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승이 가려는 공원은 본부를 벗어나 도보로 10분 정도로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널찍한 8차선 도로를 건너 타원형으로 된 공원에 들어서니 예상외로 사람이 제법 많았다. 해승과 희윤은 자전거 도로 옆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벚나무가 군락을 이루는 아래에 돗자리를 폈다.
“어때요?”
“좋네.”
희윤이 고개를 들었다. 연녹색 잎 사이로 활짝 핀 벚꽃이 보였다.
“그렇죠?”
쇼핑백에서 도시락을 꺼내던 해승이 웃었다.
“응. 덕분에 꽃 구경도 하네.”
“꽃은 금방 지니까요. 형이랑 점심 먹으면서 보고 싶었어요.”
희윤이 슬쩍 시선을 내려 해승을 보았다. 본인이 무슨 말을 했는지 자각도 없는 듯 도시락을 여느라 아래를 보고 있었다.
희윤은 괜히 목뒤만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봄바람 때문인가 간질간질한 기분이다. 제 마음을 자각하고 나니 해승의 말 한마디, 눈빛이나 표정에도 일희일비했다.
그걸 굳이 티 내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저 해승과 지금 이대로 오래오래 함께했으면 하는 소망만 있을 뿐.
“자요, 형.”
해승이 희윤의 앞에 도시락을 내밀었다. 지난번과 구성이 조금 달랐다. 탕수육과 샌드위치, 샐러드와 스파게티. 담백해 보이는 빵과 후식으로 먹으라는 듯 과일과 케이크도 있었다. 뭔가 양식과 중식이 섞인 메뉴였다.
“맛있어 보인다.”
희윤은 해승이 내미는 젓가락을 받아 들며 말했다. 냄새도 색도 역시나 입맛을 당기게 했다.
“드세요.”
“응. 너도 먹어. 잘 먹을게.”
“네.”
둘은 사소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며 천천히 도시락을 비웠다. 아침 출근길에 보았던 풍경. 어제 함께 감상했던 드라마나 예능. 퇴근 후에 먹을 저녁과 술은 어떨지 하는 것 등등.
별 대단한 얘기는 아니어도 해승과 나란히 앉아 꽃을 보면서 식사하니 희윤의 얼굴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지난밤에 일이 신경 쓰여 일부러 자리를 마련했던 해승의 표정도 더없이 부드러웠다.
“아, 참. 이따가 오후에 회의 잡혔어.”
탕수육을 집던 희윤이 막 생각난 듯 말했다.
“회의요?”
“응. 강평 소방서에서 했던 일을 다른 소방서에서도 하기로 했나 봐.”
“흠…….”
“서울 소방본부에서 요청이 왔대. 대대적으로 물 모이를 만들 예정이라 도움을 달라고.”
“그래요. 그럼 형도 나가겠네요?”
“아마 그렇겠지?”
꼬치꼬치 묻는 해승을 희윤이 슬쩍 봤다. 혹시 내가 바빠지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해서였다. 그러나 의외로 해승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좋네요.”
“그래?”
“네. 형은 본부에만 있는 것보단 현장 나가는 게 편하잖아요.”
“아…….”
그렇게 티가 났나. 아까 안효정도 그런 말을 했는데. 희윤은 괜히 민망한 기분에 벚꽃을 보는 척 시선을 돌렸다.
해승은 부끄러워하는 희윤을 보며 생긋 웃었다. 물론 사무실에 있는 것보다 밖에서 일하는 걸 편해하는 것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단 다른 사람 방해 없이 희윤과 있을 수 있어 좋았다.
‘잘 됐지. 형이랑 밖으로 다닐 핑계도 되고.’
해승의 속마음은 그랬다. 어떻게든 희윤에게 말을 걸어 볼까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사람들이 있는 것보단 바깥이 그에게도 여러모로 좋은 일이니까.
그때 제법 세찬 바람이 불었다. 연둣빛 잎 사이로 매달렸던 흰 꽃잎이 눈발처럼 우수수 휘날렸다.
그사이에 앉은 희윤을 해승은 한동안 눈도 돌리지 못하고 바라봤다.
이상하게 심장이 술렁였다.
* *
희윤은 신기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간 몇 번 마주치거나 혹은 한 번도 본 적 없던 에스퍼들이 자리를 빼곡하게 채운 게 신기했다.
오후 회의는 지난번 공식 발표를 했던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참여 인원은 약 20여 명 정도였다.
“저기 저쪽에 보이는 남자 있죠?”
안효정이 희윤의 팔꿈치를 톡톡 치며 어딘가를 눈짓했다. 반대편을 보고 있던 희윤이 재빨리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파란 머리 남자분이요?”
“네. 좀 성깔 사납게 생겼죠. B급 물 속성이에요. 8팀. 딱 생긴 것답게 성격이 좀 까칠해도 일은 잘해요. 능력을 구사하는 모습도 화려하고. 그래서 자료 영상도 많으니까 관심 있으면 찾아 줄게요.”
“자료 영상이요?”
“네. 다른 에스퍼가 능력을 어떻게 쓰는지 보는 것도 도움이 될 테니까요.”
“볼 수 있다면 저야 좋죠.”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이었기에 희윤이 눈을 반짝하며 말했다. 본인 얘기하는 걸 알았는지 파란 머리 에스퍼가 이쪽을 보았다.
희윤이 꾸벅 고개를 숙이자 상대는 눈썹을 찌푸리더니 곧 마주 인사해 왔다. 그러더니 다시 쓱 시선을 본래대로 돌렸다.
희윤도 눈을 돌렸다가 익숙한 두 사람을 발견했다. 강평 소방서에 함께 파견 갔었던 물 속성 에스퍼 김영호, 박희수였다. 두 사람은 팀도, 속성도 같아서 제법 친한지 계속 둘이서 조용히 대화하고 있었다.
“희윤 씨, 저쪽은…….”
희윤은 안효정의 목소리에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회의가 시작되기 전까지 그녀는 대회의실 안에 있는 에스퍼 하나하나를 설명해 주었다.
많아서 다 외우지는 못하겠지만, 희윤은 얼굴이라도 익혀야겠다는 생각에 열심히 안효정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구성은 대체로 B급이 가장 많았고, C와 D도 고루고루 분포되어 있는데 A급 물 속성은 놀랍게도 희윤을 포함해 달랑 셋뿐이었다.
“음……. 신효영 부장은 현재 외부 출장 중이라 참석 안 하셨네요. 저기 앉은 분은 조현기 이사님. 희윤 씨랑 같은 A급이에요.”
“A급이 세 명뿐인 건가요?”
“생각보다 적은 것 같아요?”
희윤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안효정이 이해한다는 듯 웃었다.
“외부에서 보면 에스퍼가 되게 능력도 화려하게 쓰고 해서 다들 고등급 같아 보이긴 하죠. 근데 A급이 왜 A급이겠어요. 그만큼 많이 없다는 의미예요. 물론 그것만으로 다른 등급이 실력이 부족하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S급은…….”
“우리 본부는 없어요. 인천지부에 바람 속성 하나. 제주지부에 비전투계 하나.”
희윤의 뇌리에 절로 해승이 떠올랐다. S급 가이드인 해승은 그럼 대체 얼마나 대단한 걸까.
“가이드도요?”
“S급 가이드는 표해승이 유일하죠. 한국, 중국과 일본 통틀어서도 하나뿐이고. 사실 아까 인천지부에 있는 에스퍼 얘기했었잖아요.”
“네.”
“둘이 나이가 같아요. 그것 때문에 인천지부에서 표해승 가이드를 영입해 가려고 몇 년 동안 얼마나 애썼는지 몰라요.”
“아…….”
같은 S급이라면 그럴 수 있었다. 근데 왜 그 말을 들은 순간 심장이 철렁했는지 모를 일이다. 아니 이유는 알고 있지만, 희윤은 남몰래 가슴을 살살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그럼 둘이 잘 맞았어요?”
“그랬으면 표해승 가이드가 여기 없었겠죠. 매칭률은 그나마 50%대까지 나왔는데 상성이 진짜 최악이었어요.”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매칭률이 50%대라면 가이딩 효율이 많이 떨어지는 수치다. 거기다 상성까지 좋지 않았다면…….
“뭣보다 표해승 가이드가 좋아하지 않았어요. 둘이 성격도 정말 안 맞았거든요.”
“아.”
희윤은 혹시 안효정이 좀 더 그 에스퍼에 관해 알려 주길 내심 바랐으나 대화는 더 이어지지 못했다.
- 회의 시작하겠습니다.
단상에 사회를 진행을 맡은 에스퍼가 올라와 말했기 때문이었다. 회의는 팀장에게 들었던 내용과 같았다.
- 그럼 이제부터 서울 소방본부 예방팀 정문성 팀장님의 설명이 있겠습니다.
다른 게 있다면 서울 소방본부에서 온 사람이 직접 마이크를 잡고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었다.
- 하여 뛰어난 실력을 지닌 에스퍼님들의 적극적인 참여 부탁드립니다. 그럼 궁금한 사항 있으시면 질문받겠습니다.
마이크에서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팔이 올라왔다. 대체로 의견은 물 모이라는 게 대체 뭐냐는 것, 일정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냐는 것, 인원을 어떤 식으로 분배할 건지 등이었다.
진행자는 차분한 말투로 답변했고 희윤은 그들이 나누는 질의응답을 들으며 핸드폰을 힐끔힐끔 내려다보았다.
눈길 한 번씩 줄 때마다 대화창에는 해승이 보낸 메시지가 하나씩 추가되어 있었다.
[해승 : 형, 회의 어때요. 재미없죠? 오후 2:13]
[나 : 나쁘지 않아. 본부 소속 물 속성 에스퍼 이렇게 많은 거 처음 봐서. 오후 2:13]
[해승 : 흠……. 거기 조 이사님 있죠? 그 사람이랑 친하게 지내요. A급이고 실력도 좋고, 제일 괜찮으니까. 오후 2:14]
친하게 지내라니. 직급도 나이도 너무도 차이가 나는 사람이다. 희윤은 조 이사를 힐끔 봤다.
딱 눈이 마주쳤다.
흠칫 놀라는데 조 이사가 빙그레 웃으며 눈인사를 해 왔다. 희윤 역시 뒤늦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해승과 몰래몰래 메시지를 주는 사이 바쁘게 오가던 질문과 답변은 어느새 소강상태를 보였다.
- 그럼 이만 회의를 마칩니다. 그 외 자세한 사항은 각 팀 팀장님께 자료를 넘겼으니 확인해 보길 바랍니다.
회의는 1시간이 훌쩍 넘기고서야 끝났다. 회의라기보다는 서울 소방본부와 어떤 업무를 하게 될지 설명하고 궁금한 점을 묻고 답하는 것에 가까웠다.
아까 열심히 손을 들던 열의는 회의를 마쳤다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밖으로 나가는 행동력으로 변했다.
“으……. 희윤 씨 우리도 이만 가자.”
“네.”
멍하니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구경하던 희윤이 제 팔을 툭 치며 안효정이 하는 말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연희윤 에스퍼.”
막 희윤이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누군가 입구에 서 있다가 웃는 얼굴로 말을 걸어 왔다.
“안녕하세요. 전 2팀 소속 진선영이라고 해요.”
20대 초반쯤 되었을까. 귀염성 있는 미소를 띤 여성이 인사와 함께 자기소개를 전했다. 희윤의 옆에 있던 안효정이 흥미진진하게 눈을 빛냈다.
“네. 안녕하세요. 진선영 에스퍼님.”
마주 인사하는 희윤의 눈엔 제게 무슨 용건이 있나 하는 서려 있었다. 최근 몇 번이 비슷한 상황이 일어났었으면서도 아직 이유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최근 강평 소방서에 파견 다녀오셨죠?”
“네.”
“시간 괜찮으시다면, 어떤 일을 하셨는지 정보 좀 알려 주실 수 있으세요? 저도 기사를 보고 흥미를 갖고 있었거든요. 참, 커피는 제가 살게요.”
딱 들어도 작업이었다. 안효정은 희윤이 어떤 대답을 할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았다. 희윤이 눈을 느리게 깜빡이더니 대꾸했다.
“특별히 어려운 일은 없었습니다. 그냥 웅덩이에 물만 채우면 되는 거라서요.”
희윤은 따로 시간을 내서 얘기할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 꺼낸 말이었다.
“아……. 그런가요.”
진선영이 당황한 듯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안효정을 힐끔 봤다.
“그러지 말고 희윤 씨 카페 가서 마저 얘기하자. 졸리고 피곤하니까 커피도 한잔하고.”
도와 달라는 신호에 안효정이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렇게 적극적으로 희윤과 친해지고 싶어 하니 같은 팀으로서 도움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희윤 씨한테 물 속성 에스퍼 소개해 두려고 하던 참이었는데 잘됐잖아. 이김에 좀 친해져 봐.”
“아…….”
“희윤 씨도 이것저것 능력에 관해서 궁금한 거 많잖아. 진선영 에스퍼도 5년 차라 도움이 많이 될 거야.”
다른 것도 아니고 물을 사용하는 능력에 관해서 얘기하자는 소리에 희윤의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마치 방해라도 하겠다는 듯, 손에 쥔 핸드폰이 바르르 떨지 않았다면 희윤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을 거다.
“아, 잠시만요.”
발신자가 해승이라는 걸 확인한 희윤이 안효정과 진선영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 회의는 끝났어요?
다정한 음성이 들려왔다. 희윤은 저도 모르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지금.”
그 모습을 안효정과 진선영이 보고 있다는 줄도 몰랐다.
- 잘됐네요. 형, 그럼 바로 올라오세요.
“올라와? 어디로?”
- 지난번에 광고 촬영 건으로 프로덕션 사람들이랑 만났던 회의실이요.
“아, 응. 근데 무슨 일인데?”
- 지금 김 감독이랑 와 있으니까 얼른 오세요. 광고 일정 나왔대요.
“아…….”
그러고 보니 그 일도 있었구나. 희윤은 새까맣게 잊었던 광고를 떠올리며 안효정을 바라보았다.
“희윤 씨, 왜?”
“죄송한데 지금 다른 데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무슨 일인데? 표해승 가이드가 보재?”
안효정이 설마 하는 얼굴로 물었다.
“네.”
희윤이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안효정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시선이 절로 맞은편에 있는 진선영에게 향했다. 그쪽도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진선영이 작게 속삭이는 말은 희윤은 듣지 못했고, 안효정만 들었다. 곧 보자면서 전화를 끊은 희윤이 두 사람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해요. 지금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다음에 다시 뵐게요.”
“네. 연희윤 에스퍼.”
희윤은 본의 아니게 제가 단칼에 작업을 거절했다는 것도 모르고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고는 돌아섰다. 뒤에서 안효정이 못 말리겠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