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금###############
- 연희윤 에스퍼님. 6층 605호로 와 주세요.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연희윤 에스퍼님…….
희윤은 저를 찾는 방송에 차분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순간 사무실 내 이목이 전부 그에게 쏠렸지만, 모른 척했다.
복도를 나와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중에도 희윤이 지나갈 때마다 힐끔힐끔 쳐다보는 시선이 몰렸다. 그건 희윤이 605호로 사라질 때까지 계속 따라왔다.
“연희윤 에스퍼. 오셨어요?”
모니터를 보던 연구원이 희윤의 뒤쪽을 쓱 확인하며 그를 반겼다.
“아, 네.”
희윤이 덤덤하게 대꾸하자, 연구원도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오늘은 가이드 4팀과 할 거예요.”
“네…….”
희윤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로 3주째죠?”
이번엔 그렇다는 의미로 다시 주억거렸다.
“벌써 연희윤 에스퍼랑 매칭해 본 가이드 수가 두 자리를 훌쩍 넘겼는데…….”
연구원이 책상에 내려놨던 파일을 쓱 살폈다. 왜인지 내용을 보는 연구원의 눈동자에 안쓰러운 빛이 서린 듯 보였다.
“이번에는 꼭 70% 이상 되는 매칭률이 나오면 좋겠네요.”
그리고 마치 무언가를 외면하듯 파일에서 눈을 떼고 희윤을 바라보았다.
“이미 한 분 계시잖아요.”
희윤의 말에 연구원은 어떻게 그런 끔찍한 소리를 할 수 있느냐는 듯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연희윤 에스퍼! 아직 포기하기는 일러요. 매칭 테스트할 가이드가 서른 명이나 남았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비장하게까지 느껴지는 연구원의 말에 희윤의 입술에는 어색한 미소가 걸렸다.
“자! 검사실로 들어가세요. 혹시 몰라서 미리 와서 기다리라고 했거든요. 들어가시면 바로 시작할게요.”
연구원은 마치 희윤이 모든 걸 포기하고 운명에 수긍하는 걸 막으려는 듯 단호하게 안쪽 문을 가리켰다.
희윤이 그쪽을 돌아보니 열린 검사실 문 안에 앉은 사람이 보였다. 오늘 희윤과 매칭 테스트를 진행할 가이드였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이미 대기 중인 가이드도 있는데 더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을 듯했다. 희윤은 고개를 끄덕이고 얌전히 검사실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가이드님.”
희윤이 먼저 기다리던 사람에게 꾸벅 인사했다. 의자에 앉아 있던 가이드도 살짝 일어나며 마주 고개를 숙였다.
“네. 안녕하세요, 연희윤 에스퍼님. 말씀 많이 들었어요…….”
이름을 입에 올리며 뒤에 붙이는 말은 어쩐지 어색한 티가 났다. 그뿐 아니라 희윤의 얼굴을 살피는 가이드의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경직되어 보였다.
희윤은 왜 그러냐고 묻지 않았다. 이유를 알기 때문이었다. 그저 살짝 곤혹스러운 미소만 띠었다.
- 검사 시작하겠습니다. 두 분 적당히 접촉해 주세요.
안내 방송으로 나오는 말에 희윤은 살짝 눈을 찡그렸다. 처음 매칭 테스트를 할 때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때도 저렇게 연구원은 오해하기 좋은 말을 했다. 그 바람에 희윤은 첫 테스트에서 당황스러운 일을 겪었다.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상기되던 기억에 희윤이 고개를 붕붕 저었다.
“손잡고 할까요?”
희윤이 자신의 손을 앞으로 내밀며 물었다. 가이드가 움칫하더니 주춤주춤하며 자신의 손을 잡아 왔다. 그러면서 시선은 마치 무언가를 탐색하듯 검사실 밖을 황급히 살폈다. 하지만 손을 잡고도 다른 생각에 빠진 희윤은 그러한 분위기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에스퍼와 가이드 간의 매칭률을 알아보기 위한 검사 시간은 대략 30분.
시간은 조용하게 흘렀다. 아니, 얌전히 결과를 기다리기만 한 건 아니었다. 희윤과 가이드의 눈길은 종종 꾹 닫힌 검사실로 갔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으니까. 그러다 가끔 서로 눈이 마주치면 어색한 웃음을 서로에게 비쳤다.
그렇게 약 20분쯤 흘렀을 때.
꽈앙.
엄청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희윤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동시에 가이드도 온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의 얼굴에는 올 것이 왔다는 빛이 서려 있었다.
마치 폭풍 전야 때와 같은 고요가 이어지던 그 순간.
벌컥.
검사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표해승 가이드. 뭐 하는 거예요!”
열린 문틈으로 연구원의 화난 음성이 먼저 비집고 들어왔다. 이윽고 길쭉한 인영이 그보다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입구에 섰다.
한 번 보면 쉬이 눈길을 돌릴 수 없을 만치 고혹적인 미인이다. 검은 머리칼에 검은 눈. 그에 대비되는 하얀 얼굴에 붉은 입술.
하지만 새로 등장한 사람을 확인한 희윤이나 가이드의 얼굴은 난처한 빛으로 물들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가이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저, 저기…….”
“희윤 형.”
하지만 그가 채 말을 걸기도 전, 미인이 희윤의 이름을 불렀다. 애초 미인은 이곳에 나타난 순간부터 희윤에게만 관심을 보였다.
정확히는 희윤이 마주 잡은 손에.
당장이라도 잘라 버리고 싶다는 듯한 살벌한 눈빛에 가이드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딸꾹. 딸꾹.
마른침을 삼키는 것으로도 모자라 가이드는 딸꾹질까지 시작했다. 본래도 소심한 그는 갑자기 등장한 미인이 내뿜어 대는 위압감에 잔뜩 쪼그라든 상태였다.
같은 가이드여도, 저 미인과 자신은 급이 다르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으니까.
“희윤 형. 여기 있었네요?”
다시 한번 다정한 척하는 부름이 들렸다. 가이드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는 에스퍼에게 저 좀 살려 달라는 눈빛을 간절하게 보냈다. 금방이라도 비현실적인 미모를 자랑하는 남자가 저를 죽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희윤은 미인을 마주 보느라 가이드의 필사적인 눈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표해승 가이드.”
미인을 부르는 희윤의 음성에는 한숨이 섞여 있었다.
“또 그렇게 부르시네요.”
짐짓 투정이라도 하는 듯 나온 말에 놀란 표정을 지은 건 희윤이 아니라 맞은편에 앉아 연신 ‘딸꾹. 딸꾹’ 하고 있는 가이드였다.
“어떻게 이러실 수 있어요…….”
미인이 한 걸음 내디뎠다. 동시에 가이드가 덜커덩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희윤이 그쪽을 보는 찰나 미인의 시선도 그 가이드에게로 향했다.
당장 꺼지라는 눈빛을 어렵지 않게 읽어 낸 가이드가 뻣뻣해진 몸을 삐걱삐걱 움직였다.
“저, 전 그럼 이만!”
아직 매칭 테스트가 채 끝나기 전이라는 건 이미 가이드의 머릿속엔 없었다. 그에게는 주목받는 새 에스퍼와의 매칭 테스트보다 살고자 하는 생존 본능이 더 강했으니까.
검사실을 나오니 난감해하면서도 차마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상황만 지켜보던 연구원이 있었다.
“연구원님! 오늘은 표해승 가이드 없다면서요!”
가이드가 원망을 가득 담아 연구원을 바라보았다. 연구원도 그에 못지않은 유감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요. 나도 분명 그렇게 전달받았는데.”
“그럼 대체 저기 있는 건 누군데요! 정말 너무하세요.”
마치 비련의 주인공이라도 되듯 서글프게 쏘아붙이고 사라지는 가이드를 연구원은 씁쓸함과 황당함을 담아 바라보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니. 그거야 당연히 일정이 그러니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거지. 그리고 이런 사태를 만든 건 자신이 아니었다.
연구원의 시선이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을 향해 꽂혔다. 동시에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아주 꼴값을…….’
연구원에게 격한 반응을 일으킨 미인의 관심은 아직도 희윤에게 있었다. 희윤의 손을 붙잡는 해승의 모습은 애틋하기보다는 가증스럽게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연구원이 알고 있는 표해승은 외모처럼 절대 청순가련형 미인이 아니었다. 차라리 꼬리 아홉 달린 구미호라면 모를까.
희윤은 그저 요물을 앞에 두고도 위험을 모르는 가련한 토끼였다.
“그냥 테스트를 받으러 온 건데요.”
그런 연구원의 감상은 모른 채, 검사실에서는 희윤이 말을 뱉었다. 미인의 눈꼬리가 축 내려갔다.
“왜요?”
“네?”
“왜 받으시냐고요.”
“그거야…….”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다. 희윤은 각성한 지 이제 갓 3주 차 된 새내기 에스퍼. 그래서 그와 상성이 좋은 가이드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테스트를 진행 중이었다.
이건 본부에 들어온 에스퍼라면 누구나 거치는 공식 업무. 그를 통해서 약 셋에서 다섯 명 사이로 가이드 리스트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그런 소리를 해 봐야 눈앞에 미인을 이해시킬 순 없다는 것도 안다.
“앞으로 일을 하려면 가이딩을 받아야 하니까.”
희윤은 필요한 말만 꺼냈다.
“그게 왜요?”
미인이 고개를 살며시 기울이며 왜 타령을 했다. 겹쳐 잡은 희윤의 손을 끌어가 볼에 가져다 댔다.
희윤은 손등에 닿은 온기에 움찔하며 떼어 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엇갈려 맞물린 손가락은 마치 올무에 걸린 듯 빠지지 않았다.
“표해승 가이드.”
“또…….”
“해승 씨.”
책망하는 듯한 말에 희윤이 얼른 호칭을 바꿨다. 그러자 미인이 꽃이 피듯 미소를 지었다.
“네, 희윤 형.”
목소리에도 사탕이라도 문 듯 달콤함이 잔뜩 배어났다.
“손 놓아주세요.”
희윤이 얼른 풀어 달라는 눈빛을 보내니 미인은 입술을 비죽이며 맞잡은 손을 떼어 냈다. 뿔이 난 듯한 모습도 참 예뻐 보이는 게 참 문제다.
“테스트해야 해.”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희윤이 다시 말했다.
“필요 없잖아요? 이미 나랑 했는데.”
미인이 이번엔 희윤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물었다. 희윤은 제 안으로 흘러들어 오는 부드러운 기운에 한결 편해졌음을 느꼈다. 덕분에 연구원의 얼굴이 썩어 들어가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래도요. 그게 방침이니까.”
“글쎄요…….”
순간 미인의 눈빛이 서늘하게 변했다. 연구원은 혹시 저게 사고라도 치는 게 아닌가 하며 바짝 긴장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희윤은 그의 눈빛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그저 옅은 한숨을 쉬며 천장을 올려다보았을 뿐이었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다시 생각해 봐도 도통 알 수 없지만, 정말로 곤란했다.
이 가이드님의 집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