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윤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낯선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나타난 것 때문은 아니었다.
몇 번이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때마다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옷이며, 가방 등이 매달린 기다란 행거를 밀며 등장해서였다.
“이게 다 뭐야……?”
희윤이 얼이 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불과 몇 분 만에 거실은 마치 옷가게처럼 변해 있었다.
“안녕하세요. HH 패션 안지민 매니저입니다. 옷을 고르실 때 도움을 드리고자 왔습니다. 보시고 혹시 필요한 게 있으시면 제게 말씀해 주세요.”
정장 입은 여성이 차분하게 웃으며 해승에게 말했다. 희윤에게도 눈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됐어요.”
해승의 쌀쌀맞은 말에도 매니저는 웃는 낯으로 알겠다고 대답하며 걸음을 물렸다. 해승이 희윤을 돌아보며 빙그레 미소를 띠었다.
“이제 골라 봐요.”
“어?”
아직도 지금 상황이 이해 가지 않는 희윤이 멍하니 물었다. 해승이 어리바리한 표정을 한 희윤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고 티셔츠만 걸린 행거로 다가갔다.
해승은 기다란 손가락으로 옷걸이를 툭툭 밀더니 그중 하나를 쓱 꺼내 들었다. 목둘레와 가슴 윗부분을 회색으로 마감한 래글런 셔츠였다.
“이건 어때요?”
해승이 셔츠를 희윤의 가슴에 쓱 가져다 대며 물었다. 희윤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희윤이 옷을 살피고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분명 긍정적으로 답했는데 해승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셔츠를 도로 옷걸이에 걸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이번에 그가 꺼낸 건 쇄골이 살짝 보일 정도로 깊게 팬 V넥 셔츠였다.
“이건요?”
“응. 좋아.”
이번에도 희윤은 선뜻 대답했다. 하지만 역시 해승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몇 번이나 이 셔츠, 저 셔츠를 고르며 희윤의 몸에 대고 희윤이 그저 고개만 끄덕이는 걸 보면 못마땅한 표정으로 물릴 뿐이었다.
“뭐야. 왜 다 좋대.”
그렇게 몇 차례 여러 옷을 대보던 해승이 결국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어…….”
희윤이 난처하게 눈을 굴렸다. 정말 다 괜찮아서 그런 건데 그렇게 대답하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제가 도움을 좀 드릴까요?”
그때까지 조용히 두 사람이 옷을 고르길 기다리던 매니저가 말을 걸어왔다. 매니저와 눈이 마주친 희윤이 민망한 듯 목덜미를 손으로 쓸었다. 어떻게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이렇게 까맣게 잊을 수 있을까.
“됐어요. 알아서 할게요.”
두 사람의 대화는 곧 끼어든 해승의 목소리에 짧게 끝났다. 매니저는 해승에게 시선을 돌렸다가 곧바로 “네.” 하고 대답하며 다시 물러섰다. 해승의 눈이 불쾌한 빛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희윤 형.”
“아, 응.”
희윤은 매니저에게 잠시 주었던 눈길을 도로 해승에게 돌렸다.
“제가 고른 게 눈에 차지 않으면, 형이 골라 보세요.”
“아냐. 정말 전부 마음에 들어.”
희윤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그랬다. 해승이 몸에 댔던 옷들은 전부 깔끔하고, 예뻤으며, 전체적으로 희윤에게 잘 어울리는 것들이었다.
“그래요?”
해승이 정말이냐는 듯 바라보자 희윤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해승의 눈가에 또 해사한 눈웃음이 폈다.
“응.”
“알았어요. 그럼 매니저님. 저것들 전부 빼놔 주세요.”
희윤을 상대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사무적인 말투로 해승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매니저는 아주 잠깐 해승과 희윤을 살폈지만, 곧 그런 적 없다는 듯 해승이 아까 선택했던 셔츠를 정확하게 추려 내 빈 행거로 옮겼다.
“이제 바지 좀 볼까요?”
해승은 옷이 이동하는 데는 관심도 두지 않고 주르륵 바지만 걸린 곳으로 다가갔다. 셔츠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몇 번이나 희윤에게 보여 주고 대보면서 어떠냐고 물어 왔다.
희윤은 이번 역시 그저 고개만 열심히 끄덕였다. 다행히 아까와 달리 해승에게 불만족스러운 표정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몇 번이나 이 행거 저 행거를 옮겨 다닌 끝에 본부에 출근할 때 입을 옷, 집에서 편히 입을 홈웨어를 고르고 난 후 마지막으로 잠옷만 남게 되었다.
“잘 때 옷도 따로 입는 거야?”
보들보들한 새틴 소재로 된 잠옷을 손에 쥔 희윤이 멍하니 물었다. 잘 때고 외출할 때고, 혹은 집에서 편하게 입는 옷도 사실 희윤은 별도로 가려 본 적이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는 옷 서너 개를 돌려 가면서 편한 대로 입어 왔었다. 애초 희윤은 패션에도 썩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세 장에 만원, 두 장에 5천 원 하는 식으로 파는 시장표 옷을 사서 대충 걸쳐 입어 왔을 정도니까.
“안 입고 주무세요?”
“응. 굳이 가리지 않으니까.”
“그럼 필요 없겠네요.”
희윤과 해승의 대화를 들은 매니저가 제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에 눈꼬리를 떨었다. 그러나 정작 두 사람은 그런 그녀의 상태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해승은 희윤의 손에 들린 잠옷을 치웠고, 희윤은 이제 쇼핑이 다 끝난 건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 희윤을 보며 해승이 의미 모를 모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형, 그럼 이제 피곤하실 테니 씻고 쉴까요?”
“아, 으응.”
희윤은 해승의 말을 듣고야 시간이 한참 지났다는 걸 알았다. 쇼핑하는 데 이렇게 공을 들인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해승의 말마따나 조금 피곤한 것 같았다.
“저쪽에 욕실 있으니까 쓰세요.”
해승이 손가락으로 거실 너머 복도 안쪽에 있는 커다란 문을 가리켰다. 희윤도 해승을 따라 시선을 옮겨 욕실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갈아입을 옷은 앞에 둘게요.”
“응. 알았어.”
얌전히 대답한 희윤이 욕실로 사라지고 나자 해승이 매니저를 돌아보았다.
“전부 드레스룸에 정리하세요.”
“전부요?”
매니저가 놀란 눈을 했다. 그러다 곧 표정을 정리하고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까 행거를 가지고 올라왔던 사람들이 다시 나타났다.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옷을 정리해서 집 안에 있는 드레스룸으로 이동했다.
희윤이야 모르지만, 사실 매니저는 수호 그룹 전담 퍼스널 쇼퍼였고 경력도 10년 차가 넘었다. 그동안 매니저가 해승과 만난 건 손에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았는데…….
‘저런 모습은 또 처음 보네.’
세상에. 천하의 표해승이 남을 챙긴다니. 그냥 신경 쓰는 것도 아니고 제집에 그 사람을 위한 공간을 만들다니.
예민하고 까칠하고 가족에게도 절대 곁을 주지 않기로 알려진 해승이 집에 사람을 들인 것도 신기하건만.
“끝났어요?”
“아, 네!”
부름에 매니저가 멍한 정신을 추스르며 얼른 대답했다. 언제 왔는지 해승이 드레스룸 입구에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기대어 있었다.
“그럼 가세요.”
얼른. 그 말이 뒤에 생략된 듯했다. 매니저는 서둘러 사람들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들이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물기가 촉촉하게 젖은 희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해승은 그를 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형.”
희윤은 조용해진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물었다.
“매니저님은?”
“돌아갔어요. 많이 피곤하시죠? 침실로 안내할게요.”
“응.”
용건이 끝나 매니저가 돌아갔다고 생각한 희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승은 희윤의 어깨를 감싸 안고 거실과 이어진 복도를 따라 걸었다. 해승이 멈추어 선 곳은 세 개쯤 닫힌 문을 지나고 나서였다.
“여기…… 네가 쓰는 방 아냐?”
안을 들여다본 희윤이 단박에 해승을 돌아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분위기가 딱 안방 느낌을 폴폴 풍기고 있었다.
커다란 창, 차분한 색조로 된 커튼, 세 사람도 나란히 잘 수 있을 법한 거대한 침대와 초록색 1인용 의자.
무엇보다 방을 채운 가구들이 하나같이 고급스러운 느낌.
“네. 갑작스럽게 와서 미처 손님방을 정리 못 했어요.”
“그럼 난 거실 소파도 괜찮아.”
희윤이 머릿속에 널찍한 소파를 떠올리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집주인의 침대를 차지하는 건 아닌 듯했기 때문이었다.
“제가 불편하세요?”
해승의 목소리 톤이 단숨에 쑥 내려갔다.
“어?”
“정 그러시면 형이 여기서 주무세요. 어떻게 제가 형을 소파에서 주무시게 할 수 있겠어요. 데리고 온 것도 전데요.”
해승은 그렇게 말하며 희윤의 어깨를 감싼 팔을 풀었다.
“아냐.”
금방이라도 돌아 나가려는 해승을 본 희윤이 당황해서 얼른 팔을 붙들었다. 집주인을 쫓고 안방을 차지한다니. 그건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불편하다면서요.”
“나보다는 네가 어색할까 봐 그런 거지…….”
“전 괜찮아요.”
“그래. 네가 그럼 나도 문제없어. 우리, 그, 호텔에서도 같이 잤었잖아.”
희윤은 임기응변으로 꺼낸 호텔 소리에 해승의 표정이 단번에 밝아졌다.
“맞아요. 우리 이미 한 침대도 사용했잖아요. 그렇죠?”
“어, 응.”
그렇지. 분명 그게 맞는데, 이 묘한 기분은 뭘까.
희윤의 상념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럼 이만 잘까요?”
해승이 웃으며 말하더니 대뜸 웃옷을 휙 벗어 던졌기 때문이었다. 이어 바지춤까지 손을 올리는 걸 본 희윤이 기겁했다.
“해, 해승아, 뭐 하는 거야?”
“네? 잘 준비요.”
“근데 옷, 옷은, 왜 전부…….”
너무 당황한 나머지 희윤은 말도 더듬었다. 그와 달리 해승은 뭐가 문제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안 입고 주무신다면서요.”
“……뭐?”
“저도 가리는 거 없이 자거든요. 형도 평소 하던 대로 하세요.”
해맑기까지 한 말에 희윤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