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윤이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을 때 전투는 더욱 치열해져 있었다. 흉측한 괴물체가 한 번씩 요동칠 때마다 주변에서 공격을 퍼붓던 에스퍼들이 나가떨어졌다.
괴물체가 갯벌로 숨어들지 못하게 빙결 속성 에스퍼들이 바닥을 얼려도 거대한 덩치로 몇 번이고 내리찍는 힘을 버티지 못하고 깨져 나갔다.
“어어, 들어오시면……!”
“저리 가시오. 대체 언제까지 우리보고 기다리라는 거요!”
“그놈의 괴물체는 언제 잡는 거요. 우린 뻘에도 못 들어가고 손 놓고 있다고!”
당황한 듯한 목소리에 이어 잔뜩 성난 음성이 대기실에 쩌렁쩌렁 울렸다. 이어 벌컥 문이 열리고 네 사람이 우르르 안으로 들어왔다. 안쪽에 있던 에스퍼와 가이드의 시선이 전부 그리로 몰렸다.
희윤 역시 제 어깨에 기대어 앉은 해승을 살피다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르르 몰려와서 괴물을 잡니 마니 했으면 제대로 해야지!”
“지금 마을이 얼마나 난장판이 됐는지 아시오? 다들 며칠씩 벌벌 떨고 있단 말이오.”
중년 남자가 잿빛 머리칼을 마구 털어 내며 소리쳤다. 그러자 그 옆에 보라색 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동조했다.
“저 어르신들 진정하시고요…….”
그들에게 떠밀려 대기실 안으로 뒷걸음질 쳐들어온 현장 지원팀 직원이 난처한 표정으로 앞을 막아섰다.
“진정하게 생겼어? 어! 우리도 먹고살아야 할 거 아냐!”
그러자 잿빛 머리칼 남자가 얼굴을 와락 구기며 말했다. 아마 저들은 인근의 주민들인 듯했다.
“최소한 우리가 가서 작업은 할 수 있게 해 줘야지! 우리보고 굶어 죽으라는 거야, 뭐야!”
이번엔 보라색 모자 남자가 버럭버럭 소리 질렀다. 희윤은 눈을 찌푸린 채 그쪽을 보았다. 이해를 못 할 일도 아니지만, 저건 억지에 가까운 소리다.
만약 저들이 갯벌이 나가면 괴물체의 표적이 될 터.
“에스퍼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언제까지! 인원을 더 충당하든가! 하루면 될 줄 알았는데 벌써 나흘째잖아! 대체 언제 끝난다고!”
이번에도 현장 지원팀 직원의 말은 다 끝나지도 못했다. 두 남자는 점점 더 격앙되어 갔다. 저러다가 직원의 멱살을 잡는 게 아닌가.
걱정된 희윤이 해승을 두고 일어서려고 할 때였다.
“머리 아파…….”
희윤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던 해승이 앓는 소리를 흘렸다.
“해승아, 괜찮아?”
희윤의 신경은 곧바로 그에게 향했다.
“형.”
희윤이 움찔하고 어깨를 굳혔다. 해승의 긴 팔이 허리를 감아 왔기 때문이었다. 체격 차이가 나는 거야 이미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폭 안기듯이 감길 줄이야.
심지어 목덜미에 닿아 온 온기는 분명 해승의 입술이었다.
“해승아.”
희윤은 차마 시선을 돌리지도 못하고 나직이 해승의 이름을 불렀다. 얼른 떨어지라는 의미를 담아서. 그러나 돌아온 건 살짝씩 비벼지는 매끄러운 감촉.
“표해승 가이드.”
희윤의 목소리가 좀 더 낮고 딱딱해지자, 해승이 딱 멈추었다. 그러나 정작 감았던 눈꺼풀을 들어 올린 눈동자는 웃음기가 배었다.
희윤으로서는 나름 엄격하게 굴었다고 생각하는 듯한데 그의 목덜미에서 나는 체향을 맡는 해승에겐 하나도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작은 동물이 안절부절못하고 눈치를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왜 이렇게 시끄럽죠? 머리 아프게.”
해승이 슬그머니 코를 살갗에 가져가며 투정 부리듯 말했다. 사실 아픈 것보다는 짜증이 났다.
희윤에게 기대어 좀 쉬어 보려는데 대체 누가 와서 정신 사납게 구는지.
기껏 무서운 척 제게 집중시킨 희윤의 관심을 가져간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변에 사는 주민분들 같아. 계속 기다리시다가 걱정이 되어서 오셨겠지.”
희윤이 불청객들을 변호하는 듯 꺼낸 말에 해승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갯벌에는 지금 그들을 대신해 목숨을 걸고 괴물체와 싸우는 에스퍼가 있다.
그런데 마치 이쪽이 대단한 잘못이라도 한 듯 따지는 이들을 옹호하는 건 우스운 일이다.
하지만 해승은 굳이 그런 말을 해서 희윤을 무안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죠. 저들에게는 갯벌이 생계 수단이니까. 그래도 너무하네요.”
“그러게. 아, 안 되겠어. 저러다가 직원이 다칠 것 같아.”
희윤은 잿빛 머리 남자가 현장 지원팀 직원의 어깨를 미는 걸 보고야 말았다. 절로 몸이 벌떡 일으켜졌다.
해승이 눈살을 찌푸리며 희윤의 팔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허무하게도 손끝에 잠시 닿았던 몸이 멀어졌다.
“당장 어떻게 좀 해 보라고! 언제까지 이렇게 불안하게 있으란 거야!”
기어이 현장 지원팀 직원의 어깨를 우악스럽게 움켜쥔 잡은 잿빛 머리 남자가 고함쳤다.
“어, 어어.”
현장 지원팀 직원이 당황한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아무리 저쪽에서 험악하게 굴어도 이쪽이 똑같이 대응할 수는 없었다.
저도 모르게 주변에 도움을 청하려 고개를 돌리던 현장 지원팀 직원은 성큼성큼 다가오는 희윤을 발견하고 살려 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어르신.”
빠르게 걸어온 희윤이 남자의 팔을 잡아 내렸다. 현장 지원팀 직원과 사람들 사이를 가르고 들어간 후 뒤를 지키듯 섰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넌 뭐야?”
팔을 잡힌 남자가 거칠게 흔들어 떼어 내며 소리 질렀다. 희윤은 그쪽을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물처럼 고요한 눈빛에 남자는 왜인지 조금 전처럼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저 거친 숨만 씩씩 내쉴 뿐이었다.
“걱정하시는 마음 잘 압니다.”
희윤이 남자와 그 뒤에 서 있는 다른 어부들에게 하나씩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눈빛만큼 조용하고 침착한 어투였다.
“그래서 저희도 화면이 보이는 것처럼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절로 대기실 한쪽을 채운 대형 모니터로 향했다. 그곳에는 거대한 괴물체 두 마리와 사투를 벌이는 에스퍼들의 모습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막 불 속성 에스퍼가 괴물체의 머리에 불화살을 내리꽂는 게 보였다. 괴물체는 고통에 몸부림쳤고, 에스퍼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길고 뭉툭한 꼬리에 맞아 허공으로 날아갔다.
“헉!”
보라색 모자를 쓴 남자가 놀라 헛바람을 삼켰다. 다른 이들도 표정을 굳히고 눈동자엔 공포가 서렸다.
“좀 더 믿고 기다려 주세요. 반드시 해결하겠습니다.”
희윤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긴말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흥분한 사람들을 주춤하게 하기 충분했다.
잠깐 사이에도 치열한 싸움이 화면에서 흘러나오고 있었으니까.
“우, 우리도 잘 알아요. 고생하고 있다는 거. 근데 자꾸 집도 흔들리고, 일도 못 하니 마음이 불안하다 보니까.”
옷을 구깃구깃 구기며 한 아주머니가 말했다. 그러더니 현장 지원팀 직원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던 잿빛 머리 남자의 팔을 붙들었다.
“민수 아빠. 더 방해 말고 갑시다.”
그 말에 민수 아빠라 불린 남자가 가슴을 크게 부풀렸다가 푹 꺼뜨리며 희윤을 봤다.
새까맣게 탄 얼굴이며 부리부리한 눈빛 때문에 대기실에 있던 에스퍼나 가이드는 또 시비가 붙는 게 아닌가 걱정했다.
“거. 잘 좀 부탁합니다. 그리고 조금 전 일은 미안했어요.”
거칠거칠한 사과를 끝으로 주민들이 대기실 밖으로 사라졌다. 그야말로 폭풍이라도 휩쓸고 간 듯 어수선한 분위기가 남겨졌다.
“하…….”
희윤은 한동안 출입구를 보다가 뒤를 돌았다.
“연희윤 에스퍼. 고맙습니다.”
그러자 현장 지원팀 직원이 푹 고개를 수그리며 인사를 전해 왔다. 얼굴에는 아직도 긴장감이 남아 있었다.
“아니에요.”
희윤이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하자 현장 지원팀 직원은 더욱 미안한 표정이 됐다.
“안으로 못 들어오게 해야 했는데 너무 막무가내로 들이닥치셔서.”
“그럴 수 있죠. 저분들이야…….”
각자 다 절실한 사정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겠는가.
희윤도 그런 경험이 있기에 이해했다. 1년 전부터 지금 사는 동네에도 재개발 바람이 불었다. 사실 워낙 낙후된 지역이라 주민 대부분 제 땅도 아닌 곳에 집을 지은 경우가 많았다.
그 때문에 재개발 회사에서 찾아오면 다들 화를 내고 어떻게든 동네에 못 들어오게 막았다.
그렇게 한참 대거리를 하고 난 날에는 온 동네에 우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가뜩이나 고단한 사람들에게 재개발은 터전을 빼앗으려는 재앙에 불과했으니까.
그런 모습을 보았기에 희윤은 생계 걱정에 이곳에 오게 된 이들의 걱정을 잘 알았다.
“형.”
그때, 등 뒤에서 따스한 기운이 느껴졌다. 동시에 어깨가 묵직하게 눌리며 온몸으로 묵직한 무게가 푹 기대어 왔다.
“윽.”
희윤은 눈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잡티 하나 없는 흰 얼굴이 온 시야를 차지하며 보였다.
“해승아.”
희윤이 곤란한 투로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떨어지기는커녕 해승은 예쁘게 웃으며 어리광부리듯 희윤의 머리에 코를 비벼댔다.
다시 또 주위에 경악한 기운이 넘실거렸지만, 해승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도리어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하는 현장 지원팀 직원을 보며 해승의 미소만 더 깊어질 뿐이었다.
희윤은 곤란한 한숨을 쉬다가 팔을 뒤로 뻗어 해승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머리칼에 웃음이 닿아 간질간질했다.
“너도 참.”
마치 어린 동생이 애교라도 부리는 듯해 희윤의 입가에도 웃음이 폈다.
그 순간.
엄청난 진동이 건물을 강타했다. 동시에.
위이이이이잉.
사이렌이 맹렬하게 울려 퍼졌다.
꽈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괴물체가 건물을 들이받았다. 다행히 조명이 흔들리는 것 외에는 셸터에 별다른 피해는 없었다.
“윽.”
대신 청바지를 입은 여성이 신음을 삼키며 눈을 찌푸렸다.
“도희 언니 괜찮아요?”
그 옆에 선 머리띠를 한 여성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상대의 안색을 살폈다.
“응. 와, 쟤 힘 엄청난데? 한 번 부딪친 거로 내 실드 내구도가 30%나 떨어졌어.”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에 희윤은 그녀가 방어 속성 에스퍼라는 걸 알아차렸다.
퍼억. 퍽. 꽝! 꽈앙!
괴물체가 몸통으로 꼬리로 연이어 건물을 내리쳤다. 그때마다 무시무시한 소리가 들려왔다. 비록 직접적인 타격은 없어도 그것만으로도 긴장감을 주기엔 충분했다.
“아니, 여긴 갯벌도 아닌데 어떻게 온 거야?”
“도망치다가 우연히 발견한 거 아니에요?”
“그보다 좀 어떻게 해 봐요! 이러다가 실드 깨지겠어요!”
안은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이곳에 남은 대기 조 에스퍼는 사실상 방어나 치유 속성 혹은 등 C, D급 에스퍼였다. 이들 중 고등급은 희윤이 유일했다.
“으윽.”
다시 한번 괴물체가 몸을 부딪치자 청바지를 입은 방어 속성 에스퍼가 휘청였다.
“언니!”
그 옆에 있던 머리띠를 한 가이드가 놀라 얼른 에스퍼의 손을 움켜잡았다.
“어떡해. 안정도가 너무 떨어졌어요. 이대로면 실드가 무너질 거예요.”
에스퍼의 스마트 워치를 살핀 가이드가 다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도움을 청하는 눈길에 또 다른 방어 속성 에스퍼가 나섰다.
마치 눈동자에 안개가 서린 듯 회색으로 변하더니 그와 비슷한 색깔의 반원형 막이 셸터 주변을 감쌌다.
“전 D급이라 오래 못 버텨요. 얼른 전투 조에 연락해 주세요.”
D급 에스퍼가 현장 지원팀 직원에게 다급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러자 직원도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무전기를 들었다.
“들리십니까! 여기는 셸터, 셸터입니다. 이곳에 괴물체가 나타났습니다!”
현장 지원팀 직원의 부름에도 반대쪽에서 돌아오는 말이 없었다. 지직, 지직하는 지저분한 신호음만 흘러나왔다.
그쪽도 괴물체를 상대하느라 무전을 들을 정신이 없는 것이었다.
“방어 속성 에스퍼 분들, 조금만 더 버텨 주세요. 전투 조에서 연락이 되어 올 때까지 버텨야 합니다.”
직원이 긴장한 얼굴로 무전기를 쥔 채 외쳤다. 그의 말이 아니어도 방어 속성 에스퍼들은 이미 밖을 주시하며 언제든 능력을 쓸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다들 C, D급이어서 그들보다 등급이 높은 괴물체를 장시간 상대하기는 어려웠다.
꽈아아앙. 꽝! 꽈광!
연이은 굉음이 이어졌다.
쩌적.
그러다 마치 얼음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꺄! 언니!”
동시에 처음 실드를 친 에스퍼가 뒤로 휘청하더니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손을 붙들고 있던 가이드가 놀라 비명을 질렀다.
“컥.”
중첩 실드를 만들었던 D급 에스퍼 역시 비틀거리더니 기어이 주저앉았다. 입가에서 한줄기 피가 흘러내렸다.
대기실을 감싼 회색 실드가 흐릿하게 변한 게 희윤의 눈에도 보였다.
“실드!”
직원이 소리치자 대기 중이던 나머지 에스퍼가 능력을 썼다. 여러 개의 실드가 금세 셸터 주위에 둘렸다.
마치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걸 알아차린 듯 괴물체가 공격적으로 부딪쳐 왔다. 아프지도 않은지 쉬지도 않았다.
“오, 오래 못 버틸 것 같아요.”
“아직 연락 안 됐습니까?”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두 에스퍼가 말했다. 이제 막 셸터를 실드로 감싼 에스퍼들이었다. 직원은 당혹감이 서린 얼굴로 연신 무전기를 눌렀다.
지직 지지직. 지직.
하지만 돌아온 건 여전히 연결되지 않은 듯한 소리뿐이었다.
“안 되겠어.”
해승에게 안겨 있던 희윤이 작게 말했다.
“형?”
해승이 불렀지만,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희윤은 그저 심각한 얼굴로 연신 건물을 부딪쳐 오는 괴물체와 질척한 갯벌만 바라보았다.
‘어떡하지.’
아무리 봐도 전투 중인 에스퍼들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거리가 멀기도 멀었고, 치열하게 싸우느라 무전도 받지 않고 있었으니까.
생각에 잠긴 희윤의 눈동자에 언뜻언뜻 푸른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마치 수면에 빛이 빛나는 것처럼.
“희윤 형.”
뒤에서 희윤을 끌어안고도 해승은 금세 희윤의 분위기가 달라진 걸 알아차렸다. 휙 소리가 나도록 희윤의 몸을 돌린 해승에게도 푸른빛이 도는 눈동자가 보였다.
“형.”
해승이 다시금 희윤을 불렀다. 아까보다 더 강하고 단호하게.
“아, 어.”
그제야 상념에서 깨어난 희윤이 눈을 끔뻑이며 시선을 해승에게 맞췄다.
“뭐 하려고요.”
살짝 굳은 눈빛과 달리 자상한 목소리가 들렸다. 희윤은 그에 안심하여 생각을 밖으로 꺼냈다.
“날려 버리면 어떨까 했어.”
“저걸요?”
“응. 최대한 멀리. 그럼 무서워서 도망치지 않을까?”
해승이 무슨 소리냐는 눈으로 희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희윤도 그 이상은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애초 그는 말을 잘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연희윤 에스퍼님. 뭔가 방법이 생각나셨습니까?”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는지 현장 지원팀 직원이 끼어들었다. 희윤이 그쪽을 돌아보았다.
“제가 능력을 써도 될까요?”
지난번 일로 지부장에게 혼난 경험이 있던 희윤이 물었다. 그러나 현장 지원팀 직원은 무슨 상관이냐는 얼굴을 했다.
“얼른! 당장요!”
두 손을 꽉 주먹 쥐고 파이팅 자세까지 취하는 걸 본 희윤이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형, 안 돼요.”
하지만 곧 해승이 희윤을 만류했다. 차가운 목소리에 현장 지원팀 직원이 흠칫 그쪽을 봤다가 저도 모르게 한걸음 물러섰다. 가끔 보면 해승은 가이드인데 에스퍼 못지않게 무시무시한 기세를 비칠 때가 있었다.
아마 다른 사람보다 월등한 키와 체격, 분위기 때문일지 모른다.
자연히 떠오른 망상은 해승의 살벌한 눈빛에 금세 휘발됐다.
“으악!”
“컥.”
둘의 대치는 비명과 신음에 깨어졌다. 가까스로 버티고 있던 C, D급 에스퍼의 실드가 괴물체의 공격에 금세라도 깨질 듯 희미해졌다.
괴물체가 한 번만 더 꼬리나 몸통으로 들이받으면 그대로 깨어질 듯했다. 희윤이 해승을 똑바로 보았다.
“하…….”
그 눈빛에 담긴 의지를 해승도 읽었다. 어깨를 붙들었던 손이 내려와 희윤의 손을 마주 잡았다.
“무리하지 말아요. 형 아직 스스로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모르니까.”
“응.”
응원을 받은 희윤의 얼굴이 밝아졌다. 곧 바깥을 살피는 낯이 진지하게 변했다. 어느덧 희윤의 눈동자에는 푸른빛이 넘실거렸다.
“어, 어어.”
처음 느껴진 건 습한 공기였다. 마치 장마처럼. 주변의 기운이 축축하게 젖어 가는 것처럼. 이윽고 시야에 부연 수증기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방어 속성 에스퍼들이 실드를 펼칠 때 보인 모습과 비슷하게.
몽글몽글 맺히던 물방울은 어느새 저들끼리 뭉치더니 금세 물줄기가 되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물줄기는 더더욱 부피를 키워 가 어느새 괴물체의 몸통보다 거대해졌다.
훈련장에서 만들어 낸 것보다 두 배는 더 크고 위협적인 크기였다.
괴물체가 건물을 박치기할 듯 튀어 오르던 순간, 몸집을 불린 채 무섭게 회전하던 물줄기가 괴물체를 옆에서 들이받았다.
캐애애액.
기괴한 소리가 울렸다. 물줄기는 들이받은 것에 끝나지 않고 괴물체를 낚아채 포물선을 그리며 멀리 날아갔다.
이윽고 물줄기가 그대로 갯벌에 내리꽂혔다.
꽈아아앙.
먼 거리에서 터진 굉음이 건물까지 전달됐다. 곧이어 부연 물안개가 셸터를 덮쳤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헉.”
누군가 헛숨을 삼켰다. 사람들의 시선은 단숨에 희윤에게 향했다.
- 무슨 일입니까!
현장 지원팀 직원이 움켜쥔 무전기에서 쩌렁쩌렁한 고함이 들렸다.
“아, 예! 여기는 셸터, 괴물체가 나타났습니다.”
나타났었다고 하는 게 맞는 걸까. 현장 지원팀 직원의 목소리에는 얼떨떨함이 담겨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희윤이 괴물체를 날려 버린 현장에 전투 조 에스퍼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아직 죽지 않은 채 퍼덕이는 괴물체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에스퍼들의 능력은 시야를 하얗게 물들일 정도로 화려하고 무시무시했다.
“희윤 형.”
어느새 희윤의 어깨에 긴 팔이 둘렸다. 허리 역시 마찬가지로 붙잡혀 뒤로 끌어당겨졌다. 단단하게 휘감긴 느낌에 희윤은 움찔 놀랐지만, 밀어내지는 않았다.
곧이어 가이딩이 시작되었다. 마치 성난 물결처럼 요동치던 제 기운이 조금씩 진정되어 가는 게 느껴졌다.
“진짜 엄청나네요.”
하지만 그보다 희윤을 더욱 꼼짝 못 하게 한 건 따로 있었다. 제 귓가에 흘러들어 오는 목소리였다.
다정하면서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러면서도 어딘지 기쁨이 해승의 음성에 담겨 있었다.
“어쩌지.”
저 심장이 뛰어요. 해승이 희윤에게만 들릴 정도로 아주 작게 속삭였다. 그건 희윤도 마찬가지였다.
제 등에 닿은 몸에서 박동이 전해졌다. 마치 그에 동조라도 하듯 제 심장도 ‘쿵. 쿵.’ 울리기 시작했다.
해승은 제품이 얌전히 안긴 사람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누가 이 사람을 이제 갓 각성한 에스퍼라고 생각할까.
A급 물 속성이라고?
아니, 어쩌면 희윤은 그 이상일지 모른다. 해승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대기실에 있는 이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하나같이 놀라고, 당황하고,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들이었다.
그러면서도 한시도 이쪽에서 관심을 끊지 못하는 얼굴을 보면서 희윤의 몸을 더 바짝 당겼다.
이 사람은 내 에스퍼라고.
모두에게 확실하게 인식시키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