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85)

“보자. 연희윤 에스퍼는 음, 그래. 딱 그런 느낌이긴 했어요. 맑고 잔잔하고 부드러운 분위기.”

안효정이 손에 들고 있는 패드를 툭툭 누르며 입을 열었다. 물 속성과 제 분위기가 어디에서 비슷하다는 건지 의문이 들었지만, 희윤은 얌전히 안효정이 더 말하길 기다렸다.

“와, A급? 성인이 된 후에 각성한 건데 이런 적이 있나? 재각성의 경우에만 있던 것 같은데.”

그녀가 휘파람을 불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옆에 앉은 희윤을 떠올리고 민망한 웃음을 띠었다.

“아. 미안해요. 이런 경우는 또 처음 봐서.”

사실 안효정이 희윤의 교육을 담당하게 된 건 오늘 오전. 하필 지부에 남아 있는 A급 물 속성 에스퍼가 없어서 비슷한 빙결 속성 A급인 그녀가 떠안게 된 것이었다. 그랬기에 안효정은 희윤에 관해 제대로 된 정보도 알지 못하고 이제야 확인한 것이었다.

“그런가요?”

반대로 이미 지부장에게 비슷한 말을 들었던 희윤은 담담했다.

“그럼요. 지부장님이 엄청 호들갑 떨었을 텐데?”

희윤이 모르겠단 눈빛을 내보였다.

“아, 초면이라 조심했을 수 있겠다. 어쨌든 그래요. 일단 앞으로 교육을 어떻게 진행할지 얘기 나눠 보도록 하죠.”

“네.”

덤덤하게 대꾸하는 희윤을 쓱 살핀 안효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연희윤 에스퍼가…….”

“저기, 말씀 중에 죄송한데요.”

그러나 고작 그 한마디 끝나기 무섭게 희윤의 목소리에 싹둑 잘렸다.

“음. 아뇨. 왜요?”

“그…… 편하게 불러 주세요.”

희윤에겐 사실 누구누구 에스퍼 이렇게 불리는 게 좀 낯간지럽고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런 마음을 알았는지 안효정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공식적으로 부르는 호칭이 이래요. 금방 적응되실 거예요. 물론 부담이 된다면, 희윤 씨. 이렇게 부를까요?”

“좋습니다.”

“그래요, 그럼 희윤 씨도 절 효정 씨라고 불러 주세요.”

“그보다는 선배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앞으로 저를 가르쳐 줄 사람이니 이게 더 적당할 것 같았다.

“그것도 좋고요.”

안효정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희윤이 선뜻 먼저 선배 대접을 해 주니 기분이 좋은 것이었다. 귀찮은 일을 떠맡았다고 생각했는데, 이것도 썩 나쁘지 않은 듯했다.

“희윤 씨, 평소 에스퍼나 가이드에 관심을 좀 가졌었나요?”

“음……. 일반적인 정도로만요.”

본래 세상사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희윤이지만 그래도 이능력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았다. 아무래도 연예인, 스포츠 스타 다음으로 선호하는 직업군이다 보니 알게 모르게 오다가다 들었으니까.

“그래요? 그럼 가장 기초적인 개념부터 공부해야겠네요.”

안효정이 패드 화면을 손가락으로 툭툭 터치할 때마다 화면에 띄운 표가 차곡차곡 글자로 채워져 갔다.

이능력자의 이해, 역사 등등이 적힌 걸 가만 보던 희윤이 물었다.

“혹시 여기서 일하려면 시험도 봐야 하나요?”

돈을 버는 것에 더 신경 쓰느라 학업을 멀리했던 희윤의 낯이 조금 흐려졌다. 시험을 본다면 붙을 자신이 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험이라니. 그런 거 없어요! 본부에서 자격시험 보면 떨어질 에스퍼들 수두룩할걸요?”

안효정이 웃으며 말했다.

“그냥 에스퍼나 가이드를 잘 모르는 것 같아서 알려 주는 거예요. 뭐 사실, 이건 핑계고. 내가 희윤 씨랑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상부에 보고하는 용으로 하는 거죠.”

그렇게 말한 안효정이 “나도 귀찮은데 공무원들이 원래 이래요.” 하고 별로 궁금하지 않은 얘기를 덧붙였다.

“그렇군요.”

희윤은 무심하게 대꾸했다.

“안 웃네. 웃으라는 건데.”

“네?”

어디서 웃으라는 거지? 희윤의 혼란스러운 눈동자를 본 안효정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뇨. 안 웃겼으면 됐고. 음, 어쨌든 좋아요.”

여전히 무슨 소린지는 모르겠는데 화제가 바뀌는 것 같아 희윤은 듣고 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초 공부는 오늘 하루면 될 것 같고. 보자, 그 외에 이론은……. 아, 본인 속성도 아직 파악을 못 했겠구나. 내일은 에스퍼의 원리나 속성에 관한 것도 알려 줘야겠네요.”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어서 희윤은 고개를 애매하게 까닥였다. 원리니 속성이니. 마치 중학생 때 포기한 과학 수업을 듣는 기분이다.

혼자 무어라 말하면서 정리를 마친 안효정이 간략하게 에스퍼와 가이드의 개념을 설명했다.

“에스퍼는 무지막지한 초자연적인 힘을 사용해요. 뭐 속성은 에스퍼마다 다 다른데. 이건 인터넷 찾아보면 많이 나오니까 검색해 보고요. 여하간 그 힘을 사용하다가 보면 에스퍼의 상태가 조금씩 나빠지는데요. 그걸 수치로 표시한 게 안정도예요. 이 안정도가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에스퍼는 능력 제어가 안 되거나 신체 일부에서 여러 반응이 일어나거나 혹은 심리적으로 불안해지죠.”

긴 설명을 잠시 끊은 안효정이 이해했느냐는 듯 희윤을 바라봤다. 희윤은 이해했다는 의미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래서 이 안정도를 적정선에서 유지해야 하는데, 그 역할을 해 주는 게 바로 가이드예요. 이해하기 쉽죠?”

“……네.”

“좋아요. 그럼 기초 이론은 끝!”

이렇게? 분명 하루 정도 걸린다는 거 아니었나. 희윤이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자 안효정이 배시시 웃었다.

“뭐 어차피 일하는데 그런 개념이 크게 필요한 거 아니니까 대충 그 정도만 알아 두면 돼요. 아까도 말했다시피 패드에 적은 건 보고용이고.”

“네.”

가르쳐 주는 사람이 그렇다면야. 희윤으로서는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면 되는 일이다.

“혹시 더 궁금한 건?”

“듣기로 그 가이드와 매칭 테스트라는 걸 해야 한다고 들었거든요. 그게 정확하게 뭔가요?”

“아하. 그거요?”

안효정이 어렵지 않다는 듯 술술 설명을 풀어놓았다.

“아까 말했다시피 가이드는 에스퍼의 능력을 안정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데, 매칭이 좋아야 효율성도 올라가거든요. 그래서 에스퍼와 가이드가 같이 테스트를 받으며 서로의 상성을 확인하는 거죠.”

“그러니까…… 일종의 소개팅 같은 거네요?”

희윤의 물음에 안효정이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소개팅이라니. 뭐 물론 아주 틀린 말은 아닌데.

“소개팅 꽤 해 봤나 보다.”

안효정이 웃음기 띤 목소리로 장난스럽게 물었다.

“아, 아뇨! 한 번도요!”

소개팅은커녕 연애도 제대로 못 해 본 희윤이 손사래까지 치며 부정했다.

“의외네. 학교에서 인기 많았을 것 같은데. 되게 다정하고 성실한 모범생 스타일이거든요. 딱 봤을 때. 그래서 별로 생각이 없었나?”

짓궂은 질문에 희윤은 고개만 도리도리 저었다. 발갛게 변한 귓불을 본 안효정이 그만 놀리고 다시 설명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표해승 가이드. 여긴 무슨 일이에요?”

그러나 뜻밖의 것을 본 안효정의 입에서 나온 건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소리였다. 찌푸려진 안효정의 얼굴을 본 희윤도 뒤를 돌아보았다. 오전에 만난 적 있던 미인이 그곳에 있었다.

눈이 맞닿았다고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해승의 입가에 예쁜 미소가 걸렸다.

“지나가다 말소리가 들려서 들어와 봤어요. 새로운 분은 결국 안효정 에스퍼가 맡기로 했나 봐요?”

분명 안효정에게 말을 거는 것 같은데, 해승의 시선은 계속 희윤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희윤은 미인의 시선에 괜히 귓불이 뜨거워진 것 같아 엄지와 검지로 귀를 살짝 집어 살살 문질렀다.

그 모습을 본 해승의 눈매가 곱게 접혔다.

“네. 그렇게 됐네요. 그럼 표해승 가이드, 이만 자리 비켜 주시겠어요? 보시다시피 교육 중이라서요.”

희윤은 어딘지 모르게 삐딱하게 들리는 안효정의 목소리에 놀라 그녀를 봤다. 기분 탓이 아닌지 모르겠지만 못마땅해하는 듯 보이는 얼굴이었다.

‘사이가 안 좋은가?’

안효정과 해승을 번갈아 보는데 눈이 마주칠 때마다 해승 쪽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미소만 내비칠 뿐이었다.

“네, 그러죠. 그럼 다음에 또 봐요.”

희윤은 팔랑팔랑 손을 흔드는 해승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 모습을 안효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고개를 숙였던 희윤은 알아채지 못했다.

쿵.

소리도 없이 열렸던 문에 닫히자 안효정이 한숨을 쉬었다.

“연희윤 에스퍼.”

아까까지 희윤 씨라고 부르더니 안효정의 호칭에 다시금 각이 잡혔다. 뭔가 중요한 얘기를 하려는 듯 표정도 진지했다.

“네. 선배님, 말씀하세요.”

당연히 희윤도 조금 긴장한 채 그녀가 할 말을 기다렸다.

“외모에 속지 말아요. 물론 쟤랑 연희윤 에스퍼가 엮일 일은 없겠지만. 괜히 엮이면 상처받을 수 있어요.”

“네?”

무슨 소리지. 희윤이 딱 그런 눈으로 안효정을 바라봤다.

‘사실대로 다 털어놓을 수도 없고.’

안효정이 속으로 울분을 토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냥 저건 보기만 좋은, 맛없는 음식이라고 생각하라고요. 아무리 등급 높은 가이드면 뭘 해. 상성이 최악인데. 상성이.”

아무래도 뒷말은 그간 안효정이 차곡차곡 쌓아 둔 불만인 듯하다.

“그뿐인 줄 알아요? 성격은 또 어떻고!”

연이은 폭로에 희윤은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하지만 시선은 이미 사라진 사람을 찾듯 문 쪽으로 향했다.

연예인인 줄 알았는데.

‘가이드였구나.’

인터넷이나 TV와는 연이 없는 만큼 배우니 모델이니 가수니 하는 직종에도 관심이 없던 희윤은 저렇게 눈에 확 띄는 외모를 지닌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어디까지 얘기했죠?”

다시금 화제를 본래대로 돌리는 물음에 희윤도 얼른 정신을 차렸다.

“매칭 테스트는 에스퍼와 가이드의 상성을 알아보기 위한 검사라고요.”

“그랬죠. 아휴. 갑자기 불청객이 끼어들어서 잊었네요. 맞아요. 그렇게 해서 약 30분간 진행이 되는데요…….”

희윤의 말로 어디까지 말했는지 떠올린 안효정이 설명을 이어 갔다. 그러나 정작 희윤은 조금 전 갑작스럽게 왔다가 떠난 사람을 떠올리느라 제대로 듣지 못했다.

“아마 희윤 씨는 오늘 당장 매칭 테스트를 할 수 있을 거예요.”

기나긴 설명을 끝낸 안효정이 패드 화면을 터치하며 희윤 앞으로 배정된 일정을 확인했다.

“음, 지금 가능한 가이드가…….”

매칭 테스트 가이드의 목록을 확인한 안효정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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