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85)

괴물체가 거대한 자연재해를 일으키고 에스퍼와 가이드라는 이능력자가 생겨난 지 어느덧 30년이 흘렀다.

그간 이능력자들은 괴물체를 상대하는 영웅으로서 직업적으로도 선망의 대상이 되었지만, 희윤은 단연코 그게 제 일이 될 거란 생각은 해 본 적 없었다. 그저 앞으로도 돈만 보고 일하는 삶에서 벗어날 수 없겠지. 그런 생각만 했기에 이런 상황은 생각해 본 적이 없건만…….

희윤의 긴장감 어린 눈이 스마트폰 액정에 고정됐다. 그곳엔 1시간 전 도착한 메시지가 떠 있었다. 몇 번을 다시 읽어도 믿을 수 없는 내용을 담은 채.

“연희윤 님, 이쪽으로 오세요.”

이름이 들려와 퍼뜩 고개를 들었다. 행정 직원이 사무적인 표정으로 희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네.”

희윤은 땀이 살짝 밴 손바닥을 티셔츠에 문지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행정 직원이 문을 비켜서며 들어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희윤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마른침이 절로 넘어갔다. 주먹을 꾹 쥐었다가 펴며 다시금 걸음을 뗐다.

“아, 연희윤 씨. 이쪽으로. 여기에 앉아요.”

널찍하고 채광이 좋은 사무실. 창가 책상에 앉은 커트 머리 여성이 친근하게 웃으며 희윤에게 자리를 권했다.

희윤은 그녀가 가리킨 갈색 소파에 앉았다. 곧게 편 등이며 바짝 굳은 어깨에 긴장한 티가 가득했다.

“저는 한국 이능력자 관리 본부 서울지역 중앙지부를 책임지고 있는 지부장 이숙경이라고 해요.”

“네. 안녕하세요……. 연희윤입니다.”

지부장이라면 까마득하게 높은 직위 아닌가. 희윤은 왜 그런 사람이 저를 만나나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은 얼떨떨해하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본부에서 보낸 연락은 받으셨죠?”

희윤은 이번에도 짧게 “네.” 하고 대답했다.

“자세한 내용까지는 모를 테니까. 자.”

지부장이 낮은 테이블에 서류 봉투를 놓았다. 하지만 희윤은 차마 손도 대지 못하고 지부장에게 시선을 주었다.

“읽어 보세요.”

부드럽게 권유하는 말에도 내뻗는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봉투 입구를 벌리자 종이 한 장이 달랑 들어 있었다. 밖으로 끄집어내며 위에서부터 확인했다.

국가 이능력 종합 검진 결과 안내

연희윤 님은 이능력 검진 결과 아래와 같은 평가를 받으셨습니다.

판정 - ■ 에스퍼 □ 가이드

등급 - □S ■ A □ B □ C □ D □ E □ F

“에스퍼?”

희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에게 온 안내는 검진 결과 이능력자로 판정되었으니 본부로 오라던 것이었다.

“네. 연희윤 씨. 당신은 에스퍼입니다. 성인이 각성하는 게 드문 경우는 아니지만…….”

지부장이 한숨처럼 웃으며 말을 잠시 끊더니 도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 고등급으로 각성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서 사실 좀 놀랍네요. 여하간. 어떤 속성인지는 심층 검사를 해 봐야 알 수 있으니 날짜를 다시 잡죠.”

그녀의 감탄 섞인 말은 희윤의 귀에 제대로 닿지도 못했다.

“에스퍼요? 제가요?”

“네. 보시다시피.”

무슨 문제가 있냐는 눈으로 지부장이 검진 안내서에 시선을 주었다. 희윤도 종이를 다시 내려다봤다.

다시 봐도 마찬가지다.

에스퍼 판정. 등급은 A.

* *

“악!”

제 볼을 사정없이 꼬집은 희윤이 비명을 흘렸다. 얼얼한 게 본명 꿈은 아니었다. 볼을 벌겋게 물들인 채 고개를 들었다.

앞에 푸른색 창으로 빼곡한 빌딩이 있었다. 한국 이능력자 관리 본부 서울지역 중앙지부였다.

A급 에스퍼로 판정받은 희윤은 행정 직원의 안내로 다음 날 곧장 심층 검사를 받았다.

10일 후, 최종적으로 A급 물 속성 에스퍼라는 결과가 나왔다. 지금 희윤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여기 서 있는 건 그 때문이었다.

“연희윤 에스퍼. 좋은 아침입니다.”

로비로 들어서자 지난번 보았던 행정 직원이 희윤을 맞이했다.

“네. 안녕하세요.”

희윤이 꾸벅 인사하자 행정 직원도 마주 고개를 까딱이더니 곧 안내해 주겠다며 앞서 걸었다. 희윤은 얌전히 그 뒤를 따라가며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구경했다.

“박 대리님. 옆에 분 누구예요?”

환한 빛이 쏟아지는 널찍한 로비를 가로질러 막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나직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나긋한 느낌이 드는 음성이 들려왔다.

“이번에 새로 각성한 연희윤 에스퍼.”

“아하.”

희윤은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힐끔 봤다가 깜짝 놀랐다. TV에서나 보았을 법한 고전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우아한 미인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반가워요.”

희윤과 눈이 마주치자 미인이 생긋 웃으며 인사를 건네왔다. 눈동자도 밤하늘처럼 차분하고 맑았다.

“안녕하세요.”

악수를 청하며 내민 새하얀 손에 희윤은 저도 모르게 마주 잡으며 고개까지 숙였다. 순간 흐르는 계곡물에 손을 담근 듯 맑고 시원한 느낌이 기분 좋게 전해졌다.

“표해승 가이드.”

행정 직원이 나무라는 듯 말하자 미인이 얼른 손을 풀었다.

“인사예요, 인사.”

마치 아무런 의도가 없었다는 듯 손바닥을 보이는 미인을 희윤이 의아하게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미인이 더욱 환히 미소 지어 보였다.

‘와……. 진짜 예쁘네.’

아니 아름답다는 말이 잘 어울린다. 매끈한 이마와 곧고 날렵하게 그려진 눈썹.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긴 눈. 손대면 베일 듯 뾰족하게 솟은 코와 붉은 입술.

“왜 그러세요?”

너무 뚫어지게 봤나 보다. 미인이 눈썹 한쪽을 들어 올리며 의아해했다.

“아, 아뇨. 죄송합니다. 너무 아름다우셔서.”

저도 모르게 속으로 해야 할 말을 내던진 희윤의 눈이 당황으로 흔들렸다.

“하하. 그래요? 고마워요.”

다행히 미인은 불쾌해하지 않았다. 세상에. 웃는 모습도 어쩜 이렇게……. 저도 모르게 또 넋을 놓으려던 희윤은 “흠흠.” 헛기침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갈까요?”

“아, 네.”

희윤은 행정 직원을 따라가며 미인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곧 만나요.’

그런 속삭임이 들린 듯한데, 아마도 제 착각일 것이었다.

* *

행정 직원이 희윤을 안내한 건 소회의실이었다. 그는 미리 챙겨 온 패드를 열고 설명을 시작했다.

“출근은 아침 9시, 퇴근은 저녁 6시. 주말과 공휴일에는 쉬어요.”

“8시간, 주 5일 근무요?”

희윤이 제가 이해한 게 맞느냐는 눈으로 물었다. 그간 각종 아르바이트와 변변찮은 계약직을 전전하던 그가 가장 바라는 근무 환경이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네. 물론 일을 하다 보면 불가피하게 야근이나 주말 출근, 출장 등을 할 수 있어요. 아무래도 에스퍼가 특수 직종이다 보니……. 대신 이럴 땐 특별 수당이 지급됩니다.”

특별 수당이라는 말에 희윤이 살짝 입을 벌리는데, 행정 직원이 패드를 그 앞에 쓱 내밀며 다시 말을 이었다.

“기본급은 여기 적힌 금액인데 아시다시피 저희는 준공기관으로 분류된 기관이라 세금이나 4대 보험 등 떼는 게 좀 많아요. 그래서 실수령은 이쯤 됩니다.”

“헉! 이렇게나요?”

아무리 이능력자가 생명을 위협받는 일을 한다고는 해도 예상보다 많은 액수에 희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만큼 이능력자로서 해야 할 일이 막중하다는 거니까요.”

하긴 희윤도 인터넷이나 뉴스 등에서 이따금 이능력자들의 활약을 보긴 했다. 마치 영화 속 영웅들처럼 멋지게 움직이지만, 사실은 목숨을 걸고 가장 위험한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아, 네. 알겠습니다.”

희윤이 한층 진지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연희윤 에스퍼가 일을 잘하면 그만큼 인센티브가 붙는데 이건 어차피 지금 해당이 안 되니 나중에 따로 얘기하면 되고…….”

행정 직원이 안경테를 쓱 올리더니 마저 말했다.

“3개월간은 수습 기간이에요.”

“수습이요?”

“네. 각성한 지 얼마 되지 않으셨으니 아직 능력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모르실 테니까요. 또 아직 매칭률이 좋은 가이드가 누구인지도 확인 안 되셨고.”

“가이드요?”

“네. 매칭 테스트를 통해서 가이드가 배정될 거예요.”

“매칭 테스트요?”

“네. 꼭 필요한 일이에요. 그러니 협조 잘해 주세요.”

희윤은 가이드니 매칭 테스트니 하는 용어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랬기에 묻는 것인데 행정 직원은 왜 그걸 하느냐는 식으로 이해한 듯했다.

“네.”

다시 물어볼까 고민하다 어차피 하다 보면 알게 될 테니 됐다고 생각한 희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기까지 하고. 더 궁금한 거 있으세요?”

그 말에 희윤은 아까부터 내내 담아 두고 있던 질문을 떠올렸다.

“저기…….”

“네.”

행정 직원이 뭐든 대답해 주겠다는 듯 바라봤다. 희윤은 저도 모르게 손을 꼭 말아쥐고 긴장한 채 물었다.

“보통 점심은 어떻게 해결하나요?”

정시 출근 정시 퇴근, 중요하다. 연봉이 높고 특별 수당도 좋다. 휴일에 눈치 안 보고 쉬는 것 역시 마음에 든다. 그런데 그보다 희윤이 가장 알고 싶은 건 풍족하고 맛있는 밥이었다.

“3층에 있는 구내식당에서 먹습니다.”

행정 직원은 뭘 그런 걸 묻느냐는 표정으로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희윤의 얼굴이 다시금 미미하게 펴졌다.

두둑하게 점심을 먹은 후 희윤은 행정 직원의 안내로 교육관과 인사를 나누었다. 30대 초반. 활달한 인상의 여성이었다.

“3개월간 연희윤 에스퍼를 책임질 안효정이라고 해요. 빙결 속성 A급이고요.”

“연희윤입니다. 잘 부탁드릴게요.”

“네. 앞으로 잘 지내 봐요.”

희윤이 꾸벅 고개를 숙이자 안효정이 생글생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희윤은 그 손을 마주 잡으며 여기 사람들은 어지간히 악수를 좋아하네 하는 생각을 했다.

다만 아까 미인과 했을 때와는 다르게 이번 악수는 평상시와 비슷한, 위아래로 흔들리는 느낌만 잠시 들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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