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하나 준비해 주세요.”
막 출근 준비를 마치고 현관을 나서려던 지부장이 움찔했다.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휙 돌리니 해승이 보였다. 그것도 소파에 한 다리를 꼬아 앉은 태평한 자세로.
“너 여기 왜 있어.”
“투룸으로 해 주세요. 본부에서 도보로 10분 내외로.”
해승은 지부장의 질문은 싹 무시한 채 제 할 말만 했다.
“무슨 집?”
그런 해승을 지부장은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본부에서 지원해 주는 거 있잖아요.”
“그건 왜? 네가 들어가 사려고?”
그럴 리 없을 텐데. 지부장이 딱 그런 눈을 했다. 맡겨 놓은 것처럼 집을 내놓으라고 하는 게 다름 아닌 해승이었기 때문이었다.
“본부 지원보다는 네 돈으로 사는 게 더 낫지 않냐. 아니지. 너 지금 사는 집도 충분하잖아. 근데 굳이 하나 더 받겠다는 거야? 돈도 많은 녀석이…….”
“누가 내가 산대요?”
“그럼?”
그렇게 묻던 지부장이 일순 멈칫했다가 혹시 하는 얼굴로 물었다.
“설마 연희윤 에스퍼 때문에?”
해승은 말없이 발만 장난스럽게 까닥였다. 대답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허…….”
지부장이 이제는 아예 몸까지 돌려 해승을 봤다. 그의 뒤로는 막 8시를 가리키는 시계가 걸려 있었다.
이 이른 시간에 저를 찾아와 요구하는 게 고작 한 번 매칭 테스트를 한 에스퍼 때문이라고?
“전담 생각 없다면서.”
“네.”
말은 단호했다. 그런데 행동은 대체 왜 그런 건데? 지부장이 잠시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했다가 곧 입을 열었다.
“그래. 뭐, 집 하나 빼는 거야 어려운 일도 아니지. 되는대로 연희윤 에스퍼한테 연락할게. 그리고 어제 인터넷에 이능력 관련해서 올라온 것 중 연희윤 에스퍼로 보이는 건 다 정리했다.”
“아아.”
해승은 이번에도 대수롭지 않은 일을 했다는 듯 발을 까딱까딱했다. 전담 안 한다며, 귀찮다며.
그런데 인터넷에 기사나 사진 떠다니지 않게 하라고 연락하고, 집 당장 구하라고 득달같이 찾아오는 건 왜 그런 건데?
도대체 무슨 속셈인 건지. 지부장은 안 풀리는 숙제를 보듯 해승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 참, 저 오늘부터 오전에 희윤 형이랑 훈련할 거예요. 그러니까 안효정 에스퍼가 방해 못 하게 적당히 출동시켜 주세요.”
“뭐? 너 그거 월권이야!”
“어차피 안효정 에스퍼가 가야 할걸요?”
그게 무슨 소리냐고. 지부장이 소리치기 직전,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었다. 긴급 파견 요청 알림이었다.
* *
출근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에스퍼 15팀 사무실로 들어섰던 희윤은 평소와 다른 어수선한 분위기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지?’
고개를 갸웃하며 안효정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평소에도 빈자리가 많았던 책상은 오늘따라 더 휑해 보였다.
“희윤 형!”
익숙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사무실 저쪽에서 해승이 손을 흔들며 걸어왔다.
“왔으면 연락해야죠.”
“응, 미안. 온 지 얼마 안 됐어.”
순간 내가 연락을 하기로 했나 생각하면서도 희윤이 착실하게 대꾸했다.
“그래요. 그럴 수도 있죠. 그럼 이제 저랑 훈련해요.”
“어?”
“어제 배우고 싶다고 했잖아요. 특공무술이요.”
“아…….”
그제야 해승의 말뜻을 알아들은 희윤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물론 어제 그런 비슷한 말을 하기는 했다.
하지만 원래 제 담당은 해승이 아니라 안효정이 아닌가.
“잠시만 그건 안효정 선배한테 먼저 물어봐야 해.”
희윤이 다시 안효정을 찾으려 고개를 돌리던 그때였다.
“안효정 에스퍼라면 지금 없어요. 긴급 출동 때문에 아까 나가더라고요.”
“긴급 출동?”
“네. 서해만 갯벌에 괴물체가 나타나서 출동했거든요.”
“아……!”
그런 거라면 저도 가야 하는 거 아닌가.
“형은 아직 매칭이 확정된 가이드가 없어서 어려워요.”
희윤의 생각을 읽은 듯 해승이 차분히 설명했다.
“하긴 그렇지.”
“네. 그러니까 그 일은 다른 에스퍼에게 맡기고 형은 오늘 저랑 훈련해요.”
“그래.”
희윤이 결국 수락하자, 해승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좋아요. 그럼 지금 바로 가요. 제가 가르쳐 줄게요.”
분명 그렇게 말하고 해승과 지하에 있는 훈련장으로 이동했는데…….
“형, 정말 몸이 좋네요.”
해승이 눈꼬리를 휘며 말했다.
“…….”
희윤은 대답 없이 눈만 깜빡였다. 지금 그가 하는 자세는 두 팔은 팔짱을 끼듯 앞으로 올리고 엉덩이를 뒤로 뺀 채 무릎을 굽힌 이른바 스쿼트였다.
〈일단 기초 체력부터 키워야 해요.〉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그렇게 말한 해승이 희윤을 데려간 곳은 훈련장이 아닌 체력단련실이었다.
해승은 희윤에게 일단 러닝을 30분 뛰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이어 희윤에게 스쿼트를 하라고 했다.
그래 놓고 한다는 말이 몸이 좋다는 말이라니.
“좋아요. 지금 그 자세로 스무 번.”
심지어 이걸 20회나 하라는 소리에 희윤은 뒤통수에 땀이 맺히는 것 같았다. 몸이 좋으니 어쩌니 하더니 결국에는 운동을 빡빡하게 시키려는 속셈 같았다.
하지만 희윤은 해승이 지시한 대로 성실하게 무릎을 굽혔다가 폈다가 하면서 횟수를 채우기 시작했다.
“집은 얘기해 봤어요?”
“집?”
“네. 어제 말했잖아요.”
“아……. 아니. 아직.”
희윤이 그제야 무슨 소리인지 알아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해승도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운동 끝나고 잠깐 미팅 갔다가 얘기하러 가요.”
“미팅?”
희윤이 무릎을 굽혔다가 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네.”
해승은 궁금증은 해결해 주지 않고 짧게 대꾸만 했다. 거기에 스쿼트를 두 세트 더 시키는 바람에 희윤은 집 얘기는 더 꺼내지도 못했다.
온몸이 땀으로 촉촉해지고, 운동복 대신으로 입은 반팔 티셔츠도 상체에 달라붙었다. 윤기까지 흐르는 희윤의 얼굴은 평소보다 발그레해져서 더욱 시선을 끌었다.
“희윤 형. 오늘은 여기까지 해요.”
“응.”
희윤이 반색하며 얼른 자세를 풀었다. 하체 운동을 했더니 허벅지가 터질 듯했다.
싱글싱글 웃으며 욕실로 향하는 희윤을 해승이 귀엽다는 듯 봤지만 그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간단히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두 사람은 체력단련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어?”
엘리베이터가 멈추어 선 건 가장 꼭대기 층이었다.
“미팅하자면서?”
“네.”
“근데 왜 지부장님 사무실을?”
“일단 가 보세요.”
해승은 이번엔 대답 대신 웃기만 하고 곧바로 걷기 시작했다. 지부장실로 향하는 길목에 지부장의 비서가 서 있었다. 비서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 말없이 곧장 문을 열었다.
“어이쿠. 이제들 오시는군요.”
안쪽에 앉아 있던 이들 중 콧수염을 멋스럽게 기른 50대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그 외에 지부장과 30대 중반 여성, 본부 운영팀 직원 두 사람도 함께였다.
“이리로들 앉으세요.”
희윤은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하는 얼굴로 해승을 보았다. 그러나 의문을 해소하기 전 콧수염 남자가 자리를 가리키는 바람에 엉겁결에 그리로 가서 앉았다.
“표해승 가이드님께 얘기 들었습니다. 이번에 각성하신 연희윤 에스퍼님이시라고요?”
“아, 네.”
“반갑습니다. 저는 AA 프로덕션 김팔재 감독입니다.”
희윤이 의자에 엉덩이를 대자마자 말을 건 김 감독이 얼른 제 소개를 덧붙였다. 그리고 곧장 손까지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희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을 훑고 마지막으로 해승을 봤다.
“괜찮아요. 형.”
제게 도움을 청하는 눈빛에 해승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희윤은 그제야 앞에 있는 손을 살짝 잡았다.
“연희윤 에스퍼님. 표해승 가이드님께 설명은 들으셨지요?”
미팅을 하자는 말만 들었지. 이 자리가 대체 뭔지는 모르는 희윤이 다시금 해승을 보았다.
“광고 촬영 때문에 온 사람들이에요.”
그제야 해승이 희윤의 의문을 해소해 주었다. 그러나 그건 희윤에게 또 다른 궁금증을 일으켰다.
“광고 촬영?”
희윤이 이번엔 지부장을 봤다. 지부장이 상황을 알려 주려고 하는데 그보다는 해승의 말이 더 빨랐다.
“이번 광고는 형이랑 같이하게 되었거든.”
해승이 다정한 투로 말했다. 동시에 지부장이 얼굴을 파삭 일그러뜨렸다. 물론 그건 희윤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네, 네. 사실 저희가 매해 공익 광고 촬영을 하고 있습니다.”
“그걸…… 제가요?”
“네. 표해승 가이드와 아주 잘 어울리실 것 같아서 결정했습니다.”
물론 그 의견을 낸 건 해승이었다. 하지만 김 감독은 그런 말을 쏙 빼놓았다. 본인이 원한 건 아니었고, 해승이 그렇게 하라고 했기 때문에.
“듣자 하니 각성하신 계기도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려고 했기 때문이라면서요?”
김 감독이 아직도 놓지 않은 손을 위아래로 흔들며 아부성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이렇게 정의로운 분과 촬영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부담스럽게 눈빛도 초롱초롱했다. 희윤은 차마 마주 볼 수 없어 시선을 피하며 물었다.
“정말 제가 해도 되는 일인가요?”
“부담 갖지 않아도 돼요, 형.”
해승이 김 감독에게 붙들려 있는 희윤의 손을 자연스럽게 빼내며 말했다.
“정말 괜찮을까?”
“응.”
홀릴 듯한 미소를 보니 정말 모든 게 다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런 두 사람을 지부장을 포함한 모두가 묘한 눈으로 보았으나, 정작 희윤은 해승과 시선을 맞추느라 알아차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