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85)

저녁을 먹은 후 당연하다는 듯 희윤은 해승의 집으로 돌아왔다. 언제나처럼 저녁을 함께 먹은 후 씻고 나서 둘은 나란히 침대에 누웠다.

“형, 오늘 진짜 고생 많이 하셨어요.”

숨소리도 들릴 만큼 달라붙듯 누운 해승이 작게 말했다. 희윤은 어두운 천장을 보다가 힐끔 옆을 봤다.

“별로 힘들진 않았어.”

“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물웅덩이를 만드셨다면서요. 보통 일은 아니죠. 산도 타고, 능력도 써야 하는데.”

그렇긴 했다. 사실 물 모이를 만드는 것보다 산을 오르내리는 게 더 고생스럽긴 했으니까. 문래산은 경사가 가파르지는 않지만, 바위 지형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희윤은 해승이 대수롭지 않게 제 수고를 알아준 게 좋아 입가에 미소가 피었다.

“형, 푹 주무세요.”

“응. 너도 잘자.”

눈을 감았지만 어째 잠은 오지 않았다. 희윤은 그저 조용히 숨만 내쉬다가 옆자리가 조용해지자 결국 눈을 떴다.

슬그머니 옆으로 몸을 돌렸다. 불을 껐는데도 해승의 미모는 너무도 눈에 잘 들어왔다. 예쁜 선을 그리며 그어진 눈썹, 미끄러질 듯 곧은 콧날. 살짝 도톰한 듯한 붉은 입술까지.

희윤은 고른 숨을 쉴 때마다 살짝씩 움찔거리는 해승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 닿을 듯 가까워진 거리를 깨닫고 불에라도 덴 듯 화들짝 몸을 뒤로 물렸다.

심장이 발랑발랑 뛰었다. 어찌나 거센지 제 귀에도 박동이 들릴 듯했다. 뒤늦게 해승이 깬 건 아닌지 걱정되어 살펴보았다.

다행히 해승은 눈을 뜨지 않았다. 희윤은 조심조심 움직여 침대를 빠져나왔다. 슬쩍 해승의 얼굴을 살피고 역시나 소리가 나지 않게 조용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희윤이 완전히 빠져나간 직후, 해승의 감겼던 눈꺼풀이 슬그머니 올라왔다. 고개를 옆으로 돌린 해승이 닫힌 문을 보며 잠시 고민했다.

희윤이 제 눈치를 본다는 건 저녁을 먹을 때부터 알아챘다. 하지만 본인이 티를 내고 싶지 않은 것 같으니 모른 척했을 뿐이었다.

“흠…….”

어쩔까. 술 한잔하며 무슨 일인지 물어볼까. 아니면 좀 더 기다려 볼까. 희윤이 제가 모르는 고민을 안고 있는 게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단 조금 더 모른 척해 보자고 마음을 정한 해승이 도로 고개를 바로 하고 눈을 감았다.

* *

다음 날 오전 희윤은 팀장의 호출을 받았다. 혼자는 아니고 안효정도 함께였다.

“강평 소방서에서 연락이 왔어요. 두 분 덕분에 일이 아주 잘 끝났다면서 고맙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팀장이 웃는 낯으로 말했다. 희윤은 목덜미를 손으로 쓸었다.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웅덩이에 물을 채우는 정도였을 뿐인데 과한 칭찬을 받은 것 같아 민망했기 때문이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안효정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래서 서울 소방본부에서도 정식 요청이 왔어요. 서울에 있는 산에 물 모이를 만들 예정인데 물과 빙결 속성 에스퍼를 지원해 줄 수 있는지.”

팀장이 코를 검지로 문지르며 이어 말했다.

“사실 지부장님은 이런 일에 있어서 거절하시는 분이 아니라서요. 이미 인력을 지원하겠다는 뜻을 전달한 상태예요.”

중앙본부 지부장은 이능력자가 사회와 너무 동떨어진 존재라는 인식을 주지 않기 위해 세상에 공헌할 수 있는 일을 진행해 왔다.

그건 괴물체를 물리치는 일만 말하는 건 아니다. 에스퍼의 힘이 필요한 곳이라면 그게 어떤 것이든 될 수 있는 한 지원한다는 게 지부장의 지론이었다.

“물론 우리는 언제나 괴물체의 등장에 대비해야 하니 본부에 있는 에스퍼 전체가 지원하는 건 어렵지만, 팀마다 돌아가면서 파견하는 방식으로 하기로 했어요.”

“그럼 우리 지부만 아니라 다른 곳도 마찬가지겠네요.”

“맞아요. 동부, 서부, 남부, 북부 전부 공문이 나갔어요. 그 때문에 오후에 전체 회의할 거예요. 공지도 곧바로 전달될 테니까 시간이랑 장소 확인하고 참여해요.”

“네.”

“알겠습니다.”

팀장은 그것으로 얘기가 끝났다는 듯 일들 하라며 자리를 떠났다. 자리로 돌아온 희윤은 모니터에 떠 있는 서류를 멍하니 봤다.

막노동부터 식당 서빙, 배달, 주차 지도 등 안 해 본 게 없었지만, 사무실에 앉아 본 적은 없어 서류는 낯설기만 했다.

“차라리 출동하는 게 낫겠다 싶죠?”

희윤은 모니터에 고정했던 눈을 옆자리로 돌렸다. 안효정이 네 마음 다 안다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나도 처음에 본부 입사했을 때 그랬어요. 대체 서류 작업할 건 뭐가 이렇게 많고 복잡한지. 차라리 그냥 출동해서 현장 일하는 게 더 편하다고 생각했다니까?”

“선배님도요?”

안효정의 너스레에 희윤이 물었다.

“그럼요. 솔직히 이런 거 왜 써야 하나, 뭘 써야 하지 했다니까. 그래도 한 번 따라 해 보면 대충 어떤 식으로 써야 하는지 파악될 거예요. 그거 출동 보고서죠?”

“네.”

희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잠시만요.”

안효정이 마우스를 몇 번 움직였다. 곧 희윤의 메신저 앱이 반짝반짝했다.

“그거 내려받아요. 지난번에 서해만 갯벌 다녀와서 쓴 거예요. 똑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조금 도움이 될 거예요.”

“네.”

희윤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고 첨부 파일을 받았다. 그리고 두 개 파일을 번갈아 보면서 빈칸을 채워 나갔다.

“희윤 씨 독수리 타법이네요. 의외다, 그건 또.”

희윤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걸 가만 지켜보던 안효정이 말했다.

“컴퓨터로 작업해 본 적이 없어서요.”

“그럴 수도 있지. 그럼 본부 오기 전엔 무슨 일 했었어요?”

자연히 대화의 흐름이 이전에 하던 일에 관한 것으로 흘렀다.

“이것저것 했어요. 공사장에서도 일하고, 벽지 붙이는 일도 하고, 술집에서 서빙도 하고, 홀도 보고, 배달도 하고, 물류센터에서 상하차도 하고…….”

“헉. 희윤 씨 보기보다 이런저런 일 많이 했구나.”

‘보기보다’는 뭐지. 희윤은 타자 치던 걸 잠깐 멈추고 안효정을 힐끔 봤다. 정말 놀랐는지 눈이 살짝 커져 있었다.

“선입견인지 모르겠는데 희윤 씨는 뭐랄까. 좀 곱게 자란 도련님 같은 얼굴이잖아. 그래서 험한 일은 안 해 봤을 줄 알았거든. 하더라도 고액 과외 이런 거?”

“그런가요.”

그런 말은 또 첨 들어 봤는데. 희윤은 괜히 모니터에 비친 제 얼굴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안효정이 말한 ‘도련님 얼굴’이 어떤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때 핸드폰 알림이 울렸다.

[해승 : 형, 오늘은 날 좋으니까 밖에서 점심 먹을까요? 오전 11:22]

해승이 보내온 것이었다. 그와 점심을 먹는 건 이제 웬만한 일이 생기는 건 아니고서는 거의 고정이었다.

메뉴는 구내식당이거나 해승이 미리 찾아 둔 식당으로 가고는 했는데, 새삼스럽게 무슨 얘기인가 했다.

[나 : 응. 좋아. 오전 11:22]

희윤은 간단하게 대답을 보냈다. 어차피 해승이 하는 일에 반대할 생각은 없으니까.

느릿느릿 타자를 치다가 보니 출동 보고서는 반절도 못 쓰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표해승 가이드랑 먹죠? 가 봐요.”

희윤이 슬쩍 눈치 보자 안효정이 모니터에서 눈도 떼지 않고 쉬쉬 손을 내저었다.

“네. 선배, 다녀오겠습니다. 식사 맛있게 하세요.”

“응. 그래요. 희윤 씨도. 커피는 안 사 와도 되고요.”

희윤은 항상 점심 먹고 오는 길에 커피를 사 왔다. 본인 딴에는 표해승하고만 계속 먹으니 신경이 쓰여서 그런 듯한데 안효정으로서는 그게 더 미안했다.

희윤이 문제인가 해승이 문제지.

희윤은 만나는 사람마다 꾸벅꾸벅 고개를 숙이며 맛있게 드시라 인사했다. 그 모습을 보고 안효정은 한숨을 쉬었다.

“진짜 표해승 주긴 너무 아까운데…….”

그래도 어쩌겠는가. 본인이 저렇게 정신을 못 차리는데.

* *

“형!”

로비에 나오자마자 희윤은 팔을 휘휘 저으며 웃어 보이는 해승을 발견했다. 손에는 커다란 쇼핑백도 들고 있었다.

“해승아.”

희윤이 해승에게 걸어가는 사이 로비에 있던 사람들 시선이 아닌 척하며 그들에게 몰렸다. 해승은 진즉 알아차리고 쓱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보다는 좀 줄어들긴 했는데, 아직도 희윤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들이 많았다.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희윤이 제 에스퍼라고 티를 내고 다니는데도 포기를 모르다니. 물론 가이드만 그런 게 아니라 같은 에스퍼도 그렇다.

수습일 때 보인 능력과 단정한 외모 때문에 희윤은 본부 내에 암암리에 관심을 끌고 있었다. 그러다가 정식으로 출근하기 시작하니 슬슬 접근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희윤 앞에서 일부러 노트를 떨어뜨린 가이드, 전화하느라 못 본 척 아슬아슬하게 부딪칠 뻔한 에스퍼, 별거 아닌 일로 희윤을 부르는 같은 팀원 등등 해승의 눈에 뜨인 것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만약 해승이 희윤의 옆에 사수하고 있지 않았다면 주변에는 사람들로 득시글거리고 있을 것이다.

“오래 기다렸지?”

“아뇨. 저도 방금 내려왔어요.”

해승이 생글생글 웃으며 희윤 곁에 보란 듯 달라붙었다. 그러자 몇몇이 시무룩한 얼굴로 돌아서는 게 보였다.

‘어차피 말도 못 걸면서.’

해승은 속으로 코웃음 쳤다. 정작 희윤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태는 모르는 듯 쇼핑백 안만 관심을 보였다.

“웬 도시락이야?”

“오늘 날씨 좋잖아요. 근처 공원에서 돗자리 깔고 먹어도 괜찮을 것 같아서 준비했어요. 어때요?”

쇼핑백이 왜 큰가 했더니. 도시락만 아니라 안에 돗자리까지 준비되어 있어서 그런 듯했다.

“그래.”

희윤의 흔쾌한 대답에 해승이 빙그레 웃으며 손을 잡았다. 희윤은 마주 잡은 두 손을 내려다보다가 모른 척 고개를 들었다.

어쩐지 목이 마른 기분이 들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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