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85)

정소한이 또 한숨 같은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연희윤 에스퍼, 이유 안 물어보세요?”

“네?”

혹시 해승에게 따로 연락 온 게 없나 확인하려 스마트폰을 꺼내던 희윤이 그 말에 무슨 소리인가 하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왜 한 번에 다 안 해 주고 내일 하자고 하는지요.”

“어…… 피곤해서 그러신 것 같아서요.”

어느새 10시가 다 되어 갔다. 퇴근한 사람을 일부러 불러서 가이딩을 했으니 그 정도는 이해해야지.

희윤은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어차피 내내 이어지던 어지럼증도 사라졌고, 이대로 푹 쉬면 컨디션도 회복될 듯했다.

“내일 다시 날 불러 달란 소리였어요.”

“아.”

희윤의 멍한 얼굴을 보며 정소한은 픽 웃었다. 지금 제가 왜 그런 소리를 했는지 아마 이해를 못 한 듯했다.

나이가 스물일곱이라던데 생각보다 순진하다. 이런 사람을 표해승 곁에 붙여 두다니 어울리지 않았다.

‘차라리 내가 낫지.’

정소한은 그 생각을 속에 삼키며 다시 입을 열었다.

“출근하면서 연락해 주세요. 그럼 곧장 가이딩 실로 올 테니까요.”

“내일 상황 보고 바로 연락 드릴게요.”

희윤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내일 가이딩해 달라며 연락할 생각은 없었다. 그냥 고맙다고 인사는 하겠지만.

“늦은 시간인데 기꺼이 와 주셔서 감사해요.”

“뭘요. 정 그러면 나가는 길에 커피 한잔 사 주세요.”

“카페에서 비싼 거 사 드릴게요.”

“이 시간에 문 연 데 찾으려면 오래 걸릴 텐데요. 오늘은 편의점 커피로…….”

정소한이 미처 말을 다 마치기도 전이었다. 희윤의 손에 들려 있던 스마트폰에서 발랄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희윤은 곧바로 고개를 내려 발신자를 확인했다. 해승이었다.

“잠시만요.”

정소한에게 양해를 구한 희윤이 곧장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해승아.”

- 형, 어디예요? 아직도 본부에 있어요?

“응. 이제 나가려던 중이야. 넌?”

- 저도 거의 도착했어요. 그런데 왜 이렇게 늦게까지 있어요? 누가 퇴근 안 시켰어요?

뒤에 말은 농담인 듯했다. 아닌 게 아니라 해승의 말투에는 웃음기가 묻어났다. 희윤도 자연히 미소를 띤 채 대꾸했다.

“아니. 가이딩 좀 받느라.”

- ……가이딩이요? 누구한테요?

기분 탓인가. 아까보다 말하는 투가 차가워진 것 같은데? 희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정소한 가이드님한테.”

- 하…….

기분 탓이 아닌가 보다. 해승은 기막히다는 듯 한숨을 길게 쉬었다.

- 일단 알겠어요. 곧장 로비로 나와 계세요.

“응. 알았어.”

희윤은 뭔가 잘못한 기분이 들어 고개까지 끄덕이며 얌전히 대꾸했다. 그 모습을 정소한이 묘하게 보는 건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표해승 가이드예요?”

“아, 네. 지금 거의 왔다고 해서 나가 봐야 할 것 같은데…….”

“그럼 같이 가요. 저도 돌아가려고 했어요.”

“네.”

정소한의 대답을 듣자마자 희윤은 망설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해승이 오고 있다니 어쩐지 마음이 조급해졌다.

“연희윤 에스퍼.”

엘리베이터 숫자가 변하는 걸 뚫어지도록 보던 희윤이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네?”

“혹시…….”

정소한이 막 질문하려던 순간. 마치 방해라도 하듯 또 스마트폰이 울렸다. 희윤은 미안하다는 눈을 하고는 전화를 받았다.

“응. 해승아.”

- 저 입구에 차 세웠는데 어디세요?

“나도 다 내려왔어.”

이제 막 엘리베이터는 로비에 멈추던 참이었다. 곧이어 문이 열리자 희윤은 정소한에게 먼저 내리라며 눈으로 말했다.

그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희윤이 통화 중인 걸 보고는 입을 다물고 밖으로 나왔다.

- 정소한이랑 같이 있네요?

바쁘게 로비를 가로지르는데 해승의 말소리가 들렸다. 곧 희윤은 입구에 선 길쭉한 인영을 발견했다.

“해승아!”

희윤은 당장 전화를 끊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해승은 희윤에게 잠시 눈길을 주더니 정소한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소한도 멈추어 선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해승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건 어딘지 모르게 도발에 가까웠다. 희윤이 그런 해승을 의아하게 바라보는데, 불쑥 긴 팔이 앞으로 뻗어와 희윤의 어깨를 붙들었다.

“응?”

멍하니 보는 사이 그대로 끌려가 해승의 곁에 바짝 붙어 버렸다. 졸지에 어깨동무를 당한 희윤은 왜 이러냐고 물으려다 멈칫했다.

해승이 가이딩을 시작해 익숙한 기운이 흘러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형. 너무해요. 다른 사람한테 가이딩 받다니.”

해승이 고개를 숙이며 희윤의 귓가에 속삭이듯 투정을 부렸다. 귀가 간질간질해 희윤의 눈꼬리가 속절없이 떨렸다.

“너 바쁜 것 같아서.”

동요한 티를 내지 않으려 변명을 꺼냈다가 얼른 말을 바꾸었다.

“미안.”

저를 내려다보는 해승의 눈빛이 꽤 침울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네. 다음번에는 꼭 저한테 먼저 말하세요.”

“그럴게.”

해승이 희윤의 뒷머리에 이마를 비볐다. 꼭 커다란 개가 주인에게 매달려서 애교를 부리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정소한이 그런 둘을 뚫어지도록 바라봤다. 해승은 더 보란 듯이 희윤에게 몸을 밀착했다. 맞닿은 곳에 온 정신이 쏠린 희윤은 둘의 신경전을 알지 못했다.

“형의 첫 가이딩은 내가 해 주고 싶었는데.”

이미 그동안 가이딩은 받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희윤은 해승을 달래 주기 위해 제게 매달린 머리를 토닥거렸다.

머리카락이 매끄럽고 부드러워서 자꾸만 만지고 싶은 촉감이었다. 저도 모르게 쓱 쓱 손을 움직일 때였다.

“연희윤 에스퍼.”

희윤은 정소한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이곳에 둘만 있던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후다닥 해승에게 떨어지려 했다.

“왜요.”

물론 시도는 시도로만 끝나고 도로 해승에게 붙들려 끌려갔지만.

“어, 저기. 정소한 가이드께 인사해야 해.”

희윤이 난감하게 말하자 해승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당장 날 선 눈빛이 정소한에게 꽂혔다. 얼른 꺼지라는 의미를 정소한은 단번에 알아들었다.

“오늘 정말 고생 많이 하셨어요. 첫 출동이신데 훌륭하게 잘 해결하셨다니 대단하시고. 오늘 푹 쉬고, 내일 봬요.”

정소한이 해승의 눈빛을 무시하고 미소를 띠고 희윤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 웃는 얼굴보다 해승을 거슬리게 한 건 따로 있었다.

“내일?”

마치 내일 만날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당연하게 보자고 하는 정소한의 말이었다. 그러나 희윤은 미처 이유를 알아채지 못했다.

“네. 정소한 가이드님. 오늘 흔쾌히 와 주셔서 고마웠습니다. 가이딩해 주신 것 감사하고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덕분에 희윤이 정소한을 보며 인사할 때, 해승의 얼굴은 굳었다. 정소한은 보란 듯이 희윤에게 인사하고 돌아섰다.

“형, 내일 왜요? 정소한이랑 다시 만나기로 했어요?”

“정소한 가이드가 너보다 연상이지 않아?”

그게 뭐. 해승은 순간 그렇게 생각했지만, 묻는 상대가 희윤이였기에 목소리는 부드럽게 나갔다.

“무슨 상관이에요.”

물론 내용은 여전히 삐딱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름 막 부르는 건 아니지.”

“알았어요.”

알았다고 하는데 표정을 보니 달라질 것 같진 않다. 희윤은 더 말할까 말까 하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 정소한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정소한 가이드와는 내일 가이딩 때문에 만나기로 했었어.”

“가이딩이 왜요. 아, 다 못해서?”

그렇게 말한 해승이 돌연 희윤의 손목을 붙들어 올렸다. 왜 그런가 했더니 그대로 희윤에게 스마트 워치를 보여 준다.

“그럼 이제 필요 없겠네요.”

희윤은 그대로 시선을 내렸다가 “아.” 하고 짧게 탄성을 흘렸다. 해승의 말대로였다.

“그러게…….”

이게 S급의 힘일까. 놀랍게도 해승과 만난 지 불과 몇 분 되지도 않았는데 안정도가 100%가 된 상태였다.

해승이 희윤을 끌어당겨 안자마자 가이딩을 시작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곤 해도 속도가 빠른 편이었다. 전에는 안정도 측정이 되지 않아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됐죠? 그럼 이제 정소한한테 메시지 보내서 말해요. 내일 안 만나도 된다고.”

해승이 재촉하듯 말했다.

“정소한 가이드.”

희윤이 곧바로 해승의 말을 정정했다.

“네. 어쨌든 연락해요. 내일 만날 필요 없다고.”

그러나 여전히 해승은 정소한을 대접해 줄 마음이 없는 듯 얼버무렸다. 희윤이 그런 해승을 가만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일 할게.”

“왜 내일 해요?”

“어차피 거절할 생각이었으니까.”

해승이 ‘왜?’ 하는 눈으로 희윤을 보았다.

“너 만나면 해 주겠지 했어. 그래서 굳이 다시 만날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데…….”

희윤도 ‘아니야?’ 하는 눈빛으로 해승과 눈을 맞췄다. 뭐 굳이 대답을 들을 것도 없었다. 이미 해승과 만나자마자 가이딩은 한 상태였으니까.

순간 해승의 눈매가 예쁘게 곡선을 그렸다. 입술에도 주변이 다 환해질 정도로 미소가 걸렸다.

“그러네. 형한테는 내가 있으니까. 그렇죠?”

희윤은 제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게 느껴졌다. 어찌나 요란한지 꼭 귀에 들릴 것만 같았다. 이제는 왜 그런지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희윤 형?”

해승이 의아한 눈으로 희윤을 봤다. 희윤은 지금, 이 순간엔 차마 그런 해승을 마주 볼 수 없었다.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아직도 박동은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이는 중이었다.

“응. 맞아. 나한테는 네가 있으니까.”

부디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바랐다. 희윤은 해승이 제 발개진 귀와 마주치지 못하는 눈동자를 유심히 살피는 걸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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