대를 밟고 지나가자 창문까지 가는 건 무척이나 가까웠다. 그리고 창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유리창에 반짝 반사되는 것이 있었다. 코팅된 안내문이었다. 잠시 안내문에 시선을 빼앗긴 서준은 창문에 머리를 대차게 박았다. 눈앞이 새까맣게 암전되고 둔한 충격이 찾아왔다. 이어서 얼얼한 통증이 퍼졌다. 비명이 나온 건 가장 마지막이었다.
“악!”
악을 지르듯 내뱉은 고함은 비단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눈을 질끈 감았던 서준이 형형한 눈빛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왜 이걸 지금 눈치챘지?’
활짝 열린 창문을 뒤로한 채 TV 앞으로 되돌아오자 화면에는 여전히 그의 모습이 비쳤다. TV에 나오는 자신이 전혀 자랑스럽지도 않고 두려울 뿐이지만 서준은 최대한 눈을 내리깔고 비디오 플레이어 앞으로 다가갔다.
‘원인이라면 이것 말고는 없지.’
조세프가 마지막에 뭐라고 말했던가. 이게 문제였어. 이걸 부숴야 해. 이걸…. 이것은 당연히 그가 찍던 카메라였다. 정확하게는 녹화하던 비디오테이프였다. 서준은 안내문의 마지막 사항을 중얼거렸다.
“비디오 재생 장치에 문제가 생긴 경우, 원인을 제거하시오.”
튼 적도 없는 채널이 연결되었다. 이것이 비디오 재생 장치의 문제가 아니라면 무엇이 문제일까. 어둠 속에서 한 줄기 광명이 비쳤다. 서준은 진동하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고정해 비디오 플레이어에서 테이프를 꺼내려 했다.
그리고 시도는 불발되었다. 테이프가 나오던 도중 덜걱거리며 걸려 버렸다. 으레 오래된 기계는 종종 말썽을 부리기 마련이다. 디코이 모텔의 비디오 플레이어께서도 연식이 제법 되시는 몸이었다. 어르신께서는 자신을 어화둥둥 곱게 대하지 않는 서준에게 불만을 품으신 듯했다. 서준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울부짖었다.
“왜, 왜 하필 지금 이래? 어! 나와, 새끼야! 나오라고!”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와 물비린내가 열린 창문으로 들어왔다. 코끝을 스치는 냄새에 눈물이 찔끔 났다. 처음 디코이 모텔에 왔을 때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오랜만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늘어지게 잠을 자고 담배를 피웠다. 느긋한 시간을 즐기며 희희낙락했다. 기쁨은 너무나 짧았다…….
그리고 마침표를 찍듯이 침대가 덜컹 흔들렸다. 이제 핏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얼굴에서 비참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서준은 목이 졸린 거위처럼 끅끅거리며 비디오 플레이어를 쿵쿵 때렸다. 그는 기계가 말을 듣지 않을 때는 때리라는 말을 신봉하는 인간처럼 굴었다.
“빨리, 빨리!”
만병통치약이란 이런 것일까? 놀랍게도 비디오 플레이어가 테이프를 툭 뱉어 냈다. 얼굴에 환희가 꽃처럼 피어났다. 다급한 손길로 비디오테이프를 꺼내는 순간, 발목을 붙드는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이후 벌어질 일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억지로 질질 끌려간 몸뚱이는 침대 밑에서 얄팍하게 구겨지리라.
그런 꼴이 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서준은 이를 악물고 비디오를 잡은 손을 높이 올렸다. 이런 가벼운 비디오쯤이야 바닥에 내리치자마자 박살 날 것이다. 규칙만 지킨다면 살 수 있을 터였다. 발목을 쥔 힘이 한결 강해졌다. 아차 하는 사이 억지로 잡아당겨지리란 사실이 눈앞에서 번뜩거렸다.
당하기 전에 해치워야 했다. 제 손에 잡힌 불길한 흉물을 세상에서 없애야 그가 살았다. 서준은 강하게 잡은 테이프를 아래로 힘껏 쳤다. 그러나 비디오테이프가 바닥에 박살이 나기 직전 머릿속에서 명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비디오가 파손되지 않도록 주의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