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윤은 해승의 차를 타고 30분 정도 드라이브를 했다. 달리는 차 안에서 도시 풍경을 보는 건 색다른 기분이었다.
“이렇게 서울 구경한 거 처음이야.”
본부로 돌아가는 길, 희윤이 말했다.
“그래요? 하긴 원래 가까운 데는 잘 안 다니게 되죠.”
해승이 이해할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차량의 방향을 바꿨다.
“응. 그렇기도 하고. 일하느라…….”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고. 희윤은 뒷말을 들릴 듯 말 듯 끝맺었다. 드라이브하면서 꺼내기에는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긴 저도 그래요. 사실 서울을 거의 벗어난 적 없어요.”
“너도?”
희윤이 운전석에 앉은 해승을 돌아봤다. 해승이 핸들을 부드럽게 돌리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귀한 몸이잖아요.”
혹시 어디 다른 나라에서 스카우트해갈까 봐 그랬다는 말은 해승은 굳이 하지 않았다.
“아……. 그래도, 그런.”
저야 생활에 여유가 없으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해승은 다르다. 이제 고작 스물셋. 한창 친구도 만나고 놀러 다닐 때인데.
“너무하네…….”
8살 어린 나이에 가이드로 각성해 성인이 될 때까지 본부에 매여 있다니. 아무리 국내에 유일한 S급이라도 해도. 대우가 너무 심한 게 아닌가.
해승은 저보다 저 분해하는 희윤을 물끄러미 보다 신호가 녹색으로 바뀐 걸 보고 차를 움직였다.
“나랑 다니자.”
본부의 푸른색 건물이 막 눈에 들어오던 순간. 조용하던 희윤의 입이 다시 열렸다. 앞을 보고 있는데, 볼에 시선이 느껴졌다.
애써 돌아보지 않고 말을 덧붙였다.
“거, 거창한 거 말고. 그냥…… 지금처럼 가끔 밥 먹고, 어디 잠깐 가고……. 물론, 너만 괜찮다면!”
하고 싶은 얘기를 쉬지 않고 꺼내고 나니 너무 오버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윤은 그제야 슬쩍 운전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앗.”
이미 이쪽을 보고 있던 해승과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예쁜 얼굴에 그보다 더 홀릴 듯한 미소가 피어나는 게 보였다.
“좋아요. 형, 약속 꼭 지켜요.”
“으응.”
다행이다. 충동적으로 꺼낸 말인데. 희윤은 또 온도가 달라진 듯한 제 귀를 살그머니 만지며 속으로 말했다.
어느덧 차는 본부 지하 주차장에 들어서고 있었다.
* *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을 때, 희윤과 해승에게 여러 시선이 모여들었다. 물론 대놓고 보는 건 아니었지만 눈치가 좋고, 본부에 오래 있던 해승이 이를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형, 곧바로 EST실로 가세요?”
해승은 희윤 모르게 주변을 쓱 둘러보며 말을 걸었다. 그와 눈을 마주친 몇몇이 황급히 모습을 감추는 게 보였다.
“EST?”
상황을 모르는 희윤이 낯선 단어에 고개를 갸웃했다.
“6층 가시는 거 아니에요?”
“응. 맞아.”
착실히 대꾸하면서도 희윤은 여전히 의문 섞인 눈을 했다.
“EST는 Esper Synastry Test의 약자예요. 말 그대로 에스퍼와 가이드의 궁합이 잘 맞는지 검사하는 곳.”
그 눈빛을 어렵지 않게 알아챈 해승이 설명했다. 그러다 생긋 웃으며 뒷말을 덧붙였다.
“그런 곳에서 형이랑 내 궁합이 좋다는 걸 증명한 거죠.”
“뭐?”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아니에요? 89%잖아요.”
다른 생각을 하느라 잠시 해승이 한 말을 되짚던 희윤의 귀가 살짝 붉어졌다. 궁합이라니. 해승이 그런 말을 하니 더 묘하게 느껴진다.
“어쨌든 타세요. 같이 가요.”
어느새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있었다. 해승이 버튼을 눌러 문이 닫히는 걸 막고 말했다.
“아냐. 너 바쁜데 뭐 하러. 나 혼자 가도 돼.”
설마 또 매칭 테스트하는 내내 지켜보는 건가 해서 희윤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저 안 바빠요.”
그러나 해승은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냐. 안 그래도 되는데…….”
희윤이 포기 못 하고 해승의 배려를 한 번 더 거절하려 했다. 그때 마침 희윤의 스마트폰 알림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하니 안효정이었다.
“네, 선배님.”
- 해승 씨. 어디예요?
“지금 본부 1층이요.”
- 얼른 와요.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
“아, 네! 지금 바로 갈게요.”
안효정의 재촉에 희윤은 결국 해승을 대동한 채 6층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희윤의 곁에 선 해승을 본 안효정이 얼굴을 파삭 구겼다.
“왜 같이 와.”
“지금 막 들어왔어요.”
희윤이 왜 그런 걸 묻느냐는 얼굴로 대꾸했다.
그걸 몰라서 묻는 게 아니잖아. 왜 저 녀석을 여기까지 끌고 왔느냐고. 안효정의 눈빛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희윤은 알아차리지 못했고, 해승은 그저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 모습이 얄밉게 보여 안효정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표해승 가이드. 아까 지부장님이 찾던데 연락 가지 않았어요?”
“그래요?”
해승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점심을 먹고, 드라이브하는 내내 무음으로 해 두고 아예 액정을 뒤집어 두었기에 알아차리지도 못하긴 했다.
물론 굳이 확인해 보지 않은 것도 있지만.
“얼른 가.”
“흠…….”
안효정이 손까지 내저으며 쫓으려 하자 해승이 못마땅한 듯 눈을 살짝 찌푸렸다. 그 모습조차 참 예쁘다고 생각하며 희윤이 입을 열었다.
“지부장님 호출이면 중요한 일 아냐? 난 신경 쓰지 말고 가 봐.”
“알았어요. 그럼 희윤 형. 끝나고 연락해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만 속아 주겠다는 듯한 눈으로 해승이 말했다. 희윤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자요.”
희윤의 시선이 제 앞에 있는 스마트폰을 멀뚱히 봤다. 최신 기종이 반짝반짝하게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러다 눈을 들어 해승과 마주했다.
“번호 찍어 주세요.”
“아…….”
그제야 희윤은 제가 해승의 번호도 모른다는 걸 알아차렸다. 서둘러 번호를 입력했더니 해승이 도로 스마트폰을 거두어 갔다.
발랄한 음악이 복도에 울렸다.
“앗!”
졸지에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희윤이 당황한 얼굴로 얼른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곳에서 쿵작쿵작 멜로디가 흐르고 있었다.
“희윤 씨 뭔가 음악 취향이 되게 의외네.”
후다닥 해승의 번호를 저장하고 고개를 들던 희윤은 안효정의 그 말에 귀를 붉혔다.
“트로트 좋아하는구나. 잔잔한 발라드나 고상한 클래식 같은 거 들을 것 같은 외모인데.”
안효정이 어딜 봐서 자신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음악에 관해서는 할 말이 있다.
“같이 일하는 여사님이 좋아하는 곡이라고 설정해 주셨어요.”
희윤이 스마트폰을 조물조물 만졌다. 오래 사용한 액정 끝에는 조그만 금이 가 있었다.
“같이 일하는 여사님?”
“네. 밀키트 포장하는 아르바이트를…….”
착실하게 대꾸하던 희윤이 말을 흐렸다. 그 이상은 너무 쓸데없는 설명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것도 했어?”
안효정은 고생했다는 눈빛을 했다. 희윤은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가 눈을 찌푸리고 있는 해승과 마주쳤다.
“형, 끝나고 연락해요.”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려다 툭 하니 들려온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은데 물어봐도 알려 주지 않을 것 같았다.
“응.”
해승은 그러고도 또 뭔가 말하려고 입술을 열다 가볍게 혀를 차더니 휙 몸을 돌렸다. 뒤에서 희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돌아보지 않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뭔가 기분이 나쁜데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그대로 지부장실이 있는 최상층에 올라왔다. 비서가 해승을 보더니 재빨리 전화를 들어 연락하는 게 보였다.
해승은 기다리지 않고 곧장 지부장실 문을 벌컥 열어 버렸다. 책상에 앉아 전화를 받고 있던 지부장이 해승을 보더니, 한숨을 쉬며 귀에 대고 있던 스마트폰을 뗐다.
“왜 불렀어요?”
“일단 앉아.”
지부장이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해승은 불퉁한 얼굴로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눈빛으로 얼른 용건을 말하라며 재촉했다.
지부장은 다시금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해승의 맞은편에 엉덩이를 내렸다.
“어디 갔다 왔어.”
“점심 먹고 왔죠.”
“연희윤 에스퍼랑?”
“알면서 뭘 물어봐요.”
“흠……. 설마 또 검사하는 데까지 따라간 건 아니지?”
해승은 대꾸도 안 했다. 대신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냐는 시선만 돌아왔다. 지부장이 혀를 차며 못마땅한 티를 팍팍 냈다.
“다른 가이드들이 너 때문에 부담돼서 연희윤 에스퍼랑 매칭 테스트 못 하겠단다.”
“그러니까 왜 자꾸 테스트를 시켜요.”
지부장은 이번엔 대꾸도 안 하고 눈썹만 거세게 까딱였다.
“나 내 거에 손 타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해승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 희윤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연희윤 에스퍼가 왜 네 거야?”
“매칭률. 저 이상 나올 확률 없잖아요?”
“그거야 모르지. 아직 반 남았는데.”
“흐음……. 그럴 리 없을 텐데.”
확신에 찬 말에 지부장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네가 어떻게 장담해.”
해승의 검은 눈이 반짝 빛난다.
“봐요, 지부장님. 15년이에요. 그간 저랑 매칭해서 60%를 넘긴 에스퍼도 없었잖아요. 그런데 무려 89%란 말이죠.”
그 말에 지부장은 이번엔 입술까지 찡그렸다.
“그러니까 연희윤 에스퍼도 그럴 거라고?”
뭘 얼마나 대단한 추론인가 했더니. 고작 제 경험에 비추어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거다.
“그럼요. 내가 장담한다니까? 그러니 괜한 시간 쓰지 말아요.”
“그럼 뭐 전담이라도 맺겠다는 거야?”
해승이 그 말에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그러더니 뭘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듯 대꾸했다.
“아뇨? 내가 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