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85)

저녁으로 먹은 회가 전부 소화되고, 도리어 살살 허기가 밀려올 때쯤에야 희윤은 모니터에서 눈을 뗄 수 있었다.

화면에는 한 페이지도 안 되는 분량으로 오늘 벌어진 일에 관한 보고와 앞으로 다시는 경거망동하지 않겠다는 반성이 적혀 있었다.

“다 했어요?”

멍하니 제가 작성한 문서를 보고 있던 희윤이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부터 향긋한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더니 해승이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그는 다른 손으로 스마트폰을 든 채였는데, 액정이 밝았다. 아마 지루한 시간을 인터넷이라도 하면서 보냈나 보다.

“응.”

사실 희윤은 반성문 쓰는 데에 익숙했다. 말없이 학교에 자주 빠진 데다, 학교에 가더라도 학업 태도가 불성실하다고 선생님들께 자주 붙잡혀 반성문 쓰기 일쑤였으니까.

문제는 희윤이 한 번도 컴퓨터로 반성문을 작성해 본 적이 없다는 것. 그래서 처음엔 수기로 쓰려고 했다. 그런데 그런 희윤을 본 해승이 문서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작성하는 법까지 알려 주었다.

덕분에 희윤은 익숙하지도 않은 타자를 떠듬떠듬 치느라고 이렇게 오래 걸려 버린 거다.

“오, 우리 형. 보고서 작성도 잘하네.”

해성이 아무렇지도 않게 부끄러운 칭찬을 해 왔다. 희윤은 제가 쓴 글을 한 번 더 읽어 봤다. 고작 열 줄은 될까. 괜한 민망함에 희윤이 만지작만지작한 귀는 살짝 붉어져 있었다.

“그럼 이제 갈까요?”

해승이 잠시 희윤의 귀를 보다가 시선을 치우며 말했다.

“그래.”

희윤은 대답하면서 해승을 봤다.

“제가 프린트할게요.”

그 눈빛에서 도움을 읽어 낸 해승이 생긋 웃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희윤의 곁으로 다가왔다.

“…….”

해승의 허리가 살짝 굽으며 자연히 상반신이 가까워졌다. 희윤은 갑작스럽게 가까워진 거리에 움찔했다.

“이거 보이죠? 이렇게 누르면 저장되고, 그 옆에 이거 누르면 이런 화면이 나와요. 그러면 여기, 이 인쇄라고 쓰인 버튼 누르면 돼요.”

해승은 희윤의 상태를 모르는지 문서를 저장하는 법부터 인쇄하는 방법까지 차례로 설명했다.

“그럼 저쪽에 프린터로 나올 거예요.”

해승이 이번에는 희윤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다른 팔로 사무실 한쪽을 가리켰다.

지이잉.

때마침 프린터에서 종이가 나오는 게 눈에 들어왔다.

“잠시만요.”

해승이 그렇게 말하며 프린터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성큼성큼 걷는 뒷모습은 세련된 분위기를 풍겼다.

해승의 패션은 매일 비슷했다. 티셔츠에 청바지, 그리고 그 위에 가볍게 툭 걸치는 야상. 그야말로 그 또래가 편히 입을 만한 복장이었다.

그런데도 유독 시선을 끄는 이유는.

“자요.”

희윤은 멀거니 제 앞에 있는 손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종이를 받아 들었다.

“고마워.”

“뭘요. 그럼 얼른 제출하러 가죠.”

희윤의 멍한 시선을 알아채지 못한 듯 해승이 다시금 미소를 띠며 말했다. 희윤은 고개만 끄덕이고 얼른 일어섰다.

어쩐지 귓가가 또 뜨거워진 것 같았다. 일단 지금 이곳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지부장실에 경위서를 제출하러 갔더니 이미 사무실은 빈 채였다. 희윤이 우왕좌왕하자 해승은 경위서를 비서의 책상에 툭 내려놓았다. 그쪽도 주인이 없는 건 마찬가지인데 거리낌은 없었다.

“가요.”

저렇게 두고 가도 되는 걸까. 고민하는 희윤에게 해승이 말했다.

“괜찮아요. 내일 출근하면 바로 전달하겠죠. 불안하면 지부장님께 미리 메시지라도 보내 둘까요?”

“아, 아냐. 그럴 것까진…….”

이미 퇴근까지 한 까마득한 상사에게 제 경위서를 잘 챙기라고 연락을 한다니. 해승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희윤의 손목을 잡았다.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희윤은 아까 자신의 어깨에 손이 올라왔을 때처럼 이번에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일이다.

“형, 이제 집으로 가죠?”

“응. 그래야지.”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이 늦었다. 희윤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나 때문에 너무 늦었다. 얼른 들어가 봐.”

이제는 더 그를 붙잡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집은 어느 방향이에요?”

“여기서 안 멀어.”

“그래서 어디요?”

희윤이 은근슬쩍 지형을 두루뭉술하게 말하자 해승이 다시 물었다.

“버스 타고 가면 돼. 신경 쓰지 마.”

희윤은 혹시 해승이 데려다준다고 할까 봐 얼른 선수를 쳤다.

“지금 시간에 버스 있어요?”

“그럼. 아직 전철도 다니는데?”

자정도 안 된 시간이다. 그러니 버스든 전철이든 타면 그만이었다. 무엇보다 본부에서 희윤이 사는 동네까지는 거리가 멀지도 않다.

도보로 넉넉히 걸어 1시간 정도. 그래서 희윤은 차비도 아낄 겸 매일 걸어서 출퇴근하고 있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요?”

어쩐지 해승은 뜻밖에 말을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보통 그렇지? 이 시간에 지하철 한 번도 안 타 봤어?”

희윤의 물음에 해승은 어깨만 으쓱였다. 대답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런 비싼 차를 타고 다닐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지. 더군다나 우리나라에 유일한 S급 가이드가 아닌가.

귀한 몸이니만큼 태워 주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묘하게 정답에 가까운 짐작을 한 희윤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어쨌든 아직 버스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얼른 가서 쉬어. 피곤할 텐데.”

“그래도 데려다줄게요. 형 말마따나 늦은 시간이잖아요.”

이래 봬도 나 에스퍼인데. 꼭 밤늦게 집을 찾아가는 아이를 걱정하는 듯한 해승의 반응에 왜인지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다.

“어차피 저도 집이 그 방향이에요. 그러니 타고 가세요. 뭐, 정 마음 쓰이면 내일 점심은 형이 사도 되고요.”

“음……. 그래. 알았어.”

거듭된 설득에 희윤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낮보다 도로가 더 한산했기에 차는 막힘없이 달려 금세 희윤이 사는 동네에 도착했다. 야트막한 산비탈에 허름한 집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곳이 창밖으로 보였다.

“여기에서 내려 줘.”

희윤은 불 꺼진 작은 슈퍼를 가리키며 말했다. 해승이 차를 세우더니 그대로 창문을 열어 바깥을 살폈다.

“여긴 전기도 안 들어와요?”

“아니. 다들 일찍 자는 편이라 그래.”

자정이 가까워진 시간이다. 한 푼이라도 아쉬운 동네는 뜨문뜨문 켜진 가로등 외엔 불빛이 없었다.

“흐음…….”

희윤이 문을 열고 나가자, 해승은 기어이 따라서 내려 동네를 훑었다. 그러다 뭘 팔기는 제대로 파는지 알 수 없는 작은 슈퍼에 시선이 머물렀다.

슈퍼 앞 평상에는 치우지 않은 술병과 과자 봉투가 방치되어 있었다.

“지부장님한테 말해요. 주거 지원해 달라고.”

해승이 평상으로 걸어가 끄트머리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그리고 희윤에게도 와서 앉으라는 듯 옆을 툭툭 쳤다.

“주거 지원? 그게 뭐야?”

망설이던 희윤이 해승이 손짓한 자리에 엉덩이를 내리며 물었다.

“그것도 안 가르쳐 줬어요?”

되묻는 해승의 눈썹이 날카롭게 올라갔다.

“하, 진짜.”

이것들이. 분명 그렇게 중얼거린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아무렴 착한 해승이 저보다 나이도 많은 사람들에게 막말할 리 없다.

희윤은 제가 들은 소리를 애써 외면했다. 시간이 많이 늦어서인지 말하는 사람은 저와 해승 둘뿐인 듯했지만…….

“내일 당장 신청해요.”

그래서인지 유독 해승의 목소리가 더욱 잘 들렸다. 문제는 어째 아까보다 더 차가워진 것 같다는 점일까.

“내일?”

“네.”

해승이 짜증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해 준다고 하면 말해요.”

꼭 억지로라도 그렇게 하게 만들겠다는 듯한 말투였다. 밤이 깊어서인지 유독 더 까칠해 보이는 해승을 보며 희윤은 또 속없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왜인지 그냥 기분이 좋아서.

“커피라도 마시고 갈래?”

희윤이 평상 아래 흙을 발로 비비며 물었다.

“음……. 아뇨. 오늘은 그만 가 볼게요. 형도 쉬셔야 하니까.”

“하긴 많이 늦었다. 너도 그만 가서 쉬어.”

“네, 얼른 들어가세요.”

“응. 너도.”

착실하게 대답하면서도 희윤은 영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인다. 해승은 제가 가기 전에는 희윤이 꼼짝하지 않을 거란 걸 알아챘다.

“내일 봐요.”

해승이 평상에서 일어서며 희윤을 내려다보았다.

“오늘 여러모로 고마웠어.”

희윤도 그제야 몸을 일으키며 웃었다. 점심도 저녁도 어쩌다 보니 전부 해승이 계산했다. 밤늦게까지 경위서를 쓰는 걸 도와주고, 집에도 데려다줬다.

정말 생각하면 할수록 고마운 일들뿐이라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덕분에 희윤은 아까 자신이 집 주소를 알려 주기도 전에 해승이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새까맣게 알아차리지 못했다.

“내일은 내가 꼭 살게.”

“네. 기대할게요.”

해승이 늘 그렇듯 예쁜 미소를 지어 보이고 돌아섰다. 차에 올라 밖을 보니 아직도 희윤은 그 자리에 있었다.

“들어가세요.”

“응. 너도 조심히 가.”

또 대답만 하고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이는 희윤 때문에 해승은 서둘러 차를 출발시켰다. 사이드미러에 이쪽을 보는 희윤이 비쳤다.

좁은 도로를 빠져나와 희윤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자 해승은 곧장 도롯가에 차를 세우고 스마트폰을 꺼냈다.

통화 버튼을 누르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왜 늦은 시간에 전화야?

“왜 쓸데없는 사진 돌아다니게 두세요.”

- 사진? 무슨 사진? 너 어디서 뭐 찍혔어? 아까는 그런 얘기 없었잖아.

“내가 일일이 알려 줘야 해요? 그럴 거면 그 자리에는 왜 계세요. 내려오시지.”

- 기다려 봐 곧바로 정리할 테니까.

원하는 대답을 들은 해승은 그대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의 시선이 허름한 동네로 향했다가 곧 멀어졌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