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포영화 속 선지자로 환생했다 (120)화 (120/156)

#119

유독 깨끗한 CCTV의 렌즈와 새까만 눈동자가 마주쳤다. 저것이 태풍 이후에 달렸다면 또 새로운 의문이 생긴다. 왜 피험자들은 당장 탈출하지 않았을까? 얇은 눈꺼풀이 살짝 내려갔다. 그는 바닥에서 굴러다니는 못을 운동화 앞코로 굴리며 찬찬히 따져 보았다. 곧 그럴듯한 가설이 하나 생겼다.

당연하지만 연구원은 한 명이 아니었다. 반면 투명 인간의 저택의 첫 번째 실험체는 S 혼자였다. 연구원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그는 그리 건장하다고 보기 어려운 체구였다. 다수의 연구원을 상대로 빠져나가기란 힘들었을 것이다. 능력도 탈출에 그리 도움이 되는 종류가 아니었다.

다음으로 들어온 실험체는 L이었다. 그의 경우도 첫 번째와 비슷했다. L은 온순한 성격으로 제 능력조차 버거워했다. 그를 통제하는 건 무척이나 쉬운 일이었으리라.

그나마 다음으로 연구소에 들어온 T는 능력을 공격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투명 인간의 저택에 들어올 당시부터 자해할 정도로 정신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상태였다. 거기에 더해 강도 높은 실험을 당하기까지 해 한동안 큰 실의에 빠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D의 경우는 더욱 암담하다. 자유자재로 투명 인간이 될 수만 있다면 확실히 위험천만한 능력이지만 그녀는 그럴 실력자가 못 되었다.

아무튼 이것저것 이유를 달아 보면 이들은 고작 4명에 불과했고, 공격적인 능력은 한 명밖에 없었으며, 그조차 다수를 한꺼번에 쓰러뜨릴 실력이 아니라는 암울한 현실만이 남았다.

‘뭐,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었겠지. 체념했다든가, 협박당했다든가.’

마법사의 말이 맞았다. 협박이란 반드시 칼을 들지 않아도 가능하다. 그리고 협박이란 한 사람의 전유물이 아닌 바, 약간의 노력만 있다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점이 매력 아니겠는가? 이러한 협박의 본질을 S는 알고 있었다. 교환 일기 속에 은근히 숨어 있던 구절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참담하고 엽기적이고 끔찍한 비밀을 가지고 있던 먼시 양.

사람의 마음을 읽는 L이 확고하게 단언했다. 그녀는 비밀을 숨기기 위해서라면 살인을 불사하거나, 혹은 전 재산마저 내놓을 것이라고. 그녀의 비밀이 염사된 사진은 협박의 도구로는 너무나 완벽했다.

그들은 정말로 외부에서 협력자를 찾은 셈이다. 누구에게도 밝혀져서는 안 되는 비밀은 S의 능력으로 인해 물질화됐다. 서준은 저도 모르게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제자리에서 미친 듯이 맴돌던 그의 눈에 검은 핏자국이 들어왔다.

“혈액 팩.”

젖은 입술이 달싹거렸다. 서준의 시선은 창고가 아닌 먼 곳을 더듬었다. 끝이 반들반들하게 바랜 무지 노트에는 거짓과 진실이 두서없이 섞여 있었다. 그중 어떠한 진실의 조각은 전혀 딴소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가짜 피를 쓰지 않아도 괜찮았던 거야. 각자 자기 피를 수혈해서 저장한다고 했으니까.”

L이 발견했던 혈액 팩이라면 이런 줏대 없는 흔적을 만들기 모자람이 없었다.

“그래, 일기장에. 먼시 양이 식량과 함께 트럭을 끌고 오는 날은 번잡스럽다고 했어.”

새로 온다는 조수도 사실 거짓말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창고에 숨겨 둔 D를 먼시 양이 혼잡스러운 때에 데려 나간다. 그동안 연구원의 눈은 T가 잡아 놓는다. 그녀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염동력을 사용하는 초능력자는 텅 빈 구두쯤이야 손쉽게 움직였을 터이니. 어쩌면 사람의 마음을 읽는 L이 보조하지 않았을까? 그의 독심술이라면 상황을 유동적으로 헤쳐 나가기 충분했다. 먼시 양의 적극적인 협조는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S는 모든 것을 진두지휘했을 것이다.

서준은 인제야 S라는 사람을 조금이나마 엿본 기분이었다. 연구소를 향한 그의 적의와 고집은 대단했다. 도미노가 연달아 쓰러지듯 일기장에 갑작스레 등장한 D를 향한 질투도 이제야 이해가 갔다. S는 마법사의 주장대로 정녕 일기를 타인에게 읽힐 걸 전제로 써 나갔다.

“읽히기를 바라고, 본심을 숨기고.”

서준은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손바닥의 아픔은 까맣게 잊혔다. 귀 끝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 마대 자루에 갇힌 열기가 빠져나가지 못하고 정수리까지 고였다.

- 오스? 왜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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