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똑똑똑……. 노크 소리는 정중하다기보다는 소심한 축에 속했다. 흰 자국만 남은 벽을 등지고 서 있는데도 왜 뒤에서 시선이 느껴지는 듯할까? 고개를 돌려 힐끔거리고픈 모가지를 간수하느라 서준은 용을 썼다.
그러나 중중모리장단, 자진모리장단, 휘모리장단에 맞추어 검지와 중지의 마디를 혹사해도 방에서는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그는 헛기침을 가볍게 하고는 입술을 달싹여 휘파람에 가까운 소리를 겨우 내었다.
“캠리? 리이미아?”
문에 바짝 대고 입을 움직인 탓에 내뱉은 숨이 뺨을 간지럽혔다. 만약 진짜로 방 안에 그들이 있어도 듣지 못할 지경이었으니, 서준은 마침내 포기하고 문의 손잡이를 돌렸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지만 문틀이 어긋나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왜 꼭 이런 흉가의 문은 불길한 소음을 내며 열리는 걸까? 알고 싶지 않은 의문을 품으며 그는 문틈으로 고개를 살며시 기울였다.
그리고 초연한 척 굴려던 얼굴에서 주둥이가 채신머리없이 떡하니 벌려졌다. 일명 ‘붉은 방’이라고도 불리는 2층의 수상쩍은 소문으로 뒤범벅된 방은 의외로 빨갛지는 않았다.
“이건…….”
굳이 색으로 따지자면 검붉다고 해야 옳았다. 너른 바닥은 양동이째로 페인트를 부은 듯이 흑색에 가까운 색이었고 쇳내가 은은하게 올라왔다. 저 냄새를 맡는다면 허리를 굽히거나, 바닥에 엎드리지 않아도 나무 바닥이 기묘하도록 번들거리는 이유가 충분히 짐작이 갈 터였다. 창문 하나 없이 답답한 방은 냄새가 쉬이 빠져나가는 구조조차 아니었다. 아무래도 흉가는 괜한 악명이 아닌 듯했다.
겨우 내려놓았던 팔을 들어 소매로 입가를 가린 서준이 방 안을 눈으로 더듬었다. 방은 역시나 텅 비어 있었다. 기껏 찾으러 온 리이미아도, 캠리도 부재했다. 하지만 그들이 이곳에 찾아왔고 아직 떠나지 않은 건 확실했다.
서준은 긴 다리를 휘적거리며 방으로 들어왔다. 오른쪽 벽에는 흉가를 심령 스팟으로 만들어 버린 근본적인 기물인 거울이 벽에 걸려 있었는데 그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으려면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해괴한 소문이 얽힌 거울을 똑바로 바라볼 만큼 서준의 심장은 튼튼하지 못했다. 대신 그는 방 모서리의 거미줄이 늘어진 서랍장 위에 올려진 가방을 살폈다. 틀림없었다. 똑같은 가방은 리이미아와 캠리의 것이었다.
‘가방을 두고 떠나진 않았을 테니까 아직 여기 있겠군.’
가장 우려스럽던 일은 벌어지지 않을 모양이었다. 일단 흉가를 떠나지 않았다면 만나기는 쉽겠다 싶어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직 찾아보지 않은 2층의 다른 방에 있는 게 아닐까? 바로 주인이 없는 가방을 뒤적거리기는 찝찝한 구석이 있었다. 일단 캠리와 리이미아를 만난 다음에 비타민 통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면 곰 인형을 금방 돌려받을 수 있으리라.
그는 다소 안일한 기대를 품고는 몸을 돌렸다. 그때 발밑에서 빠드득하며 무언가가 부서졌다. 설마 계단처럼 낡은 바닥이 무너졌나 화들짝 놀란 서준이 서둘러 발을 뗐다. 그러나 그의 운동화 밑창에 바스러진 건 붉은 방에 있던 잡동사니나 바닥 따위가 아니었다.
가루가 자잘하게 떨어지고 서준의 눈이 깜빡거렸다. 그는 바닥에 으깨진 알약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자세히 보니, 제가 밟은 것만이 아니라 방구석이나 낡아 빠진 가구의 다리 틈새에도 알약이 몇 알 끼어 있었다. 바닥의 검붉은 흔적과 불쾌한 거울, 그리고 리이미아와 캠리의 가방을 보느라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서준은 그 알약의 정체 또한 알고 있었다.
바로 리이미아가 자신에게 떠넘긴 비타민이었다. 그는 단 한 톨도 먹지 않았고, 사실 먹기에는 시간이 부족한 것뿐이었지만, 어쨌든 알약의 생김새 정도는 알았다. 이게 왜 바닥에 알알이 흩어져 있는 걸까? 이성이 속삭였다. 얼른 장갑을 벗고 연유를 캐내라 종용했다. 타인의 비밀을 몰래 엿보기를 응원했다.
윤기가 돌 정도로 피를 먹은 바닥에 희게 흩어진 가루는 심장 깊숙한 곳에 숨은 불길한 심상을 건드렸다. 장갑을 낀 손가락이 바닥을 쓸었다. 그는 손끝에 묻은 흰 재를 번연히 응시했다.
사람은 낭자한 피와 저며진 살점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도식화된 풍경은 과거에 겪은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서준에게 이러한 종류의 기분, 예를 들어 불안하고 초조한 감정은 충분히 익숙했다. 그가 맞닥뜨린 사건들은 한 가지만 겪어도 세상을 등지고 머리를 밀기 모자람이 없었다. 그러지 않은 것은 오직 서준의 생존을 향한 끈질긴 집념 덕분이었다.
더욱 자세히 말하자면 그는 세속적인 인간이었다. 채식과 육식을 따지라면 육고기를 고르고, 뻣뻣하고 간소한 침상보다는 거위 털을 뽑아 만든 푹신한 이불보가 좋았다. 자연에서 난 것에 감사를 표하는 것보다 공장에서 찍어 내는 물건이 편했다. 제가 가진 능력을 아끼지 않고 얼마든지 휘둘렀다.
그런데도 문득 이런 현실에 염증이 들고는 하는 것이다. 도대체 몇 번이나 이런 식으로 검증을 거쳐야 할까? 서준은 의혹을 의혹으로 묻어 두지 못하고 일일이 확인하는 자가 무어라 불리는지 알았다. 바로 편집광이었다.
지금이야 이곳이 수상하니, 저곳이 수상하니 때와 장소를 가리는 듯하지만 계속 이렇게 굴다가는 언젠가 모든 순간을 불신하는 시기가 올 터였다. 그때야말로 그는 진정 뇌가 망가진 광인이 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서준은 몸을 공벌레처럼 웅크리고는 쪼그려 앉았다. 손깍지를 낀 두 손으로 뒤통수를 감싸 안고 거나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번들번들한 바닥을 내려다보던 그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런 걸 하고 싶은 게 아니었는데. 좆같은 인생…….”
행복한 삶을 살고팠다. 즐겁고, 안온하고, 손에 땀이 차는 긴장감은 화면 너머로나 있는 그러한 생애를 남몰래 꿈꿨다. 하지만 세상은 예상보다 지난하고 고달팠다. 빽빽하게 매달린 속눈썹조차 무겁게 느껴져 서준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다.
‘의심스러운 확인을 해야지. 뻔히 수상한 걸 그냥 내버려 둬? 내일 미치더라도 오늘은 살아야지, 씨발!’
새카만 눈동자가 의욕과 분노로 타올랐다. 눈을 감아 봤자 보이는 건 제 앞날처럼 깜깜하기만 한 어둠이었다. 궁상을 떨어 봤자 손에 남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장갑을 벗으려 손목을 움켜잡았을 때였다. 목덜미에서 선뜩한 감촉이 느껴졌다. 차가운 손이었다. 가느다랗고 긴 손가락이 능란하게 움직이며 뺨을 건드렸다.
호흡하기란 이토록 어려운 일이었던가? 비명은 목구멍에 뭉쳐 터져 나오지 않았다. 서준은 뒤를 돌아보지도 못하고 뻣뻣하게 굳었다. 발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흉가답게 낡은 복도, 삭은 문이었다. 턱이 덜덜 떨렸다. 그때 웃음소리가 귓가에 번졌다.
“서준! 세상에, 웬일이에요?”
다소 거칠어졌지만, 벌써 잊어버리면 미안한 목소리였다. 오만 생각을 다 했던 머리통이 어수선하게 옆을 돌아보았다. 서준의 한 걸음 뒤에는 눈꺼풀 위에 점이 난 여자가 활짝 웃으며 그를 보았다.
“캠리?”
“왜 그렇게 놀라요?”
환하게 웃는 얼굴이며 반듯한 옷차림은 전날 헤어졌던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목소리가 제법 걸걸했는데 그녀도 알고 있는지 자신의 목을 가볍게 만지작거렸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어요? 반가워라.”
한없이 가벼운 캠리의 태도에 서준의 볼이 발그레해졌다. 그는 자신이 터무니없이 겁쟁이처럼 군 사실에 새삼스럽게 수치심이 들었다.
“어, 그게요. 아, 아니. 문자. 제가 문자를 보냈는데 혹시 보셨나요?”
“문자요?”
서준이 서둘러 말을 돌렸다. 다행히 그의 시도는 성공적이었고 캠리의 고개가 갸우뚱 흔들렸다.
“왜, 화이트 스타의 메시지 기능 말입니다.”
“와우, 계정 만들었어요? 잘됐네요. 나랑 친구 해요. 아, 참. 그렇지. 그거 말인데요. 여기가 숲에 있는 곳이라 그런지 전화나 인터넷도 안 터지더라고요.”
반색하던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무룩해졌다. 서준은 슬쩍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를 꺼내 살폈는데, 과연 캠리의 말대로였다.
‘뭐, 계정은 부수적인 거니까.’
그는 휴대 전화를 다시 주머니에 넣고는 한결 여유로워져 느슨하게 섰다.
“그나저나 목소리가 왜 그래요? 혹시 감기에 걸렸어요?”
“아, 티가 나요? 조금, 그래요. 많이 흉해요?”
힐끔힐끔 눈치를 보던 캠리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서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라도 이럴 때 머리통을 위아래로 흔들지는 않았다. 그들은 잠시 별 의미 없는 신변잡기식 대화를 나누었으나 주제가 금방 떨어졌다. 어제 헤어진 사이였으니 화제가 풍부해질 시간이 부족했다. 애당초 진정한 목표물은 캠리가 아닌 리이미아였으므로, 서준은 슬그머니 그의 이름을 꺼냈다.
“그나저나 리이미아는 어디 있습니까? 같이 온 건 맞지요?”
“맞아요. 우린 함께 이 방까지 와서 거울을 봤죠. 그리고 같이 있었는데 방에서 나가더니……. 리이미아요, 어쩌면 그 애는 숨은 걸지도 몰라요.”
캠리는 고민이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녀의 토로는 뜻밖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서준, 어쩌면 이 흉가에는 다른 사람이 있는 것 같아요.”
서준이 검지로 제 가슴팍을 찌르자 캠리가 눈썹을 찡그리며 부정했다.
“아니요, 서준! 리이미아는 분명히 그녀라고 말했어요.”
“그녀요?”
“네. 검은 머리에, 검은 화장을 한, 검은 옷을 입은 여자요. 방에서 나갔던 리이미아가 그런 여자를 봤다고 말했어요. 칼을 들었다고 했죠.”
막 말을 마친 캠리가 입술을 깨물었을 때였다. 1층에서 문이 세게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2층의 두 번째 방이 계단과 가깝고, 문이 활짝 열려 있어 못 들을 수가 없었다. 캠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서준의 손목을 붙잡고는 빠르게 속삭였다.
“숨어요!”
그들은 허둥거리다가 깨달았다. 아무렴 서준의 길고 긴 다리를 접어 서랍장에 구겨 버릴 작정이 아닌 한 심령 스팟인 방에는 몸을 숨길 만한 적절한 장소가 존재하지 않았다. 캠리도 그 사실을 깨우친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서준을 붙잡아 방에서 빠져나갔다. 그러고는 벽을 돌아 문에 못이 잔뜩 박힌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서준은 이곳이 무척 깜깜하다는 걸 알았다. 캠리와 서준은 어둠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바깥에서 누군가 우렁차게 외쳤다.
***
“안녕하세요. 누구 계세요?”
요한은 낡아 빠진 현관문을 경쾌하게 밀었다. 인사말은 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