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85)

곧 희윤은 아까 잠옷 때문에 해승과 한 대화를 떠올렸다.

“아니. 해승아, 난 그런 의미로 한 게…….”

주어가 확실하지 않아 아무래도 해승이 크게 오해한 듯했다. 희윤이 얼른 변명하려 했다.

“생각해 보니 형은 부끄러움이 많으시죠.”

“응?”

“잠시만요.”

희윤이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 해승이 도로 방을 나갔다. 혼자 남겨진 희윤은 멀뚱멀뚱 눈을 깜빡였다.

곧 다시 나타난 해승은 다행히 미색 티셔츠에 편안한 반바지 차림이었다. 그리고 손에는 똑같이 티셔츠에 반바지가 들려 있었다.

“자, 이거 입으세요.”

희윤은 얌전히 해승이 내민 걸 받아 들었다. 하지만 바로 움직이지는 않고 해승을 물끄러미 봤다.

“알아요. 잠옷 말고 편안한 옷 입으신다는 거.”

웃고 있는 얼굴에는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 그제야 희윤은 해승이 저를 놀렸다는 걸 깨달았다.

해승이 “하하.” 하고 크게 웃었다. 희윤은 그런 해승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아마도 자신이 집에 온 게 그도 어지간히 즐거웠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희윤은 훌렁 셔츠를 벗었다. 해승이 가져다준 것으로 바꿔 입기 위해서였다.

바로 앞에 해승이 있었으나 아까와 달리 그다지 신경 쓰지는 않았다. 사실 공사판에서 막노동도 하고 도로 공사장에서 야간작업도 해 본 희윤은 바깥에서 상의를 벗는 거야 부끄러운 일도 아니었다.

“흠…….”

해승은 엄지로 턱을 문지르며 희윤의 드러난 몸을 감상했다. 마르긴 해도 의외로 잔근육이 잘 다듬어진 몸이다. 날씬하고 매끈한 피부는 생각보다 볕에 그을려 건강해 보인다.

그보다 더 눈에 뜨인 건 여기저기 남은 크고 작은 흉터들이었다. 아마 험한 일을 하다가 생긴 게 아닐까 했다.

“이건 어디서 생긴 거예요?”

해승이 어깨부터 등까지 길게 난 상처를 검지로 쓱 만졌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희윤의 근육이 바짝 굳었다.

“간지러워!”

대답 대신 웃음기 어린 핀잔이 돌아왔다.

“여기가요?”

“어. 건들지 마. 나 간지럼 잘 탄단 말이야.”

“호…….”

해승이 눈을 반짝거리자 희윤은 침을 꿀꺽 삼켰다. 뭔가 제가 말을 잘못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아! 해승, 아! 안 돼, 하하.”

아하하. 하하하. 희윤은 해승의 손을 피해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맨살에 부드러운 손가락이나 손바닥이 닿을 때마다 간지럼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해승은 그런 희윤을 끈질기게 따라가며 몸 이곳저곳은 간질였다.

방 안이 웃음과 비명으로 가득 찼다.

“흐, 하. 아이고. 힘들어.”

먼저 침대에 누워 버린 건 희윤 쪽이었다. 분명 에스퍼는 자신인데 어찌 된 일인지 가이드인 해승보다 체력적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희윤이 본격적으로 덤빈다면야 해승이 이기긴 어렵겠지만, 그럴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아직도 부족하네요.”

희윤이 무슨 말이냐는 눈으로 올려다보다 해승이 덧붙였다.

“기초 운동이요. 내일부터 다시 제대로 시작해요.”

“음…….”

“왜요. 매칭 테스트 때문에 시간 없어요?”

해승은 희윤이 삼킨 말을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뒤에 거센 말투가 튀어나온 듯한데 아마 그건 잘못 들은 걸 거다.

해승이 설마 욕을 했을 리 있겠는가.

“그럼 내일 여기서 1시간만 하고 가요.”

“여기서?”

어디서 뭘 하라는 거지? 희윤의 의문은 다음 날 새벽 곧바로 해소되었다. 새벽 5시 반. 해승은 잠든 희윤을 깨워 운동하러 가자고 했다.

비몽사몽 부스스한 꼴로 해승에게 붙들려 간 곳은 놀랍게도 바로 오피스텔 꼭대기에 있는 피트니스 센터였다.

“입주민만 이용하는 곳이에요. 이 시간에는 저만 쓰고요.”

희윤이 널찍한 실내와 각양각색 운동기구를 놀란 눈으로 보고 있자, 옆에 선 해승이 설명했다.

“아, 응.”

아마 두리번거리는 걸 다른 사람이 있나 찾는 것으로 오해한 듯했다. 희윤은 바로 정정해 주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원래 그렇다니 부담도 덜했다.

둘은 나란히 바깥 풍경이 보이는 창가 앞 러닝머신을 40분간 달렸다. 그 후 해승의 전문가 뺨치는 헬스 트레이닝을 받았다.

전에 맨몸으로 할 때와는 또 다른 고된 운동이었다. 허벅지는 여전히 터질 것 같았고, 배 근육은 당겼으며, 팔다리도 후들후들했다.

“고생하셨어요, 형.”

해승이 생글생글 웃으며 희윤에게 텀블러를 내밀었다. 건네받고 보니 얼음이 잔뜩 들어간 커피였다.

쉬지 않고 단번에 반쯤 마셨더니 관자놀이께가 찡하게 아팠다. 희윤은 저도 모르게 눈을 찡그렸다.

“천천히 마셔요.”

해승이 희윤의 머리칼을 쓸어 주며 말했다. 땀에 젖었는데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너 일부러 그랬지?”

“음?”

“평소에 이렇게 안 하는데 나 고생하라고 그런 거 아냐?”

해승이 무슨 소리냐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 오히려 평소보다 강도가 더 약한 걸 희윤은 몰랐다.

그나마 희윤이 하다가 중도 포기할까 봐 조절한 건데 말이다.

“……아니야?”

희윤은 해승의 표정만 보고도 그가 하지 않은 말을 알아챘다. 질린 눈빛에 해승이 싱긋 웃었다.

“걱정 말아요. 형한테 나만큼 하라는 소리는 하지 않을 테니까.”

“그것도 무섭거든?”

희윤은 퉁명스럽게 말하고 남은 커피를 몽땅 비워 냈다. 그 후 둘은 집으로 돌아와 씻고 간단하게 아침을 먹은 후 함께 해승의 SUV를 타고 출근했다.

또 본부 입구에 가득한 기자들을 보았는데 다행히 지하 주차장에는 관계자 외의 사람은 없었다. 아마 신경 써서 막아 둔 듯했다.

“이따가 점심 같이 먹어요.”

희윤을 605호 앞까지 배웅한 해승이 한껏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응. 고생해.”

“형도요. 절대 손 이외에 접촉하지 말고요.”

“알았어.”

해승은 희윤이 먼저 안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렸다. 희윤도 그 사실을 눈치채고 먼저 돌아섰다. 동시에 해승의 시선이 주변을 쫙 훑었다.

이쪽을 힐끔거리던 몇몇이 서둘러 눈길을 돌리고, 후다닥 몸을 피하고, 안 그런 척 외면했다. 평소에도 희윤을 보려고 얼쩡거리는 것들이 많은데 오늘은 유독 더 늘어난 듯했다.

“짜증 나네.”

하필 여러 일이 겹쳐서 내내 희윤의 곁을 지킬 수 없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해승은 한층 싸늘해진 얼굴로 돌아섰다.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동한 그를 지부장이 맞이했다.

“왔어?”

지부장이 인사했지만, 해승은 고개만 까딱였다.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에 지부장은 불쾌한 기색 하나 없이 쯧쯧 혀만 찼다.

“연희윤 에스퍼 네 집에 데려갔다면서?”

“네.”

“왜?”

해승은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보기만 했다. 그런 걸 왜 묻느냐는 눈이었다.

“안 불편해?”

지부장이 물었다. 해승을 오래도록 알아 온 그다. 그러니 저런 물음도 당연했다. 그건 매니저가 가진 의문과 같은 것이었다.

정말 해승은 그게 뭐 어떠냐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사람을 어이없게 했다.

“진짜 괜찮다고?”

“네.”

“에스퍼잖아?”

“그런데요?”

“그런데도 아무런 문제 없다고?”

“왜 자꾸 귀찮게 묻지?”

급기야 해승이 짜증스럽게 지부장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자각이 없는 거다. 에스퍼인 희윤을 제집에 데려간 게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허…….”

괜찮은데다 문제도 없다. 에스퍼를 집에 들이고도. 지부장은 희윤과 해승이 한 침대에 잔 걸 몰라서 그나마 이 정도 그쳤다.

“근데 대체 무슨 바람이야. 본부에서 마련해 준 숙소도 있는데.”

“본부 숙소가 기자들을 다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왜 이래. 이래 봬도 외부에 있는 곳보다 보안 철저해.”

“그래 봐야 제 오피스텔보다 못하죠.”

그건 맞긴 하지. 지부장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승이 사는 오피스텔은 그의 말마따나 그가 소유한 건물이다. 그래서 관리하는 보안도 수호 그룹 산하 업체에서 직접 하고 있다.

심지어 그들은 한 달에 한 번 혹은 수시로 주변에 변동이 없는지 개인 신상에는 문제가 없는지 검증해야 했다.

그만큼 보안이 철저해 이능력 관리 본부보다 더 철통같다는 평을 받고 있어 그곳에 입주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그래. 그거야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면 언제 연희윤 에스퍼가 돌아갈 수 있을지 몰라.”

그 말에 해승이 무언가를 생각하듯 시선을 슬쩍 올렸다. 그러다 다시 지부장에게 향한 눈빛은 반짝 빛나고 있었다.

“좋네요.”

정말로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소식이라는 듯.

“표해승.”

지부장이 해승을 가만 보다가 큰 결심한 얼굴로 그를 불렀다. 해승은 대꾸도 없이 말해 보라는 듯 쳐다보았다.

“너 솔직히 말해.”

“뭘요?”

뭔데 또 저렇게 진지한 척하면서 묻는 거지. 해승은 지부장이 저럴 때마다 가끔 짜증이 나는 일이 있었던 걸 떠올리며 눈을 찌푸렸다.

“너 연희윤 에스퍼 어떻게 생각해.”

“무슨 의미로 묻는 거예요?”

“뭐긴. 요즘 네 행동이 이상해서 그러잖아.”

“무슨 소리예요?”

해승이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자 지부장은 한숨을 푹 쉬었다.

“연희윤이 너랑 유일하게 매칭률이 높은 에스퍼라 그런 거야. 아니면 그냥 연희윤이라는 사람 자체가 좋아서 그런 거야. 뭐 때문에 그러는 거냐고.”

해승은 그 말에 어처구니없다는 눈을 했다.

“당연히 제 유일한 에스퍼라서 그런 거잖아요.”

그건 기존에 들었던 답변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지부장은 순간 어떤 깨우침을 느꼈다.

‘저 녀석, 아직 제 감정이 어떤지 모르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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