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85)

“뭐 먹고 싶어요?”

순식간에 해승에 의해 지하 주차장까지 끌려와 조수석에 앉게 된 희윤이 고개를 돌렸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하는 맹한 얼굴을 본 해승이 빙긋 웃었다.

“음……. 뭐, 제가 알아서 갈게요. 희윤 형, 벨트 매세요.”

“어? 응.”

희윤이 벨트 매는 걸 지켜본 해승이 그제야 차를 출발시켰다. 고급스러운 SUV가 부드럽게 주차장을 벗어났다.

해승이 희윤을 끌고 간 곳은 한눈에 보기에도 아주 고급스러운 느낌이 폴폴 풍기는 식당이었다.

“들어가죠.”

고풍스러운 한옥을 멀거니 보기만 하는 희윤의 손목을 잡고 해승이 앞으로 걸어갔다. 자연히 해승에게 붙들린 희윤도 그 뒤를 따랐다.

“어서 오십시오. 표해승 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오늘은 두 분이신가요?”

일찌감치 입구에서 기다리던 종업원이 웃으며 인사를 전했다. 해승은 대답도 없이 고개만 까닥였고, 그의 옆에 선 희윤은 어설프게 꾸벅 인사했다.

종업원은 불쾌한 빛 하나 없이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항상 이용하시는 조용한 개인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번에도 해승은 대꾸하지 않은 채, 희윤을 이끌고 종업원을 따라갔다. 그리고 안내받은 곳에 도착했을 때, 희윤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개인실이라더니. 이게 어딜 봐서…….’

앞에 커다란 정자가 떡하니 있었다. 정자 주변은 아담한 연못이 있고, 홍예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었다.

종업원은 두 사람을 정자 안 스무 명은 넉넉히 앉을 수 있을 식탁으로 안내했다.

“그럼 필요하실 때 불러 주십시오.”

해승과 희윤이 앉을 때까지 기다리던 종업원이 허리까지 숙이며 말했다. 얼떨떨하게 희윤이 마주 머리를 꾸벅였을 땐, 종업원은 사라지고 없었다.

“여기 대체 뭐 하는 곳이야?”

희윤이 테이블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밥 먹는 곳이죠.”

뭐 특별한 게 있냐는 듯 해승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리고 희윤의 앞에 가죽 덮개로 된 메뉴판을 쓱 내밀어 주었다.

“골라 보세요. 매, 난, 국, 죽 네 가지 코스로 되어 있는데 조금씩 구성이 다르니까.”

얼떨결에 메뉴판을 받아 든 희윤이 내용을 확인했다. 해승이 말했던 대로 코스별로 무슨 음식이 나온다는 설명이 친절히 적혀 있었다.

얼마나 친절하냐면 코스마다 한 장씩 설명이 나열되어 있을 정도로.

덕분에 희윤은 이게 대체 얼마짜리 코스 요리인지는 생각도 못 하고 신기한 눈으로 메뉴를 살펴보았다. 매는 육류 위주로, 난은 해산물, 국은 두 가지가 혼합, 죽은 신기하게 전부 채식이었다.

“고르기 힘들어요?”

“응. 전부 맛있어 보이네.”

“그럼 국 코스로 주문할게요. 골고루 나오니까.”

“그래.”

희윤이 고개를 끄덕이자, 해승도 생긋 웃으며 식탁에 부착된 벨을 눌렀다.

딸랑딸랑.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종업원이 다시 나타났다. 해승은 희윤에게 줬던 메뉴판을 종업원에게 건네며 주문했다.

희윤은 그런 해승을 보며 이 장소가 그에게 참 잘 어울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뭔가 고풍스럽고 단아한 느낌이라고 할까.

한복까지 입혀 놓으면 완벽하겠는데.

“왜요?”

“아. 아니. 별거 아냐.”

너무 넋을 놓았나 보다. 희윤은 해승의 의문 섞인 얼굴에 화들짝 놀라 손사래를 치고 얼른 고개를 돌렸다.

차마 널 상상하느라 그랬다고 말할 수 없었으니까.

볕에 비치는 희윤의 귀 끝이 붉다. 해승은 그걸 어렵지 않게 알아차리고 소리 없이 웃었다.

“식사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난 종업원은 빠르고 정확한 손놀림으로 식탁 가득 음식을 차렸다. 희윤은 끊임없이 자리를 비집고 놓이는 그릇들을 입을 떡 벌린 채 보았다.

“뭐가 이렇게 많아?”

저도 모르게 묻자 여전히 바쁘게 식탁을 채우던 종업원이 미소 지으며 말하려 했다.

“원래는 코스로 나와요. 근데 계속 나오는 건 귀찮잖아요. 그래서 전부 한꺼번에 가져다 달라고 했어요.”

그러나 그보다 해승이 희윤의 물음에 답하는 게 먼저였다.

“그럼 식사 맛있게 하시고, 필요한 게 있으면 호출해 주세요.”

종업원은 눈치 빠르게 상차림을 마치고 물러갔다. 둘만 남게 되자 해승이 눈을 접어 웃으며 희윤에게 권했다.

“드세요.”

거짓말 안 하고 30여 종은 될 법한 음식을 눈에 담은 희윤은 제대로 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섣불리 젓가락을 가지고 갈 수도 없었다. 아까 이곳에 오자마자 느꼈던 고급스럽고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식탁에 차려진 음식에도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젓가락 대기도 미안하네.’

잘못 집으면 지금의 완벽한 조형미를 망칠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섣불리 젓가락을 가져다 대지 못하고 망설이는 희윤과 달리 해승은 원하는 음식을 척척 앞접시로 옮겼다.

그릇 위에는 나물이나 채소류는 하나도 없이 온갖 고기만 수북했다.

“자요.”

“응?”

“일단 드세요.”

희윤은 제 앞에 쓱 놓인 개인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소, 돼지, 닭, 오리. 볶음, 구이, 산적 등 다양한 종류로 변신한 고기들이 눈에 보였다. 희윤의 시선이 맞은편에 앉은 해승에게 향했다.

“오늘 능력 많이 썼으니까 든든하게 먹어야죠.”

눈이 마주치자 해승이 또 생긋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근데…….”

이건 많은 것 같은데. 평소에도 희윤은 성인 남성 평균 식사량보다는 다소 적은 편이었다. 사실 식사라고 할 것도 없었다. 보통 희윤은 매끼 대충 때울 때가 많았으니까.

제일 만만한 컵라면, 김밥 한 줄, 삼각김밥, 편의점표 빵. 그도 안 되면 에너지바나 우유 한 팩이나 두유 등등.

“자. 이것도요.”

말을 다 맺기도 전에 또 앞에 산처럼 음식이 쌓인 접시가 놓였다. 대체 언제 제 앞접시는 가지고 간 걸까.

아까는 온통 고기 천지더니 이번엔 다양한 반찬 일색이다. 김치부터 시작해서 나물 종류와 장아찌류가 올라가 있었다.

“너무 많은데.”

“이게요?”

희윤의 말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해승이 앞접시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다시 마주쳐 오는 눈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의미의 눈빛이 담겨 있었다.

“얼른 먹어요. 이 정도는 먹어야죠. 다 먹고 나면 더 덜어 드릴게요.”

엄살 부리는 아이를 대하듯 말한 해승의 재촉에 희윤은 어쩔 수 없이 훈제 오리부터 집어 보았다. 다 먹고 나면 더 주겠다는 무시무시한 말에 입을 움직이는 건 느릿느릿했다.

“배…… 배불러.”

그렇게 시작한 식사는 1시간이 넘어가도록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원래는 10분이면 후다닥 먹어 버리고 일을 할 희윤이었다.

접시가 비면 도로 채우는 해승 때문에 젓가락을 내려놓지도 못했다. 그뿐인가. 입도 계속 움직여야 했다.

이제는 배가 찢어지는 게 아닐까 걱정마저 되는 판.

희윤은 결국 젓가락을 내려놓고 두 손바닥을 척 보이며 항복을 선언했다. 해승이 그런 희윤을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형, 진짜 식사량 얼마 안 되네요. 어떻게 그것만 먹고 배가 부르다는 소리를 할 수 있어요?”

“아니…… 그러는 해승 씨, 아니 해승이 넌!”

넌 얼마나 먹었느냐고. 희윤은 따지기 위해서 맞은편 자리를 건너봤다. 그리고 더 말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분명 나 챙겨 주느라 식사도 못 한 것 같았는데…….’

해승의 앞에는 어느새 밥공기만 네 개가 쌓여 있었다. 그리고 식탁은 희윤이 혼자 먹었다고 할 수 없을 만큼 해승의 앞자리의 그릇은 대부분 깔끔하게 비어 있었다.

“형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다행히 금세 물러서는 듯한 말에 희윤은 안심했다. 그것도 다시 들어온 종업원에게 해승이 주문하는 걸 듣고 착각이란 걸 알았지만.

“과일이랑 디저트 푸짐하게 가져다주세요.”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둘의 대화를 들은 희윤이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로 일어났다.

빈 접시와 그릇이 치워지고 깨끗하게 닦인 식탁에 이번엔 달고 새콤하고 군침 도는 과일부터 알록달록 다양한 종류의 쿠키와 케이크, 차와 주스 등으로 도배되었다.

분명 아까 배가 불러서 못 먹을 거라 생각했는데 웬걸. 평소에는 쉽게 접하기 어려운 것들이 눈에 보이자 절로 군침이 돌았다.

“드세요.”

희윤의 상태를 눈치 빠르게 알아챈 해승이 권했다. 희윤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 윤이 반짝반짝 나는 딸기에 포크를 가져갔다.

그리고 아까와 비슷한 일이 또 일어났다. 잠시 차려진 디저트를 구경하는 사이 제 앞으로 옹기종기 모여든 것들을 보며 희윤이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먹으면 배탈 날지도 몰라.”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곧바로 의사 불러올 테니까.”

이상한 말이 들린 것 같다. 희윤은 해사한 얼굴로 앉은 해승을 바라보았다. 본인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나?

“왜요?”

“아니. 적당히 먹을게.”

보통 아프다고 하면 약을 사 온다거나 병원에 가자고 하지 않나. 아마 그렇게 말하려다가 잘못 말한 거일 터다.

정말 의사를 데리고 오지는 않겠지.

애써 그렇게 제가 착각한 거라고 생각하며 희윤은 부지런히 디저트를 먹었다.

접시 하나를 다 비우니 정말로 숨까지 쉬기 어려워졌다. 할딱할딱. 호흡하는 희윤을 보며 해승이 한숨을 쉬었다.

“희윤 형은 말라서 먹기라도 잘해야 하는데. 앞으로는 꼭 나랑 밥 먹어요.”

해승의 말에 희윤이 얼른 대답했다.

“오늘처럼 먹는 거 아니면! 이렇게 먹으면 진짜 탈 날지 몰라.”

“뭐. 형이 아프면 나야 좋지.”

그럼 핑곗김에 오후에 있을 테스트도 안 받을 테니까. 해승이 웃으며 말했다. 물론 뒷말은 희윤에게는 들리지 않게 작게.

“뭐?”

“아니에요. 별말 안 했어. 이만 일어날까요?”

해승은 어리둥절하게 보는 희윤에게 친절한 미소만을 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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