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싶은 것 있어?〉
이제는 익숙해진 조수석에 앉자마자 희윤이 물었다. 고개를 돌리니 해승은 스마트폰을 들고 무언가를 열심히 보고 있었다.
〈네. 여기 가요.〉
그러더니 희윤에게 액정을 쓱 보여 주었다.
〈여기에 가자고? 정말?〉
〈네.〉
해승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 번 더 긍정해 주었다. 희윤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다시금 액정에 뜬 내용을 봤다.
대패삼겹살 무한 리필 9,900원!
정말 저기에 가자고?
〈한 번도 안 가 본 데라 궁금해요. 대체 어떤 곳이기에 형처럼 무한정 퍼 주는지.〉
대체 저 같다는 건 무슨 소리인지. 이게 욕인지 칭찬인지. 도통 판단할 수 없어 할 때 해승은 차를 출발시켜 인터넷으로 찾아 둔 대패삼겹살 무한리필 집으로 출발했다.
〈음, 싼값에 배 잔뜩 불리기에는 좋긴 하네요. 종이인지 고기인지 구분 안 될 정도로 얇고, 뻣뻣하고…… 국내산도 아니네요?〉
수북하게 쌓여 있는 대패삼겹살을 보자마자 신랄하게 말한 것치고 해승은 잘 먹었다. 심지어 냉장고에서 직접 소주까지 가지고 와서 희윤에게 마시겠냐고 물었다.
〈제가 집까지 안전히 모셔다드릴 테니까. 안심하고 드세요.〉
그것도 본인이 마시겠다는 게 아니라 저 보고 마시라면서. 하지만 술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희윤에게 독작은 썩 달갑지 않았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대리 불러서 가죠, 뭐.〉
그냥 음료수나 먹자는 희윤의 말에 해승이 그런 답을 주었다. 그리하여 결국 삼겹살에 소주라는. 아주 서민적이고도 어딘지 해승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메뉴로 저녁을 함께했다.
취하지 않을 정도로 딱 기분 좋을 만큼 마신 후 식당을 나섰더니 해승은 당연하게도 희윤에게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됐어. 그럼 돌아가야 하잖아. 기사님께 실례야.〉
희윤이 대리 기사를 핑계로 거절했다. 직장인으로 보이는 대리 기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낮에는 회사, 늦은 밤에는 대리운전. 두 개나 일하는 게 얼마나 힘이 드는지 누구보다 희윤이 잘 알았다.
그래서인지 대리 기사에게 피로감이 느껴지는 듯했다. 물론 희윤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여기서 멀지도 않아. 알잖아.〉
희윤의 시선이 동네 어귀로 향했다. 말마따나 집에서 식당까진 정말 멀지 않았다. 실제로도 걸어갈 만한 거리였고.
〈좋아요. 그럼 형은 걸어가세요.〉
다행히 해승은 금세 수긍했다.
〈응. 조심히 들어가.〉
〈네.〉
해승이 얌전히 대답하고 차에 올랐다. 그런데 그 뒤부터가 가관이었다. 길을 걷고 있는데 뒤에서부터 자꾸 라이트가 따라왔다. 돌아보았더니, 익숙한 SUV가 뒤쫓아 오고 있었다.
〈…….〉
유심히 볼 것도 없다. 해승의 차였다. 심지어 조수석에 앉은 해승은 눈이 마주치자 손까지 팔랑팔랑 흔들었다.
〈뭐 하는 거야. 집에 가라니까.〉
〈네. 가는 중이에요. 형은 갈 길 가세요.〉
차로 다가가자 냉큼 조수석 창문을 내린 해승이 해사하게 웃으며 어이없는 소리를 했다. 희윤은 저도 모르게 운전 중인 대리 기사의 눈치를 봤다. 대리 기사는 무표정하게 핸들을 쥔 채 시선을 앞에 두고 있었다.
〈형. 신경 쓰지 말라니까요.〉
어떻게 신경을 안 쓰느냐고. 희윤은 항의를 담아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표정 없는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해승의 눈빛에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깊고 어두운 눈동자였다.
〈정 그렇게 신경이 쓰이면 타세요.〉
그러나 마치 착각이었다는 듯 눈꼬리는 부드럽게 휘었고, 평소와 같은 다정한 분위기로 돌아왔다.
〈형.〉
〈아, 응.〉
마치 여우에게라도 홀린 듯한 기분이다. 희윤은 어느새 제가 뒷좌석에 앉아 있다는 걸 깨닫고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것도 모자라 해승은 대리 기사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희윤의 집까지 쫓아왔다.
〈제가 가면 안 되는 곳이에요?〉
〈아니. 그건 아닌데. 기사님이…….〉
〈괜찮아요. 제가 수당 더 챙겨드리면 되니까.〉
그런 문제는 아닌데. 희윤은 한 번 더 거절해 보려다가 해승의 얼굴을 보고 또 물러서고 말았다.
이상하게 웃고 있는 해승을 보면 제 뜻을 밀고 가기가 힘들었다. 자꾸만 묘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음…….〉
예상은 했는데 정말 딱 생각한 대로네.
막 낡은 대문은 밀려던 희윤은 자그마하게 들린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해승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집이 참 아담하네요.〉
그 전에 뭐라고 했는지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뭐 중요한 얘기도 아니었으니까.
〈저 목마른데, 물 한 잔 주실래요?〉
〈아……. 응.〉
무엇보다 해승이 뒤에 꺼낸 말에 혼잣말처럼 꺼낸 얘기는 금세 잊어버렸다. 희윤은 서둘러 있으나 마나 한 대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해승이 자연히 그 뒤를 따라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멘트로 된 좁은 마당, 때가 잔뜩 탄 호스가 연결된 수도꼭지와 그 앞에 놓인 대야.
똑바로 서면 당장 머리가 닿을 듯한 일자 구조 단층집. 해승은 희윤이 달려간 문도 없는 조악한 부엌을 눈으로 훑고 마당을 가로질러 창호를 바른 문으로 바라보았다.
딱 봐도 이곳이 희윤의 방 같았다.
끼익.
문고리를 붙들어 열자 날카로운 쇳소리가 들려왔다.
〈어?〉
막 부엌으로 나오던 희윤도 방문을 여는 해승을 발견했다.
〈안에서 기다리려고 했어요.〉
희윤을 돌아본 해승이 태연하게 말했다. 그러더니 정말로 신발을 벗고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희윤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다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뒤따라갔다. 해승이 문 앞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여기…….〉
〈고마워요, 형.〉
희윤이 들어가지도 못하고 밖에서 내민 물컵을 해승은 웃는 얼굴로 받아 들었다. 물 한잔을 단숨에 비워 내는 모습을 희윤 역시 넋 놓고 보았다.
〈TV도 없네요.〉
물컵을 희윤의 손에 다시 쥐여 준 후, 방안을 둘러본 해승이 툭 감상을 내놓았다.
〈아, 응. 그렇지. 스마트폰이 있어서…….〉
기존에 쓰던 건 진작 고장이 나서 버렸다. 그러고 나니 굳이 TV를 살 필요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볼 시간도 없다 보니 전기세가 아깝다는 마음도 있고.
〈가구도…… 참 예스럽네요.〉
〈할머니가 쓰시던 것들이라서.〉
예스럽다고 표현하기 민망한, 오래되고 해진 가구들을 함께 보면서 희윤이 웃었다. 남들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희윤에게는 나름대로 추억이 있는 것들이었으니까.
아귀가 맞지 않아 삐뚤게 닫힌 장롱이나 칠이 다 벗겨진 3단 서랍장이나 심지어 누렇게 뜬 벽지까지도.
먼지 한 톨 없이 반질반질한 유리 속 희윤의 할머니를 물끄러미 보던 해승이 물었다.
〈할머니가 참 고우세요. 할머니가 형을 닮았나 봐요.〉
보통은 자식의 외모를 부모에게서 보지 않나. 근데 해승은 부모 이야기는 쏙 빼놓고 할머니 얘기를 했다.
그나마도 희윤이 할머니를 닮은 게 아니라 반대로.
하지만 희윤은 굳이 해승의 이상한 화법을 고치려 하지 않았다.
〈그런가?〉
〈네. 근데 형은 체모도 눈동자도 한국인에 비해 색깔이 연한 것 같아요.〉
해승이 또 묘한 소리를 한다. 그냥 머리칼이라고 하면 될걸 체모라니. 희윤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 그건. 혼혈이라서 그래.〉
〈혼혈요? 형이요?〉
〈응. 엄마가 프랑스인이라.〉
〈아. 그래서 프랑스로 간 거구나.〉
해승도 그 얘기를 떠올렸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대문 망가진 지 오래된 거 같던데요. 도둑 들면 어떡하려고 그냥 둬요?〉
화제는 뜬금없이 바뀌었다.
〈괜찮아.〉
가져갈 것도 없는 가난한 집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슬쩍 시계를 보면서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이만 가 봐. 대리 기사님 너무 기다리신다.〉
〈마음 쓰지 말라니까요.〉
〈어떻게 그래.〉
미안한 마음에 희윤은 해승을 배웅하는 길에 아껴 두었던 탄산음료를 챙겨서 함께 차가 세워진 곳까지 내려왔다.
하지만 정작 대리 기사는 받기를 거부했고, 음료수는 엉겁결에 해승의 차지가 되었다. 더 웃긴 건 기껏 차까지 배웅했는데 해승이 도로 희윤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방에 들어가 이부자리를 깔고 눕는 것까지 지켜봤다. 희윤은 부끄러운 마음에 얼른 눈을 감고 잠든 척했다.
끼이익.
대문이 닫히는 소리에 심장이 술렁거렸다.
* *
“하…….”
희윤은 어제 일을 떠올리고 목덜미를 쓸었다. 어쩐지 갈증이 나는 듯하여 문 앞에 둔 물컵을 끌어다가 깨끗이 비웠다.
그러고 나니 이게 어제 해승에게 주었던 컵이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입술이 닿았던 자리로 향했다.
“아냐.”
희윤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뭐 어쩌라고.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리며 물컵을 내려놓았다. 도망치듯 서둘러 방을 나왔다. 운동화를 신고 희윤은 아침 해가 뜰 때까지 동네를 뛰었다.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폐가 조이도록 달리고 나니 온몸에 활력이 도는 듯했다. 얼굴도 귀도 뜨거웠지만, 이른 시간부터 쉬지 않고 뛰었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희윤은 애써 제 마음에서 피어올랐던 감정을 외면했다. 아니, 그게 어떤 것인지 희윤은 아직 깨닫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