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첫 호텔에서의 휴식은 희윤에게 편안함과 어색함과 난처함을 선사하고 끝났다. 다음 날 오후 집으로 돌아온 희윤은 느른한 얼굴로 제 방을 둘러보았다.
“역시 집이 제일이네.”
분명 호텔의 생활은 좋았다. 침대는 숙면하기에 딱 적당할 만큼 편했고, 저녁은 풍성했으며, 아침은 다양한 종류를 마음껏 즐겼다.
그런데도 어딘지 맞지 않는 옷처럼 부자연스럽고 내내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건 어쩌면 같은 객실에서 지낸 해승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너무 잘해 줘서 부담된 거지.”
이틀 동안 해승은 마치 희윤에게 손이 없는 것처럼 모든 걸 가져다주었다. 저녁에 나온 스테이크를 썰어 주었고, 거대한 바닷가재의 살을 발라 주었으며, 처음 마셔 본 와인을 계속 잔에 채워 줬다.
아침에도 뷔페에 익숙하지 않은 희윤을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며 음식을 날라다 주었다.
“하아…….”
몸을 빙글 돌려 반대쪽으로 누웠다. 알딸딸하게 취한 채로 침대에 누웠을 땐, 해승은 희윤에게 안마를 해 주겠다며 기겁할 소리를 하기도 했다.
이리 누워도 어제 일을, 저리 누워도 해승과의 일이 떠올랐다.
희윤은 결국 벌떡 일어나 앉았다. 대체 왜 자꾸 호텔에서의 일이, 아니 정확히는 해승과 있던 하루가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청소, 청소나 하자.”
아무래도 다른 데 신경을 돌려야겠다는 생각에 희윤은 해가 떨어질 때까지 부지런히 움직였다.
온 집 안을 다 헤집을 듯 물건들을 꺼내 쓸고 닦고, 정리한 후 간단히 저녁을 먹고 나서는 어둑해진 동네 골목을 산책 삼아 돌았다.
그러다 늦은 시간까지 불이 켜진 슈퍼를 보고는 그리로 걸음 했다가 예상치 못한 사람이 평상에 앉아 있는 걸 발견했다.
“해승아?”
해승이 저를 부르는 소리가 돌아보았다. 그는 막 마시려던 탄산음료 캔을 내리고 웃었다.
“형.”
“너 이 시간에 여기서 뭐 해?”
희윤은 한달음에 해승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곧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설마 너, 계속 여기에 있었어?”
왜인지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어 물었다. 그러자 해승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냥. 야경이 예쁠 것 같아서요.”
생각도 못 한 말에 희윤은 눈을 끔뻑였다.
“하긴. 여기서 보는 풍경이 좋기는 하지.”
이 동네의 유일한 장점이라면, 지대가 높다는 것. 그래서 커다랗고 높은 건물이 있는 도심을 멀찍이 조망할 수 있다는 점이다.
희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해승의 옆에 털썩 앉았다. 이러고 있으니 또 며칠 전의 일이 생각났다.
“자요, 형.”
해승이 불쑥 앞으로 캔을 내밀었다. 희윤은 별생각 없이 그것을 받아다가 입술을 댔다. 턱을 살짝 들고 입 안으로 탄산음료를 흘려보내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눈만 굴려서 그쪽을 보자 해승이 바라보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여전히 싱글싱글 웃는 낯이었다.
두 사람은 탄산음료 한 캔을 나란히 비우며 조용히 야경을 감상했다. 그러고 나니 유독 수런거리던 하루가 편안하게 마무리되는 것 같았다.
“형.”
“응?”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형도 어떻게 할지 잘 정리해야 해요.”
“뭘?”
희윤이 어리둥절하게 물었으나 해승은 또 모호한 미소만 보여 주었다. 희윤은 한 번 더 물어볼까 하다가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어차피 형이 선택할 건 하나니까.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요.”
해승은 또 의미 모를 소리를 흘렸다. 희윤은 이번엔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뭐가 되었든 지금은 전부 해승이 원하는 대로 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 *
다음 날 평소와 비슷한 시간에 출근하던 희윤은 입구를 가득히 메운 인파를 보고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커다란 카메라며 마이크, 스마트폰을 하나씩 들고 있는 그들은 아무리 봐도 방송사나 신문사에서 나온 사람들처럼 보였다.
‘대체 무슨 일이지?’
희윤은 고개를 갸웃하며 본부로 들어가기 위해 인파가 몰려 있는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걸음 걷지도 않았을 때였다.
돌연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희윤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번뜩이는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전투적으로 느껴졌다.
“실례합니다. 혹시 서울지역 중앙지부 소속 에스퍼신가요?”
마이크 하나가 희윤의 얼굴 가까이에 쑥 들이밀어지며 질문이 튀어나왔다. 희윤이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기자의 눈이 빛났다.
“서해만 갯벌 전투에 참여하셨죠?”
이번에도 희윤은 이게 뭔가 하는 얼굴로 작게 고갯짓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기자들이 일제히 희윤을 둘러싸고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본부에 새로운 물 속성 에스퍼가 있다고 하던데 누군지 아십니까?”
“서해만 갯벌에서 활약한 물 속성 에스퍼의 이름이 뭔지 아시나요?”
“그 에스퍼의 등급은 어떻게 되나요? 어디 사는 누구인가요?”
희윤은 당황하여 주위를 둘러봤다. 양쪽에서 쉴 틈도 없이 쏟아지는 말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뭔가 귀로 흘러들어 오는데 뭐라 하는지 닿지도 않았다. 그저 번쩍번쩍 쏟아지는 플래시와 온갖 목소리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희윤은 그저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그때였다.
“실례하겠습니다.”
낭랑한 음성과 함께 사람들 사이에서 불쑥 팔이 삐져나왔다. 침입해 들어온 손은 재빠르게 희윤을 붙들었고, 그대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어?”
“어어…….”
순식간에 희윤은 사람들 틈바구니를 헤치며 앞으로 걸어가게 되었다. 정신없이 끌려가던 중에 자신을 잡은 사람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선배!”
안효정이었다.
“일단 도망가죠. 자세한 얘기는 들어가서 하는 게 좋을 것 같으니까.”
안효정이 돌아보지 않은 채 말을 던지고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희윤은 뒤를 살폈다가 휙 소리가 날 만큼 고개를 돌리고는 앞으로 향했다.
빠져나온 게 용할 정도로 그곳에는 어마어마한 인파가 아직 그대로 있었다. 다행인 것은 그들은 마치 방어막이라도 쳐진 듯 본부 안으로는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하…….”
한참 말없이 앞서 걷던 안효정이 기나긴 한숨과 함께 멈추어 섰다.
“연락은 왜 안 받아요.”
“아.”
안효정의 말에 희윤은 당황하여 주머니에 넣어 둔 스마트폰을 꺼냈다. 평소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이 거의 없다 보니 신경도 쓰지 않았기에 무음으로 되어 있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죄송해요, 선배. 연락 온 줄 몰랐어요.”
“에구. 어쩐지. 불안해서 얼른 출근했더니. 이미 난리더라.”
“전화 많이 하셨네요.”
희윤이 최신 목록을 살피며 말했다. 안효정 말고도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도 몇 건이나 쌓인 게 보였다.
“혹시 평소에 인터넷 잘 안 해요?”
“인터넷이요?”
“응. SNS나 뭐 카페나 커뮤니티를 들어가 본다거나.”
“아뇨.”
원래도 스마트폰과 그다지 친하지 않긴 했다. 고작해야 메신저 앱을 이용하거나 전화나 문제를 쓰는 정도.
하다못해 인터넷 기사도 잘 찾아보지 않았다.
“그랬구나…….”
안효정이 쯧쯧 혀를 차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곧바로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이 다 안으로 들어가자 안효정은 가장 꼭대기 층을 눌렀다.
“그…… 원래 현장에 출동하면 매스컴이 따라붙어요. 아무래도 에스퍼의 전투는 여러모로 특종이니까.”
안효정은 전광판 숫자가 바뀌는 걸 확인하며 입을 열었다. 희윤도 그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왜 이런 소리를 하는 걸까 생각해 봤다.
“서해만 갯벌 때도 그랬어요. 그때도 드론이 몇 대나 날아다니고 있었어요. 근데 그게 매스컴 장비만 있는 게 아니에요. 가끔 개인 방송한다는 사람들이 날리기도 하거든.”
안효정이 못마땅하다는 듯 쯧 혀를 찼다.
“정말로 가끔 이해가 가지 않을 때가 있어. 대체 그 위험천만한 전투지를 왜 올까.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이어진 말은 신랄한 비판이었다.
“이번도 그래. 숨을 데도 없는 갯벌인 데다 괴물체가 지진까지 일으켰잖아. 그 여파가 육지까지 미쳤는데 거길 꾸역꾸역 숨어들어 와서 촬영했다니 정신이 나간 게 아니고서야 그럴 수 있나요?”
그간 개인적으로 촬영하는 사람들에게 안효정은 어지간히 쌓인 게 많은 듯했다.
“어쨌든 그러다 보니 인터넷 개인 방송 영상에 희윤 씨가 괴물체를 물로 만든 회오리로 한 방에 갯벌에 처박은 게 그대로 찍혔나 봐.”
“아…….”
그제야 희윤은 안효정이 왜 긴 이야기를 꺼냈는지 알아차렸다. 자신이 능력을 사용한 모습이 아무래도 인터넷에 고스란히 노출된 듯했다.
“하필이면 그게 새벽 4시에 올라가는 바람에 본부 홍보팀에서도 전혀 몰랐다고 하네.”
“그랬군요.”
“다행인 건 아직 에스퍼의 정체를 모른다는 거야.”
“다행이네요.”
희윤이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효정은 그 무덤덤한 모습에 “허.” 하고 숨을 흘렸다.
“가끔 보면 놀랍다니까.”
“네?”
희윤의 어리둥절한 눈을 보며 안효정이 이번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본인은 아마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스스로 얼마나 대담한지.
솔직히 안효정은 아까 본부로 나갔을 때 수많은 기자와 카메라를 보고는 움찔했다. 무시무시한 괴물체를 상대할 때와는 또 다른 분위기에 압도되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괴물체보다 빽빽하게 있는 인파가 더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 있던 희윤은 표정 하나 달라지지 않은 채였다. 그저 묵묵히 그들을 돌아보면서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나 고민하는 것 같았다.
“아냐. 일단 내리자.”
‘어째 본부에 오면 사무실 못지않게 여길 자주 오는 것 같은데.’
희윤은 지부장실이라고 쓰인 현판을 보며 생각했다.
“음, 요즘 참 자주 보는 것 같죠. 연희윤 에스퍼?”
마치 희윤의 생각이라도 읽은 듯 눈을 마주친 지부장이 말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창문을 등지고 있었다.
아마 희윤이 오기 전 본부 밖에 포진해 있는 기자들을 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지부장님.”
희윤이 얌전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자 지부장의 입꼬리가 아래로 축 처졌다.
“그래요. 연희윤 에스퍼. 안녕은 하죠. 좀 놀라긴 했지만, 그게 뭐 연희윤 에스퍼의 잘못이겠어요.”
비난을 살짝 섞은 듯한 지부장의 말에 희윤은 곤란한 눈빛을 했고, 안효정은 눈살을 찌푸렸다.
“서해만 갯벌에서 대단한 활약을 했다고요.”
아, 그게 지부장에게 보고된 건가. 그래서 출근하자마자 안효정이 와서 이리로 데려온 건가 보다.
혹시 또 경위서를 써야 하나. 본부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두 번이나. 이게 혹시 안효정에게 피해가 되는 게 아닌가 싶어 희윤이 서둘러 말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연희윤 에스퍼 아니었으면 건물은 망가지고 안에 있는 사람들도 많이 다쳤을 텐데요.”
지부장이 미간을 엄지로 꾹꾹 누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무엇보다 사용한 능력도 남달랐잖아요.”
희윤은 그 말에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침묵을 지켰다. 지부장은 그런 희윤을 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물론 물 속성도 개인 성향에 따라 나타나는 능력이 다르긴 한데, 난 또 이런 건 처음 봤네. 그 영상 지금 외국에서도 화제인 거 알아요? 에스퍼넷이라고 전 세계 에스퍼들이 활동하는 사이트가 있는데 거기서도 반응이…….”
“지부장님. 중요한 건 그게 아닌 거 같은데요.”
대화가 옆길로 조금씩 샛길로 빠지는 걸 보다 못한 안효정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아, 아아. 그래. 맞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지.”
지부장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본론을 꺼냈다.
“어쨌든 하필 그 장면이 개인 방송에 나오는 바람에 지금 좀 주변이 시끄러워졌어요. 연희윤 에스퍼도 출근하면서 잠깐 만났죠?”
“아.”
희윤은 입구에서 저를 둘러싸고 있던 기자들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연희윤 에스퍼에 관한 정보는 유출이 안 됐는데 알다시피 요즘 워낙 다들 정보력들이 좋다 보니까 어떨지 모르겠어요. 상황을 지켜봐야 하는데, 유사시 본부에서 마련해 준 숙소에 있어야 할지 몰라요. 괜찮죠?”
“네. 그보다 또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니다.”
머리까지 숙이면서 사과하는 희윤을 본 지부장이 당황하여 손까지 내저었다.
“뭐, 상황이 상황이었으니까. 연희윤 에스퍼로서는 그때 최선을 다한 거라고 봐요. 일단 지금은 좀 지켜보죠.”
“알겠습니다.”
대화는 그것으로 끝나는 듯했다.
“근데 연희윤 에스퍼, 어떻게 그런 방법으로 능력을 사용했어요?”
지부장이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아, 그게. 그냥…….”
그 눈빛을 본 희윤은 괜히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목뒤를 손으로 어루만졌다. 정말 별것 아니었는데.
“전에 훈련장에서 선배님과 물줄기를 만드는 걸 연습했었거든요. 그걸 응용해 봤어요. 그때는 여러 갈래로 만들었으니까 이번에는 반대로 하나를 크게 부피를 키우는 건 어떨까 해서.”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물방울이 맺히는 순간을, 그 물방울들이 물기둥이 되어 빠르게 회전하는 장면을.
마치 허리케인처럼.
한 번 해 봤던 일이라 생각했던 것보다 능력을 빠르게 결과를 만들어 냈다.
“허……. 그냥 그런 생각만으로 만들어졌다, 이거죠? 괴물체를 휘어 감고 날려 버린 건요?”
“그것도 그냥…… 물건을 멀리 던지는 느낌으로 상상을 했어요.”
희윤은 무언가를 붙잡아 던지는 것처럼 주먹을 움켜쥐고 팔을 크게 휘둘렀다. 그러다가 민망한지 입가 주변을 손바닥으로 쓱쓱 문질렀다.
지부장이 정말 놀랐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니, 마치 대단한 일이라도 벌인 것 같지 않은가. 하지만 희윤이 생각하기에 그건 그리 특별하지도 않았다.
널찍한 갯벌을 하얗게 얼려 버리는 빙결 속성이나 허공을 날아올라 괴물체를 공격하는 불, 바람 속성 에스퍼를 화면으로 보았으니까.
“이런 경우는 정말 없는데. 하긴 성인 각성이 A급인 것도 특이하긴 했지. 참, 여러모로 연희윤 에스퍼가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네요.”
지부장은 고개까지 저으며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가 이 자리에 올라온 이후로 이런 경우는 정말 처음이었다.
“그래서 연희윤 에스퍼, 지난번 했던 검사 기억하지요?”
“심층 검사요.”
“네. 그와 비슷하지만 조금 더 구체적인 검사를 해야 할 것 같아요. 연희윤 에스퍼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우리도 좀 파악해야 해서.”
“네.”
그런 거라면 희윤도 얼마든 협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하루빨리 가이딩 가능한 인력을 추려야 하니까. 당분간은 훈련을 좀 줄이고, 힘들더라도 빡빡하게 매칭 테스트 가도록 할게요.”
매칭 테스트라는 말에 희윤은 저도 모르게 해승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도 같이 앉아 야경을 보았는데……. 주머니에 손을 넣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해승도 본부 앞에 포진해 있는 무리를 보았을 것이다. 당황하지는 않았는지 혹시 그에게도 피해가 가지는 않았는지 연락해서 물어보고 싶었다.
“좋아요. 그럼 연희윤 에스퍼. 지금 곧장 EST실로 가세요.”
용건이 끝났는지 지부장이 상황을 정리했다.
“네.”
희윤은 꾸벅 인사하고 안효정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안효정도 지부장에게 인사를 전하더니 희윤과 마주 보다가 먼저 돌아섰다. 희윤 역시 그녀를 따라 지부장실을 나왔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살짝 액정을 내려다보았다.
해승에게 따로 연락 온 건 없었다. 안효정이 스마트폰을 확인하는 희윤에게 말했다.
“표해승 가이드는 오늘 다른 일정이 있어서 출근 안 할 거예요.”
그리고 무슨 일 있냐는 듯 바라보는 희윤의 시선이 말을 덧붙였다.
“자세한 건 나도 모르고 개인적인 일이라고 하던데.”
오히려 이쪽에서는 다행이죠. 안효정은 뒷말을 조용히 삼켰다. 요즘 본부에서는 해승이 희윤을 데리고 다니며 티를 내서 두 사람이 곧바로 전담을 맺는 게 아니냐는 말이 돌고 있었다. 전담뿐 아니라 사귀고 있는 게 아니냐는 어이없는 소문도 있었다.
오죽했으면 희윤과 매칭 테스트를 앞둔 가이드들이 안효정에게 연락해서 ‘연희윤 에스퍼와 검사해도 괜찮은 건가요?’ 그렇게 물어보기까지 할까.
“그랬나요.”
“네. 뭐 종종 그런 적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고, 둘은 곧장 6층으로 이동했다. 움직이는 중간중간 힐끔힐끔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본부 사람들은 몰려든 기자들이 찾는 에스퍼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다. 그곳에서 희윤의 활약상을 본 이들이 많았으니까.
그래서 말을 걸고 이것저것 묻고 싶지만, 혹시 어딘가에 해승이 있지 않을까 해서 망설이는 중이었다. 물론 희윤은 그런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고, 안효정은 알고 있지만 모른 척했다.
“희윤 씨, 먼저 들어갈래요? 전화 좀 받고 갈게요.”
막 605호 문을 열고 들어가려면 희윤이 안효정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손에 들린 스마트폰이 진동하는 게 보였다. 희윤은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하고 문을 열었다.
“연희윤 에스퍼, 오셨어요?”
연구원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네. 안녕하세요.”
“갯벌에서 활약했다는 소식 들었어요.”
희윤은 무어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눈만 깜빡였다.
“밖에 기자들이 정체 알아내려고 혈안이던데 조심해요. 알려졌다간 아주 끈질기게 따라붙을 테니까.”
“네.”
“뭐 지금은 얼른 매칭 테스트를 마치는 게 중요하겠죠. 사실 상부에서도 어제 연희윤 에스퍼의 능력을 확인하고 현장에 빨리 투입하자는 얘기가 나오고 있거든요. 지부장님이 아직 담당 가이드가 정해지지 않았다고 하니까 그럼 테스트를 더 많이 하면 되는 게 아니냐고 억지를……. 흠흠. 어쨌든.”
연구원은 이런저런 얘기를 꺼내더니 손에 들린 파일을 내려다보다 조금 안쓰러운 눈빛을 했다.
“이번에는 꼭 70% 이상 되는 매칭률이 나오면 좋겠네요.”
그러면서 파일에서 눈을 떼는 게 꼭 무언가를 외면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미 한 분 계시잖아요.”
희윤이 해승을 떠올리며 말했다. 왜인지 친분이 있다는 걸 티 내면 안 될 것 같아서 말도 좀 더 거리감이 느껴지게 했다.
하지만 연구원은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설마 표해승 가이드 염두에 둔 건 아니죠? 그래요. 뭐 표해승 가이드가 S급이니까 대단하긴 하죠. 그래도 아직 포기하지 말아요. 그러기엔 일러. 아직 연희윤 에스퍼가 테스트할 가이드가 스무 명이나 남았는데!”
연구원의 얼굴이 마치 전투에 참여하는 장수처럼 비장하게 변했다.
“자, 연희윤 에스퍼. 얼른 들어가요. 지금 당장 시작해 봅시다. 분명 더 좋은 결과가 나올 겁니다!”
희윤은 연구원의 기세에 얼떨떨하게 검사실로 들어섰다. 안에는 희윤과 테스트할 가이드가 앉아 있었고, 둘은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을 마주 잡았다.
곧 검사를 시작했다. 어색하고 조용한 분위기가 흘러가던 그때.
꽝.
엄청난 소리가 검사실 밖에서부터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