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85)

그저 걷기만 해도 땀이 흐르던 무더운 여름 어느 날. 해승은 늦은 오후에도 가시지 않은 열기에 이마를 손등으로 훑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하……. 여기가 어디야.’

무턱대고 걸었더니 어디 하나 낯익은 게 없다. 낡고 허름한 집들이 비탈에 빡빡하게 차 있는 걸 보니 숨만 턱 막혔다.

‘저런 데 사람이 살아?’

TV에서 본 적은 있어도 실제로 이렇게 마주한 건 처음이다. 그래서 더욱 현실감이 없었다. 해승은 시선을 반대로 던졌다.

그제야 조금 더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우후죽순 제 키를 자랑하는 빌딩 숲. 그 가운데 유독 더 눈에 뜨이는 높다란 검푸른 건물. 해승이 오늘 이곳에 오게 한 원흉.

〈진짜 멀리 왔네…….〉

그저 어디로든 가고 싶었을 뿐이었다. 더는 참을 수 없을 것 같은 갑갑함에. 그래서 무턱대고 길을 나서 생각 없이 걷고 또 걷기만 했는데.

눈을 가늘게 뜨고 본래 제가 있어야 할 곳을 보다가 홱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작은 슈퍼 앞에 평상이 보였다.

해승은 곧장 그리로 걸어갔다. 아까부터 다리가 뻐근하고 아파서 어딘가에 앉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던 참이었다.

〈음…….〉

막상 평상 앞에 도착하고 보니 가관이었다. 먹다 남긴 과자 봉지며, 빈 술병이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평상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더러운 것보다는 휴식이 더 간절했기 때문이었다.

〈휴…….〉

한숨을 쉬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평상은 생각했던 것보다 높아서 바닥에 발이 닿지 않았다. 그대로 묵직해진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 때였다.

〈못 보던 꼬마네?〉

갑작스럽게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시커먼 그림자가 앞을 가리고 있었다. 시선을 위로 올리다가 눈이 마주쳤다.

동글동글한 눈매가 선하게 웃고 있었다.

〈철호 아저씨네 꼬마도 아닌 것 같고. 영화 아줌마 손자인가? 아닌데. 그 아주머니네 핏줄에서 이런 예쁘장한 꼬마가 나올 리 없는데.〉

그림자가 고개를 갸웃하며 알지 못하는 이름들을 줄줄 읊었다.

〈꼬마야. 부모님은 어디 계셔?〉

계속 침묵하고 있자 그림자가 다시 묻는다. 말투는 퍽 다정했지만, 낯선 사람이라 경계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없어.〉

〈없다고? 너 혼자 여기까지 온 거야?〉

뒤를 잇는 질문에 해승은 도로 입을 다물었다.

〈누구 만나러 왔어? 할머니? 할아버지?〉

이번에는 그냥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그의 할아버지나 부모는 이런 동네에서 살지 않는다. 살 이유도 없다.

싱그럽고 푸른 잔디가 깔린 정원, 수많은 고용인이 관리하는 커다란 저택이 그들의 집이니까.

〈하긴 너처럼 예쁜 아이한테 어울리는 곳은 아니지.〉

그림자가 황당한 소리를 하며 목덜미를 손으로 쓸었다.

〈그럼 누가 여기다 데려다줬어?〉

그냥 신경 끄고 가도 될 텐데. 어차피 아는 사람도 아닌데. 그런데도 그림자는 갈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귀찮네. 그냥 갈까.’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그림자의 손에 들린 음료수가 눈에 들어왔다. 기다렸다는 듯 갈증이 밀려 올라왔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물 한 잔도 마시지 않고 걷기만 한 것이다.

꼴깍.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제 귀에 들릴 정도로 크게 울렸다.

〈마실래?〉

하필 그 소리를 그림자도 들은 듯했다. 불쑥 앞에 다가온 음료수를 멀뚱히 보고 있자 그림자가 말했다.

〈새 거야. 마셔도 괜찮아.〉

아무 소리 안 했는데 의심하는 걸 알아챘나 보다. 말투가 아까보다 더 상냥해졌다. 그도 모자라 아예 옆에 털썩 앉아 버렸다.

힐끔 그쪽을 보니 해를 등지고 있어 잘 보이지 않던 얼굴이 드러났다. 갈색 눈이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다.

저보고 예쁘다 어쩌다 하더니 그러는 저쪽이야말로 제법 귀엽고 예쁜 얼굴이다. 어딘지 모르게 조금 이국적인 느낌도 났다.

‘혼혈인가?’

속으로 생각할 때였다.

〈난 저기 살아.〉

그림자가, 아니 예쁜 소년이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절로 시선이 손끝을 따라갔다. 전부 비슷비슷한 작은 집들이 모여 있어서 어디를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내 이름은 연희윤이고, 나이는 14살. 중백 중학교 다녀.〉

사는 곳을 가리키더니 이어 뜬금없이 자기소개까지 한다. 어이없다는 듯 올려다보니 상냥한 시선이 돌아왔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그가 한 이야기는 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꺼낸 말이라고.

고작 음료수 하나 마시게 하겠다고.

〈자.〉

좀 더 가까이 음료수병이 다가왔다.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았다. 받아 들어 뚜껑을 돌렸다. 빡빡한 느낌에 새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대로 음료수병을 입가에 댔다. 시원하진 않았다. 하지만 달착지근하면서도 톡 쏘는 탄산이 혀에 닿으니 썩 괜찮았다.

〈하…….〉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음료수병을 내려놓으니 거의 바닥을 보였다. 아닌 척했어도 목이 말랐기에 이만큼 마셔 버린 것이었다.

옆에서는 그때까지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너무 조용해 오히려 이쪽에서 옆에 앉은 사람의 눈치를 보게 됐다.

근데 도리어 그쪽은 신경도 안 쓰고 주머니를 꼼지락꼼지락 뒤지고 있었다.

뭘 하는 거지? 의문스럽게 쳐다보던 순간.

〈자.〉

이번에 또 제 앞에 놓인 건 초콜릿바였다. 이걸 뭐 어쩌라는 거냐는 눈으로 바라보자 소년이 검지로 볼을 살살 긁으며 입을 연다.

〈배고플 것 같아서, 먹어. 이것도 새 거야. 봐.〉

조용히 바라보기만 하자 이번에도 의심한다고 생각했는지 포장을 이리저리 보여 준다. 이쯤 되면 그냥 호구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손을 내밀자 닿지 않게 하려는 듯 조심스럽게 내려놔 주었다. 그리고 옆에 앉은 소년은 다시 옆자리만 지키고 있을 뿐 침묵했다.

〈더 안 물어봐요?〉

해승은 초콜릿을 반쯤 우물거리다가 결국 먼저 질문했다. 어느새 태양은 서쪽으로 완전히 내려가서 끄트머리만 아슬아슬 보였다.

〈경찰 불러야 해?〉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절로 황당한 표정이 되어 그쪽을 봤다. 그러자 어이없게도 씩 웃는 얼굴이 돌아왔다.

〈그거 아니면 됐어. 있고 싶은 만큼 있다가 가. 내가 같이 있어 줄게. 아니다. 여기 버스 일찍 끊기는데 밑에 큰길까지 데려다줘야 하나.〉

대체 언제 봤다고 저렇게 친절하게 굴지. 혹시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닐까. 다시금 머릿속에 스멀스멀 의심이 밀어닥칠 때였다.

빠앙.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큰 클랙슨 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했던 순간은 그 하나로 단숨에 깨졌다.

〈표해승!〉

이윽고 성난 음성이 들려왔다. 슈퍼에서 멀지 않은 공터에 선 검은색 세단에서 내린 남자였다. 뒤따라 남녀 두 사람이 더 밖으로 나왔고, 셋은 단숨에 평상 앞으로 뛰어왔다.

〈말도 없이 본부를 나오면 어떡해! 연락받고 얼마나 놀란 줄 알아?〉

먼저 차에서 내렸던 남자가 소리치듯 말했다. 잔뜩 커진 눈에는 안도와 짜증이 뒤섞여 있었다. 그러다 해승의 옆에 앉은 낯선 존재를 발견하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넌 뭐야? 설마 네가 얘 이리로 데려왔어?〉

함부로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은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그 눈빛에 오히려 해승의 기분이 더 나빠졌다.

〈어차피 찾을 거 알았어. 그만 가.〉

평상에서 훌쩍 내려온 해승이 차를 턱짓했다. 저보다 한참 나이 많은 사람에게 하는 태도치고는 이쪽도 버릇없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남자나 그 뒤를 따라온 두 사람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도리어 남자를 제외한 남녀 둘은 해승의 눈치를 보았다.

해승은 그쪽엔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손을 내밀었다.

〈응?〉

제 앞에 불쑥 다가온 자그마한 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고마웠어요. 오늘 빚은 나중에 꼭 갚을게요.〉

심지어 말하는 것도 참 정중하다. 고작해야 10살 안팎으로 보이는데 말이다.

〈꼬마가 어른스럽네.〉

기껏 악수를 청했는데, 그쪽에서는 어이없게도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해승은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며 당혹감을 드러냈다.

〈됐어. 그래도 더 늦게 전에 누가 찾으러 와서 다행이다. 조심히 가, 꼬마야.〉

마치 제 할 일은 거기서 끝이라는 듯 소년은 평상에서 훌쩍 일어나 팔랑팔랑 손을 흔든다. 해승은 미련 없이 돌아서서 집 쪽으로 향하는 작지만 든든한 등을 가만히 봤다.

저 다정한 사람이 내 에스퍼가 된다면 좋을 텐데.

잠시 생각을 해 보았다. 손을 잡았으면 알 수 있지 않았을까. 지금이라도 달려가 잡아 볼까.

그런 마음도 들었지만, 곧 미련 없이 돌아섰다. 만약 저 사람이 정말 에스퍼라면 곧 만날 수 있을 거다.

대한민국에서 각성한 모든 에스퍼나 가이드는 전부 이능력자 관리 공단에 오게 되어 있을 테니까.

〈그때는 꼭.〉

저 다정한 손을 잡고 놓지 말아야지.

* *

“왜?”

희윤은 물끄러미 저를 바라보는 해승의 시선에 고개를 갸웃했다.

“아뇨. 그럼 형, 이사는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응, 고마워.”

희윤에게는 끝내 긍정적인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해승도 더 말하지 않았다.

본부에서 지원해 주는 집이 싫다면 다른 방법을 찾으면 그만이니까.

“그럼 갈까요?”

“어?”

“벌써 퇴근 시간이잖아요. 가요. 형이 저녁 사 주실 거죠?”

“아, 응. 그래야지. 그래, 가자.”

해승의 말에 시간을 확인해 본 희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을 사 주기로 한 것도 맞고, 퇴근할 때라는 것도 맞으니까.

막 걸음을 떼려던 순간, 희윤은 제 앞에 있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해승이었다.

“형.”

희윤은 그 소리에 멈칫하다 결국 그의 손을 붙들었다. 해승의 입가에 싱그러운 미소가 걸렸다.

머리를 까치집으로 만든 희윤이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일어섰다. 창호지 바른 문 안으로 빛이 스며들어 오는 것을 보다가 머리맡에 둔 스마트폰을 더듬더듬 찾아 액정을 터치했다.

상단에 찍힌 숫자는 ‘6:00’.

알람보다 무려 1시간이나 일찍 깨어났다.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꿈이었나…….”

아직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는 더 낮고 거칠게 들렸다. 희윤은 멍한 눈으로 방문 앞을 보았다.

분명 어제 저쯤에 해승이 앉아 맹물을 홀짝이고 있었는데…….

그러니까 희윤은 퇴근 후 해승과 저녁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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