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윤은 동그랗게 눈을 뜨고 검사실 바깥을 봤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가이드도 긴장한 채 고개를 돌렸다.
가이드의 시선이 막 검사실 문에 닿던 순간 거칠게 문이 열렸다.
“표해승 가이드. 뭐 하는 거예요!”
문틈으로 연구원이 고함이 들려왔다. 거의 동시에 눈길을 사로잡는 미인이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새로 등장한 사람이 해승이라는 걸 확인한 가이드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이미 얼굴색은 희게 질려 있었다.
“저, 저, 저기…….”
긴장한 중에도 가이드는 어떻게든 해승에게 제 상황을 설명하고자 입을 열었다.
“희윤 형.”
하지만 해승은 가이드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희윤만 보았다. 정확히는 희윤과 가이드가 마주 잡은 손을.
순간 해승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그걸 본 가이드가 딸꾹질을 시작했다.
“희윤 형. 여기 있었네요?”
해승은 불쾌한 기분을 애써 누르며 희윤을 보았다. 그러지 않으면 저도 모르게 화를 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제 마음도 모르고 희윤은 딱딱하게 그를 불렀다.
“표해승 가이드.”
심지어 말투에 한숨까지 섞여 있었다.
“또 그렇게 부르시네요.”
투정 부리듯 나온 말에 희윤은 “아.” 하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가이드도 놀라서 입을 벌렸다가 딸꾹 하는 소리가 너무 크게 나와 “합.” 하고 입을 다물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을 감춰야 하는데!
“어떻게 이러실 수 있어요…….”
해승이 그렇게 말하며 한 걸음 내디디며 말했다. 위협을 느낀 가이드가 벌떡 일어났다.
우당탕.
의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넘어졌다. 해승의 시선이 가이드에게 곧장 날아갔다.
꺼지라는 눈빛을 어렵지 않게 알아낸 가이드가 먼저 가겠다는 소리를 던지듯 꺼내 놓고 후다닥 검사실을 뛰어나갔다.
“희윤 형.”
희윤은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 잠깐 움찔했다.
“어떻게 하루 만에 이럴 수 있어요.”
뭐가? 희윤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물었다. 하지만 해승은 대답 대신 다른 가이드가 잡았던 희윤의 두 손을 제 손아귀에 감싸 쥐었다.
표정이며 눈빛도 애틋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그 모습을 본 연구원은 어이없어했지만, 해승에게 시야가 가려진 희윤은 알 수 없었다.
“그냥 테스트를 받으러 온 거야.”
희윤이 붙들린 제 손에서 시선을 떼 해승과 마주하며 말했다.
“왜요?”
“응?”
“왜 받았냐고요.”
“그거야…….”
말할 필요 없는 일이다. 해승이라고 모르지 않을 거다. 앞으로 능력을 쓰려면 가이딩은 필수니까.
그래서 당연한 말만 말했다. 하지만 돌아온 건 왜냐는 물음이었다. 희윤은 다시 입을 열었으나 한마디도 뱉지 못했다.
해승이 제 손등에 볼을 비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놀라 움찔하는 사이에 이번엔 손가락이 사이사이 깍지가 끼워졌다.
“해승아.”
“네, 희윤 형.”
대답하는 목소리가 무척 달았다. 하지만 희윤은 덤덤하게 말했다.
“손 풀어 줘.”
해승은 뿔이 난 듯 입술을 비죽거리다가 얌전히 손을 물렸다. 희윤은 그 모습을 귀엽게 보다가 일단 용건을 말했다.
“나 테스트는 해야 해.”
“필요 없잖아요. 이미 나랑 했는데.”
이번엔 허리에 팔이 감겼다. 희윤은 곧장 떼어 내려다가 부드럽게 흘러들어 오는 기운에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생각하면서도 제 속을 달래 주는 듯한 느낌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게 본부 방침이니까.”
그래도 해야 할 일은 해야지 않겠는가. 희윤은 이래 봬도 성실했고, 책임감이 강했다. 그래야 할머니와 단둘이 가난하게 살아 삐뚤어졌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니까.
“글쎄요…….”
희윤을 품에 안은 해승이 작게 속삭였다. 어느새 해승의 눈빛은 서늘하게 변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연구원은 저러다가 무슨 사고가 나는 게 아닌가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희윤은 둘 다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곤란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역시 제가 너무 물렁물렁하게 굴어서 그런가. 어쩐지 해승이 저에게 점점 잘못된 집착을 하는 것 같았다.
문제는…… 그게 또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제게 있었지만.
* *
뒤늦게 나타난 안효정은 돌아가는 상황을 알아채자마자 길길이 화를 냈다. 급기야 해승의 멱살까지 잡으려고 손을 뻗어 왔다. 희윤이 혼비백산하여 앞을 막아섰다.
퍽.
멱살잡이하려던 안효정의 주먹이 어쩌다 보니 희윤의 가슴을 강하게 쳐 버리고 말았다.
“헉!”
맞은 희윤보다 안효정이 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희윤 씨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어휴, 미안해요. 아니, 왜 위험하게 앞을 막았어요.”
“해승이는 가이드잖아요.”
가이드의 신체는 에스퍼보다 약하다. 거의 일반인에 가깝다고 알고 있으니 보호하는 게 당연했다.
무엇보다 거의 본능적으로 한 일이었다. 해승을 지켜 줘야 한다는 생각에.
“쟤 유단자라니까요.”
안효정이 희윤의 뒤에서 빙글빙글 웃고 있는 해승을 노려보았다.
“그래도 에스퍼보다는 약해요.”
희윤이 좀 더 단호하게 말했다. 안효정은 할 말 많은 얼굴로 그런 희윤을 봤다. 대체 표해승이 어떻게 홀려 놨는지 모르겠다.
‘웬만한 D급 에스퍼보다 더 튼튼하고 강한 게 저 가증스러운 놈인데.’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래. 내가 잘못했어요. 어쨌든 아까 제대로 검사 결과도 안 나왔다면서요. 다시 불러와서…….”
“9.3%”
안효정이 채 말을 끝내기도 전, 해승이 툭 끼어들었다.
“뭐?”
무슨 소리냐는 얼굴에는 눈짓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안효정은 짜증스러운 눈으로 그쪽을 보았다. 화면에 매칭률이 떠 있었다. 조금 전 있던 가이드와 진행한 검사 결과였다.
“결과는 떴네요.”
비웃는 말투에 눈꼬리를 휘며 웃는 모습에도 조소가 가득했다. 진짜 짜증이 나서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지부장님 특별 지시야. 그러니까 방해하지 마. 아니 그보다 일이 있다고 들었는데 대체 어떻게 왔어요?”
“잘 끝내고 왔죠. 언제부터 안효정 에스퍼가 제 일이 이렇게 관심이 많으셨을까?”
해승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말했다.
“관심 없거든요? 그냥 지부장님한테 들은 거지!”
관심은 없어도 해승이 자리를 비웠을 때 희윤에게 매칭 테스트를 시키려 했던 안효정이 바락 소리를 질렀다.
“흠……. 대체 무슨 작당들일까.”
해승이 가늘게 뜬 눈으로 안효정을 봤다. 저를 악당 취급하는 태도에 그녀의 분노도 치솟았다.
“작당이라니! 에스퍼에게 필요한 담당 가이드를 찾기 위한 일인데.”
“글쎄요. 그거 별로 소용없을 것 같지 않아요? 벌써 반 이상을 했는데 이 지경이면.”
“그거야 모르지! 연구원님! 다음!”
안효정이 휙 소리가 날 만큼 고개를 돌려 연구원을 보았다. 눈동자가 전투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아, 아아. 알았어요. 다음 사람 바로 연락할게요.”
안효정의 박력에 연구원이 고개를 끄덕이고 곧장 내선 전화를 들었다. 그러다 뒤늦게 해승이 생각나서 그쪽을 힐끔 봤다.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희윤의 어깨를 끌어안은 해승이 이미 그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 없게 잔잔하고도 어둑한 눈빛이었다.
오히려 그게 더 연구원을 불안하게 했다.
“어, 정소한 가이드. 여기 605호입니다. 네, 네. 지금 바로 이쪽으로 와 주세요. 네, 곧 뵙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연구원이 ‘흠, 흠.’ 목을 가다듬었다.
“지금 온다고 하니까 표해승 가이드는 자리를 좀…….”
“그냥 해요.”
자리를 비켜 달라는 말은 다 나오지도 못한 채 잘렸다. 해승이 굳이 그럴 필요 있느냐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연구원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제가 말한다고 들어줄 놈은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곧 희윤에게 향했다.
“해승아.”
“싫어요.”
그냥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 투정 같은 말이 돌아왔다.
“어차피 전에도 테스트하는 거 지켜봤잖아요. 왜 이번에는 나가라고 해요?”
“아.”
그러네. 희윤은 제가 검사할 때 밖에서 지켜보고 있던 해승을 어렵지 않게 떠올리고 말았다. 연구원은 맥없이 해승에게 져 버린 희윤을 보고 속으로 쯧쯧 혀를 찼다.
아무리 봐도 저쪽은 이미 튼 것 같았다. 완전 해승에게 꽉 붙들리지 않았는가. 뭐 본래도 에스퍼들은 가이드들에게 좀 약한 편이었다.
자신들을 안정시켜 줄 존재이다 보니 심적으로 보호하려는 성향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설마 진짜 전담까지 가진 않겠지?’
연구원도 소문은 익히 알고 있었다. 희윤과 해승의 사이가 심상치 않다고. 저렇게 유난하게 티를 내는 것을 보니 자꾸만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해승이 누구던가.
수많은 에스퍼의 열렬한 구애는 무시하고, 매칭률은 바닥을 치는 존재.
‘아무렴.’
역시 그럴 리 없겠지. 어쨌든 보통 매달리는 건 에스퍼 쪽인데 이상하게 가이드인 해승이 더 희윤에게 집착하는 것같이 보이니 더더욱 말이 안 된다.
연구원은 애써 제가 생각한 걸 외면했다.
“실례합니다. 가이드 4팀 정소한입니다. 매칭 테스트를 받으러 왔는데요.”
그때 문이 열리며 온화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 정소한 가이드. 왔군요. 이쪽으로 오세요.”
연구원은 새로 등장한 가이드에게 반색하며 손짓했다. 가이드는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희윤에게 몸을 기대다시피 안고 있는 해승을 봤다.
“표해승 가이드가 있네요?”
껄끄러워하는 말투였다.
“아, 이쪽은 신경 쓰지 말아요.”
연구원은 혹시 가이드가 조금 전처럼 도망가는 게 아닌지 걱정되어 서둘러 안쪽으로 들어가라고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