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포영화 속 선지자로 환생했다 (131)화 (131/156)

#130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몽롱하게 잠긴 정신을 건드렸다. 윙윙거리는 진동이 바닥에서부터 올라왔다. 문득 한기가 느껴졌다.

“안 돼! 안 돼, 오, 제발! 눈 떠, 눈을 뜨라고!”

비통하고 한이 서린 비명이 귀를 건드렸다. 서준은 울음소리를 들으며 가물가물한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에 흰빛이 번졌다. 그는 그제야 제가 고개를 불편하게 꺾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욱신거리는 목을 뻣뻣하게 세우자 옆에서 꺽꺽거리며 우는 소리가 요란했다.

하지만 누가 우는지 확인하자니 자신의 상태도 그리 좋지 않았다. 머리는 깨질 듯이 지끈거리고 속이 매스꺼웠다. 엉덩이며 등허리가 시려 자연히 어깨가 좁아졌다. 서준은 다시금 온 힘을 다해 눈꺼풀을 위로 올렸다. 그러자 아까까지는 까마득하게만 보였던 새하얀 빛이 번뜩거려 안구가 따가웠다.

“으…….”

신음을 흘리며 몸을 비틀자 눈가가 달아오르듯 뜨거웠다. 도통 앞뒤를 생각하거나 사리를 분별할 여유가 없이 눈물만이 찔끔찔끔 새어 나왔다. 그러나 하늘이 도우려는 심산이었을까? 그는 스스로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바닥을 타고 흐르는 선명한 붉은색 액체를 보자마자 얼음물을 끼얹은 듯 머릿속이 한순간에 맑아졌다.

“안 돼, 휴!”

쉰 목소리가 휴의 이름을 불렀다. 뻣뻣한 목을 오른쪽으로 돌리자 희게 질린 올리버의 얼굴이 있었다. 그는 눈물과 콧물을 쏟으며, 심지어는 침까지 튀기며 부르짖었다. 올리버의 시선 끝에는 휴가 엎어져 있었다.

잘생겼던 미남은 안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몸을 웅크리고 침음을 삼켰다. 끄으윽, 끄윽……. 억누른 잇새 사이로 숨기지 못한 괴로움이 비집고 나왔다. 번들거리던 정장은 심하게 구겨졌고 땀으로 흥건한 이마에는 젖은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들러붙었다. 멋들어지게 꾸몄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애벌레처럼 바르작거리며 바닥을 굴렀다.

그러나 올리버의 애탄은 고작 휴의 맵시가 사라져 그런 것이 아니었다. 서준조차 휴의 참혹한 몰골에 입이 다물리지 않았다.

“아으윽…….”

휴의 오른쪽 팔꿈치 아랫부분이 말끔히 도려내져 있었다. 타인에게 보여서는 안 될 벌건 근육과 지방, 그리고 망가진 뼈가 새하얀 등불 아래에서 피를 울컥 뿜어냈다. 짓뭉갠 살점과 끊어진 혈관 따위가 비참하게 늘어졌다.

검은 눈동자는 마치 못 박힌 듯 저 잔인한 풍경에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정수리에 열이 고이듯 머리가 뜨거워지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잔인하게 해체된 신체 부위가 흐리멍덩하던 의식을 건드렸다. 기억은 둑에 막혀 있던 물처럼 들이쳤다.

위화감이 느껴지던 대화, 창업 이후 바뀌지 않은 재료와 레시피, 핫케이크와 라즈베리 시럽, 커피, 분란하던 박수 소리, 찰스의 여왕, 앨리스의 간판 메뉴, 신선한 것만 쫓는 프레시한 여자, 같은 말을 반복하는 웬드릭, 제빵 장갑을 벗은 찰스, 손톱, 손톱, 그리고 손톱!

“아아!”

그렇다. 쓰러지기 전 마지막으로 눈에 비쳤던 것은 손톱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찰스의 손이었다. 엎어졌던 뺨에는 아직도 끈적거리는 시럽의 감촉이 남아 있었다.

서준은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았고, 곧 알아차렸다. 이곳은 조리실이었다. 새하얀 벽과 스테인리스 특유의 빛이 감도는 주방 기구, 조리대와 큼직한 냉장고, 환한 전등. 그리고 그의 곁에는 레스토랑에 손님으로 들어왔던 이들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차가운 빗소리가 울렸다. 땅을 때리는 빗물의 소음과 거센 바람 소리……. 정신을 차린 사람은 올리버와 서준밖에 없었다. 더욱 세밀하게 따지자면 서준뿐이었다. 올리버는 쓰러진 휴를 향해 목이 터져라 울부짖는 중이었고, 이는 도저히 제정신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서준은 가능하면 그가 조용히 해 주길 원했지만 만든 연인이건, 진짜 연인이건 사랑하는 사람이 팔까지 잘린 판국에 너무 많은 걸 요구하기도 어려웠다. 결국 할 수 있는 건 제 발목과 손목을 묶은 가증스러운 끈을 풀려고 애쓰는 것이 전부였다. 어디로 갔는지 웬드릭과 찰스는 보이지 않았다. 가능하면 그들이 돌아오기 전에 결박을 풀어야 했다.

‘뭐로 묶은 거야? 케이블 타이로 만든 수갑인가?’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영화에서야 불이나 날붙이, 혹은 대단한 괴력으로 금방 자유로워졌으나 서준에게는 불도, 날붙이도, 심지어 대단한 괴력도 없었다. 더군다나 사람이 한두 명도 아닌데 죄 꼼꼼히 구속한 부분에서 기분 나쁜 집념이 느껴졌다. 팔뚝에 소름이 다 일 정도였다.

그때 조리실 바깥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속으로 비명을 삼키며 옆을 보자 흰 조리복이 언뜻 보였다. 웬드릭을 부축하며 걸어오는 찰스였다. 그의 새하얀 조리사 복에는 새빨갛게 물든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옆구리에는 사람의 잘린 팔과 날이 큼직한 칼이 조심성 없이 함께 끼어 있었다. 누구의 손인지야 물어볼 것도 없었다. 지금 이 와중에도 지혈하지 않은 덕에 휴는 끝없이 피를 흘리는 중이었다. 찰스가 귀찮다는 손짓으로 그것들을 조리대 위에 올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사람 팔이 이렇게 쉽게 잘린 적은 처음인데! 웬드릭, 나의 여왕. 조금만 기다려 주오.”

서준은 얼른 눈을 감고 기절한 척했다. 그다지 쓸모없는 행동이었다. 망가진 테이프처럼 재생하는 올리버의 비명에 알리스와 리이미아, 캠리가 눈을 뜨고야 만 것이다. 캐롯만이 약발이 잘 받는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리이미아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듯 멍청하게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이게, 무슨 일이야? 깜짝카메라? 지금 이거 깜짝카메라야?”

“아, 정신이 들었군!”

찰스가 매우 반가워했다. 그의 엉뚱한 태도에 리이미아가 피를 줄줄 흘리는 휴와 울부짖는 올리버, 여전히 기절한 캐롯, 뒤늦게 눈을 뜨는 척하는 서준, 마찬가지로 영문을 모르는 표정의 캠리, 그리고 창백해진 낯의 알리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아는 체하는 찰스 대신 캠리에게 질문했다.

“캠리, 우리 이런 거 섭외 온 적 있었어? 난 없는데.”

“나도 없는데……. 이런 기획 할 만한 사람은, 음. 아니다. 역시 없어.”

“아가씨들, 이건 깜짝카메라가 아니야.”

찰스가 짐짓 진중한 어투로 끼어들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는 즐거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오로지 알리스만이 사태의 심각함을 가장 빠르게 알아차렸다. 그녀로서는 불행한 일이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찰스?”

“뭐하기는, 아. 그렇지. 모를 수 있어.”

찰스는 알리스에게 능글맞게 대꾸하며 냉장고의 문을 열었다. 덕분에 냉장고에 몸을 기대고 있던 서준은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엉덩이를 옆으로 밀었다. 끔찍하게도 찰스는 서준을 향해 빙긋이 웃었다. 그는 냉장고 속에서 비닐에 싼 고깃덩이와 종이를 한 장 꺼냈다.

“내 경험상 이 둘은 차가울 때가 제일 좋았지.”

묻지도 않은 팁을 알려 주는 것은 덤이었다. 그러고는 조리대의 도마 옆에 그것들을 두었다. 조리대 위에는 이미 다른 재료가 준비되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소금 한 꼬집과 올리브오일 세 스푼, 따뜻하게 김이 오르는 물, 마지막으로 흰 파우더가 담긴 통. 세상이 끝날 때까지 울 것 같던 올리버의 울음이 뚝 그쳤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새하얀 파우더를 응시했다.

“알리스 양, 나의 붉은 여왕이 계속해서 숨을 쉬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조력이 아주 약간 필요하다네. 말 그대로 서로를 돕고 살아가는 세상인 거지!”

“남편이 하는 말은 흘려들어요. 늘 저런다니까!”

웬드릭이 의미 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그녀의 표정과 목소리의 높이는 처음과 별다르지도 않아 오히려 더욱 스산했다. 꽁꽁 묶인 사람들의 안색이 파랗게 질린 건 당연한 순서였다. 오로지 찰스만이 기뻐했다.

“오오, 역시 당신만은 날 이해해 주리란 걸 알았어!”

손톱 없는 손이 짝 손뼉을 쳤다. 이 식당에서는 이미 박수 소리가 들린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와 비교하면 찰스의 갈채는 섬뜩한 면모가 엿보였다. 그는 양손을 늘어뜨리고는 알리스에게 설명했다.

“나도 내 힘만으로 웬드릭을 유지하려고 노력해 봤어. 하지만 잘 안됐지……. 뭐, 세상일이란 게 그런 법이지 않겠나. 확실한 건 나의 여왕이 살아가려면 사람의 부속품이 필요하다는 거야. 처음에는 내 손톱을 사용했고, 그다음으로는 발톱까지 몽땅 사용했지. 하지만 손톱이 자라나는 속도는 너무 느려. 난 이제 단 한 순간도 웬드릭이 없으면 살아가지 못하는데도!”

아무리 속사정을 풀어 말해도 찰스의 해명을 알아들은 건 오직 서준과 올리버뿐이었다. 그러나 알리스와 캠리, 리이미아도 충분히 이해한 사실이 있었으니 바로 찰스가 미치광이라는 점이었다. 고장 난 인형처럼 똑같은 말을 연거푸 내뱉는 웬드릭과 쓰러진 휴를 곁눈질하며 알리스가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녀는 가능한한 정신 이상자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찰스, 찰스……. 웬드릭이 어떤 병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병원에 가는 게 어때요? 부디 민간요법을 맹신하지 말고요. 이건 무척 어리석은 짓이에요. 이런 건 당신 아내한테도 좋은 일이 아니라고요. 휴도요. 얼른 병원에 데려가야죠.”

알리스가 차분하게 설득을 시작했고, 동시에 리이미아가 외쳤다.

“잠깐, 그럼, 역시 여기가 개업한 지 20년이 지났다는 건 거짓말이지! 라즈베리 시럽처럼 새빨간 거짓말! 필리 에프가 찾은 시럽은 그렇게 옛날 제품이 아니었는걸!”

“리이미아!”

캠리가 리이미아를 말렸다. 그녀가 보기에는 친구가 잘 진행되던 회유를 망친 것으로 보였으리라. 다행인지 불행인지, 찰스는 애당초 설득당할 마음이 한 점도 없었다. 그는 여유롭게 수긍했다.

“아, 그 시럽. 요즘 유행하길래 한번 사 봤네. 그리고 알리스 양, 병원이라니! 그곳은 마굴이야. 사람과 돈을 빨아들이고 시체만 내뱉는 소굴이라고.”

찰스가 대답하는 사이 알리스도 그가 거짓말쟁이라는 사실을 깨우친 모양이었다.

“개업한 지 20년이 지났다는 게 거짓말이라면, 자식을 잃었다는 것도 거짓말이었나요?”

손바닥으로 도마를 쓸던 찰스가 입꼬리를 올렸다. 도마에 핏자국이 묻었다.

“앨리스를 좋아한 건 사실이야. 그보다 더 사랑한 게 붉은 여왕이었을 따름이지.”

‘그러니까 거짓말 맞잖아. 뭔 혓바닥이 저렇게 길어.’

필사적으로 손목을 꿈질거리던 서준이 속으로 딴죽을 걸었다. 그는 비겁하고 용기도 없는지라 알리스가 찰스와 전력으로 설전하는 동안 케이블 타이를 풀려고 노력했다. 현재까진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알리스가 날카롭게 외쳤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없어지면 당신이 안 걸릴 것 같아요? 당연히 우리가 사라진 곳을 특정하고, 이곳에 왔던 걸 알아차리겠지!”

“글쎄, 딱히 그렇지도 않던걸.”

찰스는 알리스의 으름장에도 느긋하게 대꾸했다. 그의 태연한 낯빛에 서준은 벼락처럼 깨달았다. 찰스는 초범이 아니었다.

“나야말로 왜 이해를 못 하는지 모르겠어. 자네들도 사랑을 알지 않나. 사랑이란 도저히 포기하지 못하는 정염이란 걸 알지 않나? 이토록 완벽한 연인을 포기하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더해서 자신을 이해하기를 요구하기까지 했다. 유일하게 애인은커녕 동행자도 없는 서준만이 피눈물을 삼켰다. 그리고 기나긴 대화의 마침표를 찍듯 찰스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대범하게 미치광이를 비난하던 알리스조차 침을 삼켰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희생양은 그녀가 아니었다.

“부디 내 여왕의 신체가 되는 기쁨을 충분히 누렸으면 해.”

“어, 나?”

바로 리이미아였다. 처음 그녀는 가까워진 찰스를 멀뚱히 올려다보았다. 다음으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리이미아와 눈을 마주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때야 리이미아는 사태를 파악했다.

“시, 싫어. 왜 나야? 왜 나냐고!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그녀는 고개를 마구 내저으며 몸부림쳤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캠리가 부딪쳐 오는 각진 어깨에 신음을 삼켰다.

“그건 말이지, 간단하네. 리이미아 양. 자네가 여자이기 때문이야. 웬드릭은 섬세한 여성이지. 이왕이면 같은 성별의 재료를 써 봐야 하지 않겠나?”

악마의 파우더에 관한 진실을 알지는 못해도 찰스가 내뱉는 망언에 담긴 뜻을 이해 못 할 정도로 우둔한 사람은 없었다. 리이미아가 도마와 칼, 잘린 팔을 떨리는 눈으로 보더니 경기하듯 몸을 떨었다. 그러고는 목이 찢어져라 고함쳤다.

“난 남자야!”

찰스의 발이 우뚝 멈추고, 올리버도 작게 흐느끼던 소리를 그쳤다. 씨근덕거리던 알리스도 입을 다물었다. 캠리가 낮게 한숨을 내쉬고 나자 조리실 내부가 조용해졌다. 바깥의 빗소리만이 들려왔다. 이토록 적막해진 조리실에서 리이미아가 다시 한번 소리쳤다.

“아직 아래쪽은 공사가 덜 끝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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