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식사 후 두 번째 가이드와 검사를 마치고 잠시 쉬는데 지부장이 연구실로 왔다.
“정소한 가이드와 매칭률이 잘 나왔다면서요?”
“네.”
“다행이네.”
지부장은 미간을 엄지로 꾹 누르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조금 전 검사가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도망치는 가이드와 605호 앞에서 딱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표해승. 대체 뭘 어떻게 행동했기에 가이드마다 전부 저런 식이야.”
“아주 그냥 진상도, 그런 진상이 없었죠. 아까도 검사실로 난입해 들어가서 행패 부렸어요.”
지부장이 마땅치 않다는 듯 꺼낸 말에 안효정이 냉큼 대꾸했다.
“뭐? 또?”
“네. 또. 그러니까 지부장님이 좀 마크 잘해 주세요. 가뜩이나 바쁜데 그럼 어떡해요.”
그러면서 안효정의 시선이 힐끔 희윤에게 향했다. 지부장도 희윤 쪽을 보다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뭐, 당분간 걔도 나도 바쁠 거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
“그럼 다행이고요.”
“다행이긴. 난 걱정된다고. 표해승이 또 뭐라고 트집을 잡으려는지!”
“설마요.”
“설마는. 그 자식, 꼭 이럴 때만 제가 수호 그룹 사람이라는 거 티를 낸다니까?”
“그거야 어쩔 수 없죠. 고문 이사잖아요?”
“그니까. 지가 이사면 이사지. 그게 뭐라고! 아니, 것도 그래. 본부 소속 가이드가 겸직이 웬 말이야.”
희윤은 대화하는 지부장과 안효정을 번갈아 보았다. 해승이 주제로 나오니 절로 관심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건 지부장님이 승인한 거라면서요?”
“하……. 그랬지. 내가 왜 그랬을까?”
“왜긴요. 표해승이 이사직에 앉아 있으면 본부에 더 유리하게 협상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러신 거죠.”
“과거의 나를 매우 치고 싶네.”
지부장이 썩은 얼굴로 말을 뱉어 냈다. 그건 희윤으로서야 알 바는 아니고. 그저 새로 알게 된 정보가 흥미로웠다.
“해승이가 수호 그룹 고문 이사인가요?”
불쑥 끼어든 목소리에 지부장과 안효정이 동시에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제야 그들은 이곳에 희윤도 있는 자리라는 걸 깨달았다.
“맞아요.”
눈빛을 빠르게 교환한 두 사람 중 입을 연 건 지부장이었다.
“연희윤 에스퍼도 알겠지만. 표해승 가이드가 수호 그룹 오너가 자제거든.”
전혀 몰랐던 희윤은 이번에도 눈만 깜빡였다. 표정이 그대로라 지부장은 희윤이 당연히 알고 있다고 여겼다.
“특히 그룹 총수인 표 회장의 손자 사랑이 대단해. 그, 표해승 가이드가 8살에 각성했다는 건 알죠?”
“네…….”
“검사하려고 본부로 왔을 때 직접 표해승 가이드를 데리고 온 사람이 표 회장이에요. 그 후 가이드 판정을 받자마자 수호 그룹이 본부 최대 후원 기업이 되었죠.”
이번엔 눈꺼풀이 조금 더 빨리 팔락거렸다. 어째 오늘은 좀 놀라운 얘기를 많이 듣는 듯하다.
해승의 괴로운 과거부터 그의 가족에 관해서까지. 국내 유일의 S급 가이드인 거로 모자라 대한민국의 방패이자 세계에서도 가장 최고로 꼽히는 군수 기업인 수호의 오너 직계 가족이라니.
“뭐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그래서 수호 그룹에서 매해 본부와 거래를 하는데, 이걸 책임질 사람이 필요했어요.”
지부장은 고민하던 끝에 해승을 불렀다고 한다. 총수가 아끼는 손주이니 조금이라도 더 이쪽이 유리한 방도를 찾을 수 있을까 해서.
“그런 궁리 끝에 표해승 가이드를 고문 이사에 올리는 거였죠.”
“근데 공무원은 사기업 이사 겸직이 불가능하지 않나요?”
“맞아요. 공무원은 그렇지. 근데 우리는 일단 공기업이기는 해도 좀 특수한 경우라서. 승인만 나면 가능하거든요.”
희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그렇다는데 그로서야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사실 머릿속은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느라 그 외에 불필요하다고 판단하는 건 그냥 지나치는 중이었다.
“지금이 딱 그 시즌이에요. 수호에서 무기 팔러 오는 기간.”
“아…….”
그래서 해승이 바쁘다는 소리인가 보다. 아마 오전에 외부에 있다는 말도 그 때문인 듯했다. 그래도 퇴근할 때는 연락하라고 했는데.
희윤은 헤어지기 전 해승의 말을 떠올렸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이건 뭐 본부에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정보니까 괜찮아요.”
희윤의 침묵을 오해한 지부장이 안심시키듯 말했다.
“네.”
희윤도 그게 아니라고 말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다음 테스트를 위해 가이드가 도착해 사적인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물론 검사는 이번에도 역시 썩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다.
지부장이나 안효정의 말대로 그나마 가장 매칭률이 높은 건 정소한뿐이었다.
“그보다…… 연희윤 에스퍼. 아무래도 당분간은 본부에서 지원해 주는 숙소에 머물러야겠어요.”
지부장이 곤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우려한 대로 연희윤 에스퍼에 관한 정보가 유출됐어요. 이름이랑 나이랑 사진까지. 아마 조만간 사는 곳까지 밝혀질 것 같아요.”
“아…….”
희윤도 이제 인터넷의 무서움을 잘 안다. 한 개인의 정보가 얼마나 빠르게 파헤쳐지는지.
“최선을 다해 막고 있긴 한데, 당분간은 조심하는 게 좋으니까요. 숙소는 안효정 에스퍼가 안내할 거예요.”
지부장의 시선이 안효정에게 향했다.
“가요. 희윤 씨. 숙소는 건물 안에 있어요.”
안효정의 말에 희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저것 묻고 싶은 건 많았지만, 그건 조금 후에 따로 질문해야 할 듯했다.
희윤이 지부장에게 인사하고 막 안효정을 따라 움직이려는데, 벨 소리가 울렸다.
발신자는 해승이었다.
“응, 해승아.”
- 형. 저 생각보다 시간 좀 걸릴 것 같은데, 조금만 기다려 주실래요?
“음…….”
희윤이 안효정을 보았다. 안효정은 통화 상대가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절로 그녀의 눈꼬리가 뾰족해졌다.
“희윤 씨. 얼른 가요. 숙소 체크하고, 이것저것 필요한 거 사려면 바쁘니까.”
그래서 일부러 숙소니 뭘 사야 한다느니. 해승이 잔뜩 신경 쓸 말을 꺼냈다. 희윤은 그런 안효정에게 난처한 눈빛을 보냈다.
- 이게 무슨 소리죠, 희윤 형? 숙소요?
아니나 다를까 해승의 목소리 톤이 달라졌다.
“별거 아냐. 그냥 언론에 내 정보가 노출돼서 본부에서 마련해 준 숙소에 당분간 머무르라는 소리야. 신경 쓰지 마.”
희윤이 재빨리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안효정에게 왜 그런 말을 했느냐는 시선을 보냈다. 안효정은 내가 뭐 하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 그게 무슨……. 하, 아니. 일단 형, 기다려요. 지금 당장 갈 테니까.
“어? 아냐. 괜찮아. 선배랑 가면……. 해승아? 해승아!”
희윤은 말하다 말고 끊어진 연결음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재빨리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해승은 받지 않았다.
“왜요?”
난처한 상황을 만든 안효정이 태평스럽게 물었다.
“해승이가 지금 온다고…….”
“그래요? 그럼 얼른 가요.”
“네?”
“오기 전에 가자고요.”
희윤이 어리둥절하게 보고만 있자 안효정은 먼저 휙 돌아섰다. 정말로 그대로 가 버릴 것 같았다.
어쩔까. 잠시 고민하던 희윤도 일단 걸음을 떼던 그때였다.
“형, 어디 가요.”
해승이 불쑥 앞에 나타났다. 희윤은 멍하니 그런 그를 올려다보았다. 대체 어디에서 온 건지. 해승에게는 조금 흐트러진 숨결이 느껴졌다.
“어디 가긴요. 아까 설명했잖아요. 희윤 씨 당분간 본부에서 제공하는 숙소에 있을 거라고.”
“저랑 가요, 형.”
안효정의 설명은 무시한 해승이 희윤을 보며 말했다.
“어딜?”
“제집으로요.”
해승이 또 아무렇지도 않게 놀랄 소리를 했다. 희윤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는 건 당연했다.
“거길 내가 왜?”
“본부 숙소보단 낫잖아요. 기자고 뭐고 출입도 못 할 테니까.”
그래도 어떻게 그래. 희윤이 속으로 말하며 당황해서 눈을 마구 깜빡였다. 물론 요즘 해승과 급속도로 가까워지기는 했지만, 집까지 신세 질 사이는 아니지 않은가.
“제가 불편하세요?”
희윤은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같이 가요.”
그래도 되나. 순간 그런 생각이 올라왔다. 희윤이 흔들리는 걸 알았는지 해승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가요.”
해사한 웃음. 그 순간 희윤은 안효정의 경고를 잊고 말했다. 어쩌면 이미 틀린 일인지 모른다. 정말로.
해승이 보이는 모든 것이 다 예쁘고 귀엽게 느껴지던 순간.
“그래. 음…… 일단 하루만 신세 질게.”
희윤은 그래도 간신히 단서를 달았다. 하루만 해승에게 도움을 받겠다고. 그리고 그런 결정을 내린 자신에게 안도했다.
“네. 그래요, 형. 그럼 같이 나가요.”
해승이 기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희윤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쥐고 걸음을 뗐다.
본부를 나선 해승은 당연하다는 듯 희윤을 데리고 식당으로 이동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저녁을 먹어야 한다는 거였다.
희윤은 잠깐 고민했다. 남들이 다 자신을 주목하고 있는데 식당에 가도 되는지.
“괜찮아요.”
희윤의 걱정을 알아차린 듯 해승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 자신만만한 모습에 안심이 되고 말았다.
물론 해승이 그런 태도를 보일 만했다. 두 사람이 간 식당은 손님을 한 번에 한 팀만 받는 원 테이블 레스토랑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서빙 하는 직원도 없이 오로지 셰프가 모든 걸 전담하는데 인사와 메뉴 소개 외에는 일절 대화에 참여하지 않는 과묵한 사람이었다.
희윤은 모르지만, 그렇기에 이곳은 고위 공직자나 대기업 임원, 사업주들이 주로 이용하는 식당이었다.
“필요한 물건도 사야 한다고 했죠? 음, 세면도구는 집에 있는 거 쓰면 되고. 잠옷이랑 내일 입을 옷만 준비하면 될까요?”
“응. 밥 먹고 시장 잠깐 들르자.”
“시장요?”
“응. 오히려 그런 데가 주목을 덜 하거든.”
희윤이 무심히 대꾸했다. 다들 먹고 살기 바빠서 인터넷이나 뉴스도 잘 보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은 마트보다는 오늘 일이 덜 알려졌을 거다.
“흠…….”
다시금 운전대를 잡은 해승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차를 출발했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안이 텅텅 빈 지하 주차장이었다.
“여긴 어디야?”
“집이요.”
“어, 저, 나 살 거 있는데.”
“네. 올라가요. 집에서 사면 되니까.”
“응?”
희윤이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하지만 해승은 더 설명해 주지 않고 먼저 차에서 내렸다.
어쩔 수 없이 희윤도 해승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다시 둘러보아도 제법 면적이 넓은 주차장은 휑했다.
“형. 가요.”
해승은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는 희윤의 어깨를 끌어 걷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는 동안에도 다른 사람은 보지 못했다.
도착했다는 알림과 함께 문이 열렸다. 그러자 곧장 불투명한 유리문이 보였다. 해승은 그 문도 거리낌 없이 열었고, 그 뒤는 거실과 이어졌다.
“허.”
아무리 봐도 개인 공간 같은데, 어떻게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이런 곳이 보이지. 희윤이 다시금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했다.
“신발 벗고, 이거 신으세요.”
그러거나 말거나 해승은 태연하게 희윤에게 슬리퍼를 내밀어 주며 먼저 안으로 걸어갔다. 희윤은 머뭇거리다가 슬리퍼를 신고 그 뒤를 따랐다.
거실은 희윤의 집보다 컸다. 방도 아니고, 좁은 마당과 부엌을 포함한 집보다!
근데 그 커다란 공간이 허전해 보이지 않았다. 가구는 많지 않은데 인테리어 소품과 화초 등이 적절하게 놓여 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커다랗고 길쭉한 족히 스무 명은 앉을 수 있을 법한 소파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더 그랬다.
“네. 매니저님, 저예요. 지금 오실 수 있죠? 옷이랑 이것저것 좀 필요해서요. 아뇨. 저 말고 다른 사람이요. 음, 잠시만요.”
희윤이 넋 놓고 거실을 보는 사이 해승은 누군가와 통화했다. 그러더니 스마트폰을 귀에서 떼고 희윤과 살짝 거리를 벌렸다.
찰칵. 찰칵찰칵.
빠르고 경쾌한 소리가 연신 들렸다. 희윤이 눈을 한 번씩 깜빡일 때마다 찰칵거리는 소리도 이어졌다.
순식간에 당한 사진 촬영이었다.
“봤어요? 키는 175, 6㎝. 마르고 날씬한 체형. 팔다리가 길고, 몸무게는…….”
희윤은 저를 쓱 훑는 해승의 시선에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말았다.
“형. 61이에요 62예요?”
“63이야.”
저도 모르게 말해 놓고 희윤이 눈을 찌푸렸다. 이게 대체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었다. 해승이 웃음기 어린 눈으로 그런 희윤을 보면서 통화를 이어 갔다.
“많이 가져와요. 활동성 좋은 외출복이랑 홈웨어랑. 잘 때 입을 거랑. 참 정장도요.”
옷 얘기가 나오고서야 희윤은 해승이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도저히 상황이 어떻게 흐르는지는 도통 파악하기 어려웠다.
“네. 미리 말해 둘 테니 곧장 올라오세요.”
그사이 해승은 용건이 끝났는지 바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뭐야?”
희윤도 그제야 내내 참고 있던 질문을 던졌다.
“눈에 뜨이는 건 싫다면서요. 그래서 불렀어요.”
“불러?”
대답을 듣기는 했는데 아직도 무슨 말인지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하는 희윤을 해승은 어깨를 눌러 소파에 앉혔다. 그리고 본인도 그 옆에 착 달라붙어 앉으며 “네.” 하고 말했다.
그거로 끝이었다. 덕분에 희윤은 의문을 해결하지도 못했지만, 더 물어볼 수도 없었다. 해승의 손에 들린 스마트폰이 다시금 진동했기 때문이었다.
“음……. 형, 자. 리모컨. 보고 싶은 거 있으면 찾아서 보고 있으세요. 저 잠깐 통화 좀 하고 올게요.”
해승이 도로 몸을 일으키며 희윤에게 하얀색 리모컨을 내밀었다.
“응. 다녀와.”
희윤이 얌전히 리모컨을 받자,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좁히고 있던 해승의 입술에 다시 미소가 걸렸다.
“네. 무슨 일이십니까.”
딱딱하게 전화를 받는 해승은 그와 달리 희윤의 어깨를 쓰다듬는 손길은 부드러웠다.
‘금방 올게요.’
눈을 마주치니 해승이 웃음기 어린 입술을 여닫았다. 소리는 나오지 않아도 그런 내용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혼자 남은 희윤은 해승이 준 리모컨을 내려다보다가 전원을 일단 켰다.
[최근 서해만 갯벌에 새로운 에스퍼가 나타난 일로 반응이 아주 뜨겁지요.]
하필 제일 먼저 맞닥뜨린 게 제 얘기였다.
[아직 이능력자 관리 본부 서울지역 중앙지부에서는 공식적인 발표가 없어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그래서 저희 궁금한 TV에서 직접 취재했습니다.]
화면이 바뀌며 익숙한 곳이 나타났다.
“아…….”
희윤이 사는 동네였다.
[여기는 서해만 갯벌에서 활약한 에스퍼가 살고 있다고 추정되는 마을입니다. 약 20여 가구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고, 대부분 나이가 많은 노인이라고 합니다.]
기자가 몸을 돌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착한 곳은 작은 슈퍼였다. 상호는 모자이크 처리되었지만, 별 쓸모 있는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저게 마을의 유일한 슈퍼였으니까.
[그 청년? 성실하죠. 착하고. 동네에 유일한 젊은 사람이라 도움도 많이 줘요.]
기자가 질문하자 변조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보라색 꽃이 그려진 후들후들한 날염 티셔츠와 통이 넓은 바지는 안동댁이 자주 입는 패션이었다.
그때 ‘따르릉.’ 하고 고전적인 벨 소리가 울렸다. 안동댁은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더니 그대로 전화를 받았다.
[오늘은 어려울 것 같은데요. 아직 ○○가 안 보여요. 요즘 뭐 어디 취직했다더니 또 며칠 안 보이려나 봐. 이따 누구 오면 그편에 보내든가 할게.]
통화 내용은 고스란히 방송을 탔다. 아마 안동댁이 제 이름을 부른 것 같은데 그 부분은 다른 처리가 되어 들리지 않았다.
그보다 희윤은 안동댁이 한 말을 곧바로 이해했다. 아마 누군가가 슈퍼에서 물건을 가져 달라고 전화 주문을 한 거다. 보통 그럼 희윤이 오가면서 배달해 주고는 한다.
그런데 자신이 이틀 전 서해만 갯벌에 가서 돌아오지 않으니 며칠 일하느라 자리를 비운 줄 아는 것이다.
[누구와 통화하신 건가요?]
기자가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그러자 안동댁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라고. △△네 아랫집 노인인데 세제 좀 가져다 달라고 전화했어요.]
[평소에도 자주 그런 일을 해 줬나요?]
[그럼요. 얼마나 착하고 성실한데. 근데 혹시 이거 ○○한테 괜찮은 거예요? 피해 안 주고 싶은데…….]
안동댁과의 인터뷰는 그거로 끝났다. 기자가 그녀에게 무어라 대답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 후로도 기자는 동네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희윤에 관한 정보를 물었다.
대단한 건 없었다.
언제부터 살았는지, 평소 행실이 어떤지, 무슨 일을 했는지.
대체 이런 걸 뭐 하러 방송에 내보내는 걸까.
희윤은 보면서도 의도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이게 케이블 방송이며, 논쟁거리가 될만한 건 뭐든 내보내는 곳이라는 걸 모르기에 갖는 의문이었다.
그보다 희윤이 신경 쓰인 건, 지부장이 우려한 대로 자신이 사는 집이 외부에 노출되었다는 것이었다.
“형.”
도로명 주소도 가리고 특징이 될 만한 것들은 모자이크 처리하기는 했어도 동네를 찾아가면 금세 알아볼 것 같았다. 이래서야 집에 갈 수는 있을까.
“희윤 형.”
“아.”
희윤은 두 번 제 이름이 불리고서야 돌아보았다. 해승이 눈을 찌푸린 채 그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TV로 이동했다.
“방금 그거 뭐였어요?”
해승은 통화하고 나와서 정확히 뭐가 방송으로 나왔는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마지막 부분에 익숙한 풍경을 발견하고 금세 상황을 파악했다.
“모르겠어. 무슨 기자가 동네를 촬영하러 갔다던데.”
희윤은 슬쩍 인터뷰 내용은 누락시켰다. 물론 해승이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래요?”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해승은 메신저 앱을 켰다. 빠르게 터치하며 용건을 연이어 보냈다. 알겠다는 답변이 돌아온 걸 확인하고 별일 없었다는 듯 희윤의 곁에 앉았다.
“이런 거 보지 말고 영화 봐요. 드라마나, 예능이나.”
“응.”
희윤은 해승이 그냥 넘겼다는데 안심해 고개를 끄덕였다. 리모컨을 누르는데 다시 해승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네. 올라오세요.”
통화는 짧고 간단했다. 몇 분 후 엘리베이터에서 차분하게 정장을 입은 여성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