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정 씨?”
“어, 아. 희윤 씨, 미안해요. 그…… 아니 잠시만요!”
무어라 말하려던 안효정이 기다려 보라고 말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어딘지 모르게 당황한 것 같기도 하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어이없는 것 같기도 한 복잡한 얼굴이었다.
“연구원님. 이거 대체 뭐예요? 얘가 왜 여기에 있어요!”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안효정이 누군가에게 말을 쏟아 냈다.
“물론 원칙이야 그런데…….”
안효정이 답답하다는 듯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다 기어이 꽥 소리 질렀다.
“표해승 그 자식 진짜!”
그 순간 희윤의 귀가 쫑긋해졌다. 벌써 여러 번 듣는 이름이다. 시선이 절로 통화 중인 안효정에게 향했다.
“연구원님한테 화내는 건 아니고요. 네, 알겠어요. 그 자식을 누가 이기겠어요. 그 대단한 수호 그룹 회장도 이겨 먹는 놈을. 근데 오늘 처음 온 에스퍼한테 S급은…… 어어. 연구원님! 야! 이……!”
안효정이 통화가 끊어진 핸드폰을 노려보며 화를 냈다. 욕이라도 퍼부어 주려다 가까스로 이 자리에 희윤이 있다는 걸 떠올리고 내리눌렀다.
“무슨 일 생겼어요?”
“아니요, 그냥 뭔가 좀 착오가 있는 것 같아서 확인 좀 했어요.”
안효정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희윤의 둥그런 갈색 눈동자를 보고는 안타까운 눈빛을 하고 말았다.
“어쨌든 매칭 테스트 가능한 가이드가 지금 있긴 있네요.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지만. 당장 된다고 하니까 이동할까요?”
“네.”
희윤은 아무런 걱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조차 애잔하게 보여 안효정은 속으로 쯧쯧 혀를 찼다.
둘은 교육실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안효정은 센터의 구조를 간략하게 알려 주었다.
“센터는 총 20층으로 되어 있어요. 1층, 2층은 각종 편의 시설과 식당, 카페가 있고요. 3층은 구내식당, 4층부터 5층은 행정팀과 총무팀 등 각종 지원에 필요한 부서.”
6층은 검사실, 7층부터 9층은 공동 의료센터, 10층과 11층은 가이딩실, 12층은 가이드 사무실로 전부 쓰고, 13층은 교육실과 회의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에스퍼가 사용하는 층은 14층부터 18층이며, 14층엔 신고 접수팀, 현장 조사팀 등 외부와 일하는 에스퍼 사무실, 15층부터 18층까지는 내근직 에스퍼들이 근무한다고 했다. 그 위부터는 임원진 사무실이라 빠르게 설명했다.
희윤은 엘리베이터에 붙어 있는 층별 안내도를 훑으며 머릿속에 차곡차곡 정리했다.
“훈련장은 지하에 있는데 가이드 전용과 에스퍼 전용으로 가상공간 시뮬레이션 룸이 포함되어 있어요. 일반 사원용은 따로 분리되어 있고요.”
“가상공간 시뮬레이션이요?”
“네. 거긴 희윤 씨한테 담당 가이드가 배정되면 본격적으로 훈련할 때 이용하면 되고, 다음 주에는 일단 간단한 능력 구현법을 배울 거예요.”
“네.”
희윤이 고개를 끄덕이던 것과 동시에 엘리베이터가 멈추며 문이 열렸다.
“갈까요?”
안효정이 먼저 내리고 희윤이 뒤를 따랐다. 늦은 오후여서인지 복도를 채우는 볕이 좀 더 비스듬해져 있었다.
희윤은 저도 모르게 안효정의 앞쪽을 힐끔거렸다. 오전에 로비에서 햇살을 받으며 서 있던 미인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번에는 그 앞에 아무도 없었다.
그사이 목적지에 도착한 안효정이 똑똑 문을 두드렸다.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안에는 흰 가운을 입은 연구원과 야상 점퍼에 검은 셔츠를 받쳐 입은 미인이 있었다. 둘 다 낯익었지만, 희윤의 시선은 해승에게로 고정됐다.
“또 만났네요?”
해승이 웃으며 손을 들어 보였다. 희윤은 고개만 꾸벅 숙였다가 들었다. 숫기 없는 반응에도 해승의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연희윤 에스퍼. 우리도 구면이죠?”
희윤이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심층 검사 때 담당했던 연구원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쪽은…….”
연구원이 해승을 소개하려고 그쪽을 봤다.
“표해승이에요. 아까 인사했었죠?”
하지만 연구원의 뒷말보다 해승이 입을 여는 게 더 빨랐다. 희윤은 제 앞에 있는 가지런한 손을 내려다봤다.
‘아까도 악수했는데. 또? 악수 진짜 좋아하나 보다.’
그렇게 별생각 없이 희윤이 해승의 손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희윤 씨. 테스트는 안쪽 검사실에서 할 거예요. 들어가세요.”
외부인처럼 서 있던 안효정이 불쑥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더니 희윤의 등을 쓱 밀었다. 졸지에 악수를 가로막힌 해승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희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대신 해승의 심기를 눈치챈 연구원이 곤란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검사할 거잖아요. 가 보세요, 표해승 가이드.”
희윤이 먼저 검사실로 걸음을 옮겼고, 안효정이 마치 보호자라도 되는 양 뒤를 따랐다. 잠시 후 해승도 안으로 들어갔다.
“희윤 씨. 그렇게 아무 가이드의 손이나 덥석덥석 잡는 거 아니에요.”
해승이 들어갔을 때 안에서 기막힌 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모든 가이드가 그런 건 아닌데. 가끔 무례하게 가이딩하는 가이드가 있거든요. 상성이 맞지 않는 가이드한테 그런 일 당하면 얼마나 기분이 더러운데요.”
척 들어도 저를 겨냥한 소리라는 걸 해승은 알아차렸다. 기감이 뛰어난 에스퍼가 자신이 들어온 걸 모를 리 없었다.
그러니 이 타이밍에 저런 말을 하는 건 고의라는 소리다.
어디 무슨 말을 더 하나 들어 볼까.
해승이 삐딱하게 웃으며 팔짱을 끼던 그때.
“괜찮던데요.”
담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등을 보이고 선 안효정이 아니라 침대에 걸터앉은 희윤이 한 말이었다.
“희윤 씨?”
“음, 아니에요. 그냥…….”
희윤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는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고작 악수하는 게 가이딩이라고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안효정의 말을 듣고 보니 처음 해승과 만나 악수했을 때 느꼈던 감각이 아무래도 가이딩이었나 보다.
그때를 떠올려 보면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도리어 어렸을 적 부모님과 함께 계곡에 놀러 가 맑게 흐르는 물에 손을 담갔을 때와 비슷한 청량한 기분이 느껴졌을 뿐.
“안효정 에스퍼. 이만 나가 주시죠.”
갑작스럽게 들려온 소리에 희윤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런. 벌써 왔어요?”
안효정은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희윤만 혹시 해승이 기분이 나쁠까 눈치를 봤다.
“뭐 상성이 안 맞으면 그럴 수 있죠. 근데 그건 안효정 에스퍼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네요.”
“그걸 표해승 가이드가 어떻게 장담해요?”
해승은 너 알아서 생각하라는 듯 어깨만 으쓱했다.
- 검사 시작하겠습니다. 안효정 에스퍼님 밖으로 나와 주세요. 연희윤 에스퍼와 표해승 가이드는 침대에서 적당히 접촉한 상태로 대기해 주시고요.
안효정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검사실을 나서고, 안에는 둘만 남았다. 괜히 어색해진 기분이 희윤이 목뒤를 손바닥으로 쓱 문질렀다.
적당한 접촉이라니.
뭔가 묘한 느낌이 드는 단어 선정이 아닐 수 없다. 설명을 들었을 때는 손만 잡으면 된다고 했는데.
“눕는 게 편해요?”
그때 해승이 성큼성큼 다가오며 물었다. 희윤이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바라보니 긴 팔이 쭉 뻗어 왔다.
“하긴, 30분이나 걸리는데 손만 잡는 건 불편하죠? 나도 그래요.”
“네?”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희윤의 눈이 해승의 다음 행동에 더욱 커졌다.
“어어?”
해승이 희윤의 어깨를 붙들어 뒤로 밀더니 그대로 침대에 무릎을 얹고 상체를 기울이고 있었다. 졸지에 침대에 등을 댄 희윤의 위로 해승이 덮치듯 올라탔다.
- 야! 표해승! 당장 안 떨어져?
스피커에 안효정의 카랑카랑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희윤은 헉 소리를 내며 제 위에 덮인 몸을 휙 밀었다. 해승의 고운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아…….”
“아프세요? 미안합니다.”
희윤이 당황해 해승을 살폈다.
“괜찮아요. 당황하면 그럴 수 있죠.”
떠밀린 부분을 살살 문지르며 해승이 말했다. 도리어 그게 희윤에게 죄책감을 불러왔다.
“아니에요. 제가 각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자각이 부족하다 보니…….”
“네. 앞으로 조심해 주세요. 그럼 되죠.”
예쁘게 웃는 얼굴을 보니 더욱 미안해진 희윤이 고개를 수그렸다. 덕분에 재미있다는 듯 눈을 반짝이는 해승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저, 손잡아도 될까요?”
희윤이 먼저 권했다. 해승은 그런 에스퍼를 가만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난은 이쯤에서 그만두고 검사를 하긴 해야 했다. 그도 매칭 테스트 결과가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으니까.
“손잡는 게 편해요?”
“네?”
“아까 연구원님이 그랬잖아요. 적당한 접촉이라고.”
기분 탓인가. 왜인지 눈앞에 있는 미인이 적당한 접촉이라는 말에 유독 강세를 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살살 웃는 얼굴 때문에 스르륵 사라졌다. 아니 그보다는 다시금 제게 접근해 오는 존재 때문에 잊어버렸다는 게 정확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에 선 해승이 고개를 숙였다. 희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침만 꼴깍 삼켰다.
해승의 입술이 가까워져 온다. 왜 시선이 붉고 말랑한 표면으로 향하는 모르겠다.
또 꼴깍.
침 삼키는 소리가 제 귀에 유독 크게 울리는 것 같다.
그때 닿을 듯 말 듯 다가온 해승의 입술이 열렸다.
“뭐 다른 것도 얼마든 가능하지만.”
저도 모르게 해승의 입술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희윤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곧이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해승이 몸을 뒤로 물리더니 마치 지금까지 일은 모른다는 듯 침대를 짚고 있던 희윤의 손을 가지고 갔다.
“오늘은 손만 잡고 해 보죠.”
희윤은 붙들린 손과 웃고 있는 해승을 번갈아 봤다. 하나는 알 것 같다.
저 미인 가이드가 짓궂다는 것을.
“어떻게 돼 가고 있어?”
닫힌 문이 열리면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효정과 연구원의 고개가 동시에 뒤로 향했다. 지부장이었다.
“이제 막 시작했어요.”
“어떻게 되긴요. 분명 20% 이하로 나오겠지.”
연구원과 안효정이 차례대로 대답했다. 지부장은 안효정의 까칠한 말투에 쯧쯧 혀를 차면서도 ‘하긴 그렇지.’ 하는 얼굴로 모니터를 봤다.
화면에는 연희윤과 표해승의 이름, 능력치 아래에 숫자가 변하고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일단 10%는 넘겼군.”
“오……. 그러네요.”
지부장의 말에 다시금 모니터로 관심을 돌린 연구원이 턱을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표해승 가이드. 최근 검사하는 중에 10% 넘긴 건 없지 않았어요? 어? 20% 통과했네요.”
그사이 매칭률은 다시금 달라졌다. 안효정과 연구원, 지부장의 시선이 전부 빠르게 변하는 수치에 몰렸다.
더디기는 해도 숫자는 꾸준히 상승해갔다. 그리고 보통 유의미한 지표가 나오는 20분을 지나자 어느 순간에는 가파른 속도로 치솟기 시작했다.
31%…… 44%…….
매칭률은 가이드가 가진 기운의 질량뿐만 아니라 에스퍼와의 상성까지 잘 맞아서 떨어졌을 때 높은 수치를 보인다.
아무리 등급이 높은 가이드와 에스퍼여도 매칭률이 50% 이하면 가이딩 효율이 떨어져 사실상 담당 가이드로 배정되지 않는 것이다.
“헉.”
급기야 50%를 넘어 버린 매칭률을 확인한 연구원이 헛바람을 삼켰다. 지부장의 표정도 한결 진지해졌다.
50%…… 53%…….
“표해승. 저 수치 나온 거 처음이죠? 그때 S급 바람 속성이랑도 51%가 최고치였던 것 같은데…….”
안효정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모니터를 봤다.
“그렇지.”
지부장이 고개를 끄덕이던 그때였다.
“허억!”
연구원이 숨이 넘어갈 듯한 소리를 내뱉었다. 지부장의 눈매도 큼지막해졌고, 안효정도 입을 떡 벌렸다.
67%…… 75%…… 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