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만에 해발 약 300m 산 전체에 물 모이를 전부 채우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래도 해가 저물기 직전까지 네 명의 에스퍼와 두 명의 소방대원은 바쁘게 산을 돌아다니며 많은 웅덩이에 물을 담기 위해 애썼다.
“오늘 정말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소방서로 돌아오자 이미영 과장이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했다.
“과장님도 수고하셨습니다.”
희윤을 비롯해 안효정과 다른 에스퍼들도 제각기 말했다. 다른 소방대원들과도 작별 인사를 비롯하여 서로 고생했다고, 다음에 또 불러 달라는 가벼운 얘기를 주고받고 승합차에 올랐다.
희윤은 의자에 앉자마자 핸드폰부터 확인했다. 사실 아까 일을 하면서 중간중간 액정을 볼 때마다 해승이 보낸 메시지가 늘어 있는 걸 봤다.
그러나 차마 읽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바쁘게 일하는 사람들 틈에 혼자만 여유를 부리는 것 같기도 했고, 해승과 한 번 대화를 시작하면 자꾸만 그쪽에 신경이 쏠릴 것 같아서였다.
[해승 : 형 없이 혼자 점심 먹으려니까 쓸쓸해요. 오후 12:01]
대화창을 열자마자 사진과 고양이가 우는 이모티콘 그리고 해승의 푸념이 떡 하니 떴다. 그 이후로도 내용은 비슷비슷하게 이어졌다. 전부 희윤이 없어서 외롭고 심심하다는 내용이었다.
[해승 : 커피 마시고 싶은데, 형이 없어서 고민되네요. 오후 2:15]
[해승 : 형, 진짜 바쁜가 보다. 힘든 건 아니죠? 그런 거면 나한테 말해요. 오후 2:44]
마지막 내용까지 확인한 희윤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누가 보면 본부에서 온종일 붙어 있는 줄 알겠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조금 해승에게 미안해졌다. 틈틈이 답장을 보낼 시간이 없던 건 아닌데, 괜히 남들 눈치 보느라 해승을 내버려둔 게 아닌가 해서였다.
해승에게 지금 끝났다고, 본부에서 보자고 답장을 쓰려던 희윤은 마지막에 온 메시지를 보고 멈칫했다.
[해승 : 형, 미안해요. 급한 일이 생겨서 나가 봐야 해요. 퇴근 전에는 돌아올 거 같은데 본부 도착하면 연락하세요. 오후 4:56]
5시가 다 되어 도착한 것이었다. 지금 시간은 7시. 해승은 아마 아직도 일이 끝나지 않은 듯했다.
돌아가면 오늘 첫 임무에 관해서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가이딩도 받아야지 했는데.
‘아쉽네…….’
일은 단순했고 고도의 제어가 필요한 건 아니었다.
힐끔 손목에 찬 스마트 워치를 봤다. 이건 출발하기 전 안효정이 총무부에 들러 받아 준 것이었다.
모든 에스퍼가 착용하는데, 안정도를 측정하는 거라고 했다. 해당 내용은 본부로도 전송되며, 긴급 시에는 호출기로도 쓰인다고도 했다.
안정도 66%
현기증이 조금 느껴지는 게 안정도 때문인 듯했다. 아무래도 해승 대신 다른 가이드들에게 양해를 구해야 할 듯했다.
희윤은 망설이다 정소한에게 문자를 보냈다.
5분 후, 정소한에게 답변이 돌아왔다.
[정소한 가이드 : 연희윤 에스퍼가 가이딩이 필요하다는 데 가야죠. 오후 7:24]
흔쾌한 수락이었다.
[나 : 고맙습니다. 저는 8시 지나야 도착할 것 같아요. 천천히 오세요.]
서울은 어딜 가나 차가 많다. 그런데 퇴근길이다 보니 도로는 더 막혔다. 같은 신호등을 두 번, 세 번에 넘기고 나서야 통과하는 것도 허다했다.
“이런……. 앞에서 사고가 났었나 보네요.”
접촉사고까지 벌어졌었나 보다. 운전자가 혀를 차며 하는 말에 희윤도 밖을 살폈다. 그러다 동네 언덕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이동 동선을 생각하면 이 근처를 지나갈 거라는 건 예상하던 일이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보게 되니 새삼스러웠다.
‘고작 며칠 못 간 건데.’
꼭 오래도록 돌아가지 못할 고향을 보는 것 같다고 할까. 하긴 해승이 자꾸 난감한 논리로 붙잡고 있어 당장은 돌아갈 순 없겠지만.
‘음. 그래도 주말엔 한 번 가야지.’
해승이 사람을 부르니 마니 하는 걸 말렸으니 한 번은 가 봐야 한다. 돌아갈 핑계가 아니라 정말 집을 오래 비워 두면 먼지도 쌓이고, 우거질 정도로 잡초가 자라나 마당이 엉망이 될지 모르니까.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이동하던 끝에 마침내 시야에 본부 빌딩이 들어왔다. 퇴근 시간이 지났는데도 곳곳에는 훤한 불이 들어와 있었다.
“저 먼저 내릴게요.”
본부를 50m도 남겨 두지 않은 때, 돌연 안효정이 말했다.
“선배?”
“오래 기다리게 하기 미안해서.”
이쯤이면 확실히 이렇게 밀려서 서 있는 것보다는 걸어가는 게 더 빠를 수도 있다. 문을 벌컥 열고 좌우를 살피며 내리는 안효정을 보다가 희윤도 서둘러 뒤를 따랐다.
“저도 같이 갈게요.”
운전자는 그런 일이 흔한지 당황한 표정도 없었다. 문이나 잘 닫고 가라는 태평한 소리만 들렸다.
탕.
희윤은 운전자의 말대로 문을 꼭 닫고 벌써 저만치 걸어가는 안효정을 따라갔다.
“왜 그렇게 서두르세요?”
“태강 씨가 퇴근도 안 하고 기다리고 있다잖아.”
“아, 선배 가이드분이요.”
안효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서둘렀다. 원래 가이드가 기다리면 다들 이러나. 하긴 자신도 해승이 아무것도 안 하고 제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면 계속 신경 쓰일 것 같긴 했다.
막 본부 로비로 들어서는데 훤칠하게 큰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 다가오는 게 보였다.
“효정 씨.”
다정하게 부르는 목소리. 은은하게 번지는 미소.
“태강 씨.”
답하는 안효정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천천히 오라니까요.”
가이드가 안효정에게 말하며 희윤 쪽에 시선을 주었다. 눈인사를 건네는 그에게 희윤도 고개를 꾸벅했다.
“전 그럼 가 보겠습니다. 내일 봬요, 선배.”
“아, 응. 희윤 씨. 가이딩 잘 받아.”
제 가이드만 보던 안효정이 그제야 희윤의 존재를 알아챘다는 듯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희윤은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가이딩 센터가 있는 11층을 누르고 벽면 거울을 봤다. 조금 전 보았던 광경이 떠올랐다. 서로를 보며 미소 짓던 안효정과 그 가이드. 누가 보더라도 그 둘은.
“좋아하는 사이겠지.”
사귀는 사이인 것 같았다. 서로에게 마음이 있는 걸 감추지 않은 걸 보니. 며칠 전 연구원이 물었던 게 기억났다.
해승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희윤은 아직도 발긋한 제 볼과 귀를 한 번씩 매만졌다. 어쩐지 안효정과 그 가이드를 보니, 그때는 알지 못했던 마음을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었다.
‘난 아마도…….’
아마도 해승을 그냥 동생으로만 보는 건 아닌 것 같아. 그랬다면 이상하게 심장이 떨리는 기분도 느끼지 못했겠지.
희윤은 담담하게 제 감정을 정의했다.
‘역시 난 해승이를 좋아하는 거야.’
* *
“연희윤 에스퍼, 오느라 고생했어요.”
가이딩 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먼저 와 있던 정소한이 희윤을 반겼다.
“오래 기다리셨죠.”
“아뇨. 저도 금방 왔어요. 퇴근하고 숙소에 있다가 내려왔거든요.”
“숙소에서 지내세요?”
“네. 대부분의 가이드는 저처럼 본부에서 준비해 준 숙소를 많이 이용해요. 아무래도 다른 곳보다 가깝기 때문에 지금처럼 호출이 있으면 빨리 대응할 수 있으니까요.”
“아. 그래도 죄송해요. 쉬시는데…….”
“에이. 아니에요. 원래 다 그런 거라 익숙해요.”
고개를 수그리며 미안해하는 희윤에게 정소한이 미소를 보였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희윤은 정소한이 가리킨 의자에 앉았다. 엉덩이 받침이 널찍하고 등받이가 커다란 의자는 오래 앉아도 편안함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졌다.
두 사람이 앉은 자리 옆에는 의료 기기가 한 대 놓여 있었다. 모니터까지 있는 걸 봐서는 뭔가를 측정해서 보여 주는 용도 같았다.
그 외에도 벽에는 침대가 두 대 나란히 놓여 있었다. 하나는 더블, 다른 하나는 싱글.
“가이딩 실은 처음이에요?”
희윤이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정소한이 물었다.
“네.”
“표해승 가이드와 안 와 보셨어요?”
“네…….”
그러고 보면 해승과는 특별히 가이딩을 한다는 그런 생각은 가져 본 적이 없다. 그저 함께 있다가 보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을 뿐.
서해만 갯벌에서도 해승에게 안긴 상태에서 했고.
그때 일을 자연히 떠올리던 희윤이 고개를 슬쩍 저으며 정소한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의 눈빛이 묘했다.
왜 그렇게 보지. 의문이 들던 차에 정소한이 물었다.
“의외네요.”
“네?”
“아뇨.”
손이 빠른 줄 알았는데. 정소한은 희윤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일단 이거 스마트 워치에 연결해 주세요.”
미처 듣지 못하고 의아해하는 희윤에게 정소한이 노란 잭이 달린 긴 줄을 내밀었다. 덕분에 희윤은 조금 전 위화감은 잊어버렸다. 대신 제 앞에 있는 게 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희윤 씨가 찬 스마트 워치랑 연결해서 저 화면에 안정도가 몇인지 보여 주는 거예요.”
“아…….”
이런 것도 있었구나. 희윤은 신기한 기분을 느끼며 스마트 워치 옆면에 잭을 연결했다. 곧 모니터에 안효정이 말한 대로 수치가 떴다.
에스퍼 안정도 68%
이동하는 중에 안정도는 소폭 상승해 있었다. 아마 자연히 두면 느리게나마 조금씩 회복되긴 하는 듯했다.
“음……. 많이 떨어지진 않았네요. 그래도 미약한 두통이나 약간 매스꺼움이 있었겠어요.”
“조금요.”
정소한의 말대로였다. 못 견딜 정도는 아닌데 조금 불편할 정도로 어지럼증이 계속되고 있었다.
“손 이리로 주세요.”
정소한이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네. 잘 부탁합니다.”
희윤은 서둘러 제 손도 앞으로 뻗었다. 잡은 건 아니었다. 정소한이 내민 손바닥에 살며시 올린 정도.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정소한에게 한숨 같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가이딩하려면 최소한 마주 잡아야 해요. 물론 저로서는 전에 말씀드린 대로 가슴에 얹는 게 제일 효율이 좋지만.”
“아……, 네. 그럼 마주 잡는 거로 할게요.”
희윤은 얼른 정소한의 손을 붙들었다. 마치 솜털이라도 쥔 듯 가벼운 악력에 정소한이 또 작게 웃었다.
“시작할게요.”
“네.”
부드러운 기운이 손을 타고 흘러들어 오기 시작했다. 해승의 가이딩이 계곡물에 푹 잠긴 것 같다면 정소한의 가이딩은 개울물에 손을 가만 가져다 댄 것처럼 느껴졌다.
“느낌 어떤가요?”
“괜찮은 것 같아요.”
“다행이네요.”
정소한과 눈을 마주쳤던 희윤이 다시금 고개를 내렸다. 해승이가 아닌 다른 사람과 단둘이 손을 마주 잡고 있으니 좀 어색했다. 본래도 말이 없는 편이긴 해도 해승과 둘이 있을 땐, 대화가 없어도 편했는데.
무슨 얘기라도 해야 하나.
“오늘 첫 임무였죠?”
희윤이 고민하고 있는데, 다행히 정소한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아, 네. 강평 소방서에서 지원 요청이 와서 다녀왔어요.”
“소방서요? 어디 불이라도 크게 났었던가요?”
정소한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아, 아뇨. 산불 특별 관리 기간이라 산에 물 모이라는 걸 만드는 일을 하고 왔어요.”
“물 모이요?”
이번엔 그게 뭐냐는 호기심 어린 눈동자가 돌아왔다. 희윤은 제가 들었던 설명을 고대로 정소한에게 해 주었다.
“호……. 그런 게 있었구나. 그럼 산 하나를 연희윤 에스퍼랑 다른 세 분이 했다는 거네요.”
“전부는 아니고요. 하루 만에 산 전체를 하기는 힘드니까요.”
“그러게요. 그런 일은 팀 전체가 움직여야 하는 걸 텐데. 네 명이서 하는 건 턱도 없이 부족하죠.”
희윤도 그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막 도착했을 때 이미영 과장이 급하게 요청했는데 와 줘서 고맙다고 했던 걸 떠올리니 이유도 금방 알 수 있었다.
“지원을 급하게 해서 그런 것 같았어요.”
목숨을 걸고 사람들을 지키는 에스퍼에게 그런 일을 해 달라고 요청하는 게 맞는지 고민하지 않았을까. 또 서울 지부 외에 다른 곳에도 연락했지만, 온 건 고작 희윤을 비롯한 셋뿐이었으니.
“하긴……. 솔직히 괴물체를 상대하거나 자연재해 복구 같은 큰일이 아닌 고작 산에 물을 채우는 일로 에스퍼를 많이 보낼 순 없죠.”
정소한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하지만 희윤이 보기에는 그것도 충분히 에스퍼가 할 만한 임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굳이 정소한에게 제 의견을 말하지는 않았다. 이후 둘은 이런저런 사소한 얘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기실 대부분 정소한이 대화를 주도했고, 희윤은 주로 듣기만 했다. 그렇게 1시간 지나자 화면에 안정도가 80%를 넘겼다.
“음……. 지금 상태 어떠세요?”
멍하니 수치를 보던 희윤이 고개를 돌렸다. 정소한은 붙들었던 손을 떼고 한숨을 쉬었다.
“괜찮아졌어요.”
“그럼 나머지는 내일 해도 될까요? 다 채우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것 같아서요.”
희윤은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