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85)

광고라니. 전혀 생각도 못 해 본 일에 희윤은 그저 얼떨떨할 뿐이었다. 미팅이 끝나고 계약서를 작성하고, 촬영 콘셉트니, 분위기니, 장소는 어디로 할 건지 등 얘기하는 것도 잘 와닿지 않았다.

그렇게 약 2시간 후.

“그럼 일정이 정해지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김 감독이 깍듯하게 인사를 건네고 작가와 함께 회의실을 나섰다. 이제 안에는 희윤과 해승, 지부장만 남았다.

지부장이 그제야 꾹꾹 담아 왔던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미간 사이를 엄지 두 개로 누르는 모습에 깊은 고민이 보였다.

혹시 자신이 광고하는 게 마음에 차지 않는 건가.

희윤이 그런 생각에 지부장의 눈치를 볼 때였다.

“지부장님.”

해승이 팔짱을 낀 채 지부장을 불렀다.

“왜?”

“희윤 형한테 할 말 있지 않아요?”

“어?”

지부장이 무슨 소리인가 하는 얼굴을 했다. 곧바로 해승의 눈빛이 달라졌다.

“아, 아아. 아…….”

서둘러 제 기억을 샅샅이 훑던 지부장은 곧 오늘 아침 갑자기 쳐들어와 맡겨 놓은 물건을 찾듯 집을 내놓으라고 했던 해승의 말을 떠올렸다.

“연희윤 에스퍼. 혹시 주거 지원 필요해요?”

“집이요? 아뇨. 전 지금도 좋아요. 거리도 가깝고…….”

지부장의 질문에 희윤이 고개를 저었다. 사실 아까 해승이 물었을 때 괜찮다고 말하려 했던 것이었다.

“형. 집 앞에 차 세울 수 있어요?”

“응? 아니?”

희윤이 사는 곳은 집 앞은커녕 언덕을 한참 올라가야 하는 꼭대기에 있다. 뭣보다 한 사람 간신히 갈 수 있을 듯한 협소한 골목은 그다지 안전해 보이지도 않았다.

“버스는 몇 시에 끊어져요? 8시?”

“어…….”

사실 해승에게 말한 것과 달리 버스는 6시 25분이 막차이고, 비가 많이 오거나, 눈이 많이 쌓이면 아예 오지 않는 때도 있다.

여기에 더해 매해 승객이 없어서 적자 운영으로 운행 횟수를 줄인다는 말도 돌았다. 지금도 하루에 네 번인데……. 뭐 희윤이야 젊으니까 상관없다.

하지만 한참 비탈길을 걸어 내려와 큰길에서 버스를 타야 해 동네 어르신들의 운신이 힘들어진다.

그 때문에 희윤은 몰래 주민센터나 구청 등에 버스를 없애지 말아 달라는 청원을 넣고 있었다.

“온수는 잘 나와요? 난방은 잘되고요?”

“…….”

뜨거운 물이 필요할 땐 커다란 주전자에 데워서 사용하고, 그나마 따로 씻을 만한 욕실이 없어 주방에서 처리하는 희윤이 입을 다물었다.

“문은요. 대문은 잘 잠겨요?”

“그런 건 왜 물어봐.”

대답하면 할수록 이상하게 눈치를 보게 되는 희윤이 뚱하게 물었다. 해승은 굳이 더 말해 보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지부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연희윤 에스퍼. 주거 지원은 본부에서 해 주는 기본 중의 기본이에요. 위험한 일을 몸을 사리지 않고 나서는 에스퍼에게 나라에서 그 정도는 꼭 해야지.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필요하면 요청하세요.”

어차피 뭐 비싼 땅덩어리에 지어진 알짜배기 매물 이런 건 못 주니까. 지부장이 농담이라고 붙인 뒷말에 희윤이 어색하게 웃었다.

“혹시 가족이랑 함께 이사할 생각이에요?”

“아뇨.”

희윤이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요. 그럼 최대 투룸까지 가능해요. 물론 본부 내에 있는 숙소도 쓸 수 있고요. 혼자 사는 이능력자들이 그렇게 많이 이용하거든요. 이건 운영팀이랑 얘기해 보면 되겠네요. 내가 연락해 둘 테니까 그쪽이랑 상의해 보세요.”

“네. 감사합니다, 지부장님.”

희윤은 이사할 생각이 없다고 말하는 대신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하긴요. 당연히 해 줘야 하는 건데. 나야말로 미안해요. 내가 조금 더 세심하게 잘 챙겨야 하는데.”

사실 지부장에게도 나름대로 변명거리는 있었다. 첫날 진행된 희윤의 매칭 테스트 상대가 다른 누구도 아닌 해승이었다.

해승이 멋대로 벌인 일은 더 뜻밖의 상황을 보였다. 바로 매칭률 89%. 해승이 본부에서 매칭 테스트를 진행한 이래 가장 최고이자 유일무이한 수치였다.

본부가 발칵 뒤집힌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지부장도 그에 신경이 쏠려서 다른 건 신경 쓰지 못한 것이었다.

물론 이런 건 복지지원팀이나 안효정이 해 주면 좋았을 텐데, 그들도 나름대로 당황했던 상황이라 탓할 수 없었다.

“아니에요. 지금도 충분히 신경 써 주시는데요.”

“그래요. 뭐, 어쨌든 지금 가 보세요. 말해 둘게.”

지부장이 힐끔 해승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이제 슬슬 자리를 정리해야 할 상황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형, 일어나요.”

기다렸다는 듯 해승이 희윤의 팔을 붙들고 일어섰다. 엉겁결에 몸을 일으킨 희윤이 지부장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대로 회의실을 나온 후 희윤은 곧장 해승의 팔을 반대로 붙들었다.

“나, 정말 필요 없어. 지금 사는 곳도 충분해.”

“멀잖아요.”

“안 멀어. 가 봤잖아.”

“치안도 안 좋고요.”

“아냐. 다들 좋은 분들만 사는걸.”

물론 가끔 아랫집에서 싸움이 나고, 슈퍼 근처에서 주정꾼이 시비를 걸기도 하지만. 그거야 어느 곳에 가든 있을 법한 일이다.

“혹시 이사 못 하는 다른 이유 있어요?”

그 물음에 희윤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랑 같이 살던 집이거든.”

“아…….”

“거기서 쭉 사셨던 거예요?”

“아니. 13살, 아니다. 14살에.”

어느 날 아버지가 희윤을 이리로 데려왔다. 그때까지 희윤은 제게 할머니가 있는 줄도 몰랐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기꺼이 희윤을 받아들였다.

“부모님은요?”

희윤은 어깨만 으쓱했다. 13살 겨울. 희윤의 부모는 이혼했다. 그러나 부부는 누구도 그를 맡으려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미 재혼할 여자가 있었다.

어머니도 이혼 후에는 고향인 프랑스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녀의 오빠가 함께 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는 말도 들었다.

프랑스는 멀고 낯선 곳이라 어머니는 희윤을 데려갈 수 없다고 했다. 다 핑계였다.

“14살이면…… 13년 전이네요.”

해승이 더 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응. 신정 지나고 얼마 안 됐을 때. 아빠랑 버스 타고 내려서 골목에 막 들어섰는데, 오르막이 온통 빙판이었던 게 기억나.”

“빙판요?”

“응. 눈이 내리고 나서 채 녹지 않고 그대로 얼음이 됐거든. 근데 하필이면 할머니네는 가장 꼭대기여서 정말 진땀뺐어.”

희윤은 그때를 떠올리며 작게 웃었다. 당시에는 그저 막막하게만 생각했는데 지나고 나니 그저 우스운 추억일 뿐이었다.

“할머니는요.”

“돌아가셨어. 3년 됐어.”

“아.”

해승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본부까지 왔다 갔다 하긴 불편하잖아요.”

“그렇긴 해. 사실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성인 되면 할머니 모시고 이사한다고 별렀어.”

“학교요?”

“응. 학교도 멀리 다녔거든. 저기, 보여?”

희윤이 별안간 창문 밖을 가리켰다. 해승은 그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아래로 도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높고 낮은 건물, 아파트 등이 즐비한 틈바구니에 학교 건물을 용케 찾아내었다.

“네. 보여요.”

“저기로 다녔어.”

“거리가 제법 있는데요?”

“응. 그랬지. 1시간 정도?”

“거길 매일 걸어 다녔어요?”

희윤은 이번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차비가 아까워서 그랬다고는 차마 말하기 민망했기 때문이었다.

“전부 오르막길이던데. 힘들었겠네요.”

“응. 그래서 항상 슈퍼까지 와서 쉬었다 갔어.”

“슈퍼라면…….”

“어제 우리 동네 왔을 때, 네가 앉았던 평상 있지.”

네가 앉았던 평상이라는 말에 해승의 눈빛이 묘해졌다.

“왜?”

“아뇨. 거기 뭐 팔기는 제대로 팔아요?”

눈까지 찌푸리며 말하는 걸 보니 어제 거기가 슈퍼라고 생각은 못 한 듯했다. 물론 해승이 조금 전 떠올린 건 슈퍼의 운영에 관한 게 아니었다.

과거 어느 날이었지.

“하하. 당연하지. 작기는 해도 먹을 건 다 있어. 라면이나 음료수, 아이스크림도. 뭐 유통기한 짧은 유제품은 어렵지만.”

희윤이 웃음기 어린 말투로 얘기했다.

“아, 뭐. 근데 사 먹은 적은 별로 없다.”

“왜요?”

이번에도 희윤은 그저 웃었다. 그 미소를 보고 해승은 알아서 답을 눈치챘다.

“가끔 슈퍼 아주머니가 심부름시키면서 주셨거든.”

동네는 노인의 비율이 절대적으로 많았다. 사실상 젊은 사람은 희윤이 유일했다. 슈퍼 아주머니인 안동댁은 거동이 어려운 어르신을 위해 전화로 주문을 받았다.

그러고 나서 희윤에게 물건을 배달해 달라고 심부름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착하네, 형은.”

해승은 희윤이 다 꺼내지도 않은 말을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희윤의 고개가 그에게 돌아갔다. 눈이 마주치자 해승이 빙그레 웃었다.

“에스퍼로 각성한 것도 강에 빠진 아이를 구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서 비롯된 거였잖아요.”

“그때는 그랬지. 물에 빠진 아이와 거리는 멀고, 내가 당장 가서 구할 수 없었으니까.”

희윤에게 무덤덤한 대꾸가 돌아왔다. 그런 상황이었다면 누구나 그랬을 거라는 듯. 그러나 해승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네, 그러니까요. 약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나 순간을 형은 그냥 지나치지 않잖아요. 전에 해수욕장에서도 그랬고요.”

“그렇게 대단한 일도 아니었는걸. 무엇보다 해수욕장에서의 일은 오히려 너나 지부장님께 혼만 났잖아.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잘못한 거지. 네 말마따나 내 능력이 어느 정도인 줄도 모르는데.”

희윤이 민망한 듯 어색하게 웃으며 목뒤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해승 역시 그런 희윤을 물끄러미 보았다.

불쑥 그때 느꼈던 불쾌감이 떠올랐다. 왜 그랬더라.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마 희윤이 제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게 싫어서였을 거다.

유능한 에스퍼인 건 좋지만, 때로는 희윤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제 곁에만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랄까.

하지만 생각해 보면 과거에 만난 희윤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해승의 눈동자가 먼 어느 날을 되짚듯 아련하게 변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