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정말 날개가 달렸어요? 그것도 여섯 장이나?”
“설마!”
키라가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을 보내왔다. 그녀는 벽에 등을 기대고는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망상하고 현실을 분별하지 못하는 시답잖은 소리지.”
“음, 그런데 그 루시엘은 뭐 하는 사람인가요?”
“뭘 하는 사람이냐니……. 직업? 그건 나도 몰라. 안 물어봤어.”
검게 화장한 눈이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듯이 흐릿해졌다.
“인터넷 사이트에서 알게 된 사이니까 그렇게까지 시시콜콜하게 신변을 떠들어 대지는 않거든……. 아무튼, 직업은 몰라도 취미라면 알지. 루시엘은 제 떨거지를 데리고 이런 장소를 쏘다니는 게 취미야.”
담뱃재를 가볍게 털어 낸 키라가 요한을 똑바로 응시하며 덧붙였다.
“여기도 온다고 게시글을 올렸었어. 어딜 갔다 오기만 하면 호들갑이란 호들갑은 다 떨어 대. 다른 사람이 알아보기 힘든 후기를 곁들여서 말이야. 나는 그 전에 먼저 와서 깨끗한 눈과 마음으로 여길 보고 싶었던 거고. 그리고, 네 지인이라는 서준? 딱 루시엘하고 친구 할 법한 생김새야. 마침 그 녀석도 만날 사람이 있어서 가는 거라고 했었으니까 아마 맞겠지. 칠흑의 별을 품은 눈동자가 네 친구 맞지?”
휘황찬란한 명칭에 요한조차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는 어렵사리 키라가 한 말을 따라 했다.
“칠흑의 별을 품은 눈동자요…….”
“그딴 눈으로 보지 마! 내가 한 말이 아니야. 루시엘이 얘기한 거지.”
가느다란 목에서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자신이 내뱉은 단어가 몹시 수치스러운 듯했다. 요한은 그 놀라운 단어를 다시금 입에 담는 대신 어른스러운 태도로 부드럽게 주제를 돌렸다.
“그, 루시엘이란 분하고 서준이 만나는 건 둘째 치고 함께 이동할 이유라도 있을까요? 그 애는 목적지가 확고하거든요. 별다른 이유도 없이 딴 길로 샐 것 같지는 않아서요.”
요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보았다. 우선 곰 인형 때문에 서준이 흉가에 왔으리란 건 확실했다. 문제는 흉가를 벗어난 다음의 행선지였다. 그는 서준의 여행길이 어디에서 끝날지 알았지만 키라가 워낙 단호하게 단정을 짓듯 말하자 자신감이 사그라들었다.
“네 친구도 오컬트에 흥미 있는 거 아냐? 내가 루시엘하고 질긴 악연을 이어 나가는 것도 같은 오컬트 관련 사이트의 회원이라 그렇거든.”
“오컬트는 모르겠고 스플래터랑 슬래셔는 좋아해요. 그리고 준이는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인걸요.”
“뭐, 스플래터나 슬래셔나 비슷하잖아. 루시엘도 그렇게 생각할걸. 게다가 루시엘은 발이 넓어서 언제 어디서 안면을 익혔을지 몰라. 아무리 낯을 가려도 상대방이 그러거나 말거나 제 친구 목록에 집어넣으려 들 테고. 제멋대로 구는 게 흡사 폭풍 같은 성격이지. 장담하는데 루시엘과 만났다면 휘말리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걸.”
“친구요…….”
요한이 날개가 여섯 달린 비둘기를 상상하며 중얼거렸다. 사실 단순한 친구라면 나쁠 것 없었다. 오히려 감개무량하기까지 했다. 애인은 둘째 치고 친구는 여럿 있는 편이 정서 발달에 좋았다.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키라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녀의 머리카락 한 줌은 보라색으로 물들어 눈에 띄었다.
“아무튼, 네 친구가 루시엘이 만나려고 한 지인이면 대강 행선지가 짐작은 가. 우리 사이트의 정식 모임이 이틀 후에 있어. 그때 같이 오지 않을까 하는데. 네가 원한다면 같이 가 보는 건 어때? 대신 숙박비야 알아서 하고.”
단조롭게 말하던 키라가 몇 번 빨지도 않은 담배를 벽에 지졌다. 지저분한 벽에 동그랗게 탄 자국이 남았다.
“정말요? 고마워요, 키라!”
요한이 활짝 웃으며 기뻐했다. 과도하게 감격하는 모습에 키라는 어깨를 움츠리고는 쪼그려 앉아 제 휴대 전화로 곰 인형의 사진을 찍었다. 다양한 각도로 곰 인형을 움직이던 키라가 화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요한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였다.
“그런데 이럴 거 없이 직접 전화를 걸어서 물어보면 되잖아?”
“사실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하는 거라서요. 가능한 한 몰래 만나고 싶어요. 키라, 혹시 괜찮다면 대신 루시엘과 전화를 시켜 주지 않겠어요? 정말 서준과 함께 있는지 확인했으면 해요.”
“그 정도야, 뭐.”
아무래도 키라는 다섯 번째 방에 갇혀 있는 동안 몹시도 고단했는지 선선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민하고 까다로워 보이는 인상과 달리 그녀는 자비롭게 굴었다. 심지어 몇 마디 더 대화를 나누던 그들은 휴대 전화의 번호까지 교환했다. 요한은 기뻐하며 키패드를 눌렀다.
“사실 전 숫기가 없는 편이라 고향에서 나오고부터는 괜찮은 관계를 맺지 못했거든요.”
“그럴 수 있지. 원래 살던 곳 떠나면 쉽지 않은 법이니까.”
“아, 그래도 레이지하고 제법 친해졌었어요.”
“레이지가 누군데? 이름 한번 대단한걸. 부모 얼굴이 궁금할 지경이야.”
“음, 잠시 들렀던 편의점 창고에서 손과 발이 묶인 채로 도와 달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죠. 난 레이지가 그곳에서 나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줬고요.”
“그만하면 썩 나쁘지 않은 인연이잖아.”
“그렇죠? 우리는 아주 잠깐의 인연이었지만, 진정한 우정을 나눴던 것 같아요.”
요한은 키라에게 휴대 전화를 돌려주면서 곰 인형을 받았다. 그는 곰 인형을 소중한 손길로 주머니에 곱게 모셨다. 두 사람은 소소한 잡담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복도를 걸었다. 키라는 퉁명스러운 눈길로 방들을 둘러보았다.
“그나저나 실망이야. 유명한 흉가라고 해도 별거 없잖아? 기대했더니 거울도 없고…….”
“거울이 없다니요?”
널리 퍼진 소문과 같은 일은 경험하지 못했으나 요한은 분명히 거울을 보았다. 비록 낡고 대단한 것 없어 보였지만 매디슨은 그것에 기이한 힘이 있다고 주장했다. 후드 점퍼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 건들거리며 걷던 키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몰라? 아, 하긴. 흉가 체험을 하러 온 건 아니라고 했지. 이 흉가에는 빨간 방이라는 괴담이 있어. 난 그걸 보려고 왔고. 내가 갇혀 있던 방이 바로 괴담의 진원지야. 하지만 빨갛기는커녕 새까맣기만 했어.”
“무슨 소문이 있는지는 알아요. 하지만 그건 2층의 두 번째 방이잖아요. 키라, 당신이 있던 방은 다섯 번째 방이에요.”
“뭐?”
“네?”
불이 꺼진 담배를 계속 입에 물고 질겅거리던 키라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담배가 바닥으로 톡 떨어졌다. 그녀는 눈을 끔뻑거리더니 가장 안쪽의 여섯 번째 방을 가리켰다.
“저기서부터 세는 게 아니야?”
요한이 뺨을 긁으며 대답했다. 그는 키라의 검은 손끝과 반대편을 손가락질했다.
“거꾸로 센 것 같아요, 키라.”
“그럼, 내가 방에 갇힌 건?”
현실을 부정하고픈 목소리가 가냘프게 떨렸다. 하지만 요한은 선의의 거짓말보다는 잔혹하더라도 진실을 알리려 애썼다.
“관리를 안 하는 집이니까요. 유별나게 뻑뻑했던 거죠.”
“이런, 제기랄!”
민망함과 분노, 수치심이 한데 섞여 키라의 얼굴을 벌겋게 물들였다. 그녀는 길길이 날뛰며 벽을 마구잡이로 발길질했다. 참으로 불같은 성미였다. 요한이 내심 키라의 호의를 사게 해 준 낡아 빠진 문틀에 감사할 정도였다. 그는 키라가 충분히 감정을 쏟아 냈다고 판단한 다음에야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키라는 매디슨과 만나지는 않았어요? 이런 데서 씻는 사람이니 눈에 띄었을 텐데.”
“누구?”
“매디슨요. 여기 욕실에서…….”
우뚝 멈춰 선 요한이 문틈 사이로 새하얀 수증기를 흘려보내던 방을 보았다. 문이 활짝 열린 욕실은 매디슨과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깨끗한 물이 아낌없이 떨어지며 바닥을 적시던 것과 달리 다시 본 그곳은 낡고 지저분했다. 흰 맨발이 밟고 있던 타일은 여러 조각으로 깨져 있었으며, 군데군데 정체 모를 곰팡이와 이끼가 번졌고 집기 또한 망가져 사용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의 어깨 너머로 깨진 타일을 흘깃거린 키라가 미심쩍은 눈초리를 했다. 그녀는 어둑한 욕실과 요한을 번갈아 보았다.
“여기 누가 있었다고?”
요한은 습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욕실을 빤히 응시하다가 눈과 입을 슬며시 움직이며 소리 없이 가볍게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싱겁긴. 그보다 너는 빨간 방에서 거울을 봤다, 이거지?”
키라는 어둑한 욕실을 지나쳐 두 번째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검게 화장한 눈가에도 즐거운 기색이 서렸다.
당장이라도 저 방에 들어갈 태세에 요한은 다소 난해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저곳에는 미처 수습하지 못한 매디슨의 시신이 쓰러져 있었다. 빛이 잘 들지 않는 복도에서 파란색 눈이 자꾸 곁눈질했다. 키라가 이토록 친절한 사람인 줄 알았다면 그는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매디슨을 깔끔히 치워 버렸을 것이다. 만약 매디슨이 발견된다면 요한은 필히 의심받을 터였다. 그래서는 정말이지 곤란했다…….
“루시엘이 하도 요란을 떨면서 우리 사이트에 글을 올렸거든. 꿈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가 들렸다느니, 피가 분수처럼 새어 나왔다느니.”
하지만 요한이 그녀를 말리기도 전에 키라가 문을 벌컥 열었다. 다섯 번째 방의 문과는 달리 잘도 열렸다.
“흠…….”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텅 비었다는 뜻은 아니다. 서랍장 위의 가방이며 잘게 떨어진 알약, 거울 따위는 변함없이 그곳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돌덩이처럼 쓰러진 시체는 온데간데없이 보이지 않았다.
키라가 성큼성큼 문 안쪽으로 들어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조심스럽게 거울 옆에 다가간 그녀는 자신이 비치지 않도록 옆으로 비껴 서서 바닥을 문지르거나 알약을 주워 보고는 다시 던졌다. 온 낯을 잔뜩 찌푸렸던 키라의 입에서 안도인지 후회인지 모를 한숨이 거하게 터져 나왔다.
“역시 개꿈이었어. 피가 분수처럼 나오기는! 누가 피를 청소기로 말끔히 빨아들인 것도 아니고.”
투덜거리던 키라가 들어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큰 보폭으로 방에서 빠져나왔다. 그녀는 엄지손가락으로 등 뒤를 가리키며 질문했다.
“저 가방은 네 친구랑은 관련 없어? 혹시 놔두고 갔다든가.”
“준이 물건은 아닐 거예요. 가지고 있던 가방이 아닌 데다가, 평소 들고 다닐 만한 취향도 아니라서…….”
“그래? 뭐, 됐어. 난 여기서 볼일은 다 봤어. 너도 용건 없으면 슬슬 내려가자.”
요한이 선선히 머리를 끄덕거리며 키라가 나온 방을 스쳐보았다. 그의 입가가 잔잔하게 올라갔다.
“별일이 다 있네요. 역시 세상은 넓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