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85)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대번에 희윤에게 몰렸다. 희윤의 눈길은 곧장 생글생글 웃고 있는 해승에게로 갔다.

“형, 이쪽으로 와요.”

해승이 환한 낯으로 희윤에게 손짓했다. 희윤은 감독과 운영팀 직원에게 눈인사하고 곧장 해승의 옆에 앉았다.

분명 아까 점심에도 만났는데 오후의 해승은 묘하게 더 반짝거리는 것 같았다.

“연희윤 에스퍼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넋 놓고 해승을 보던 희윤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김 감독이 싱글싱글 웃는 낯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네.”

“연락 오래 기다리셨죠? 저희도 최대한 빨리 연락드리려고 했는데, 이런저런 정리할 게 있어서 좀 늦었습니다.”

“아닙니다.”

“역시 마음이 넓으십니다.”

너스레를 떤 김 감독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광고 어떻게 진행되는지 설명드리겠습니다.”

광고는 사진과 영상 버전 두 가지로 제작하고 영상 분량은 15초 정도로 제작할 예정이라고 했다. 촬영은 전부 실내에서 진행될 거고 특수 효과를 이용하기 때문에 희윤이 굳이 능력을 사용할 일은 없어서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거라고 했다.

“저희가 말씀드린 대로만 잘 따라오시면 어려울 거 하나 없습니다.”

“촬영 날짜는 그럼 언제인가요?”

“되도록 연희윤 에스퍼 가능하실 때로 맞추려고 하는데 언제가 괜찮으십니까?”

“전 특별히 일정이 잡힌 게…… 아, 소방서 파견 때만 아니면 괜찮습니다.”

“그건 괜찮아. 형이 일정이 있으면 그쪽에서 조절할 거니까.”

그때까지 묵묵하게 듣기만 하던 해승이 말했다. 희윤이 무슨 말이냐는 눈으로 보자, 해승은 설명을 덧붙였다.

“그건 어차피 누가 가든 상관없는 거잖아. C, D급이 우선 배치될 거야. 형처럼 고등급인 인물은 되도록 그쪽 일정에 맞춰 주는 편이야.”

광고가 현장 출동보다 더 중요한 일인가. 희윤이 고개를 갸웃하자 해승이 웃는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공익 광고 촬영인데 더 중요하지.”

“아…….”

“물론 산불 예방을 위해서 물을 모으는 일도 중요하지만, 뭐 그걸 하는 게 꼭 형이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음. 그런가.”

아까 분명 누가 가도 상관없다고 했으면서, 해승이 은근슬쩍 말을 바꾸었다. 희윤은 그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 사람들도 바쁠 텐데 저 때문에 무한정 기다리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특별한 일정은 없습니다. 프로덕션 측과 맞추면 될 것 같아요.”

“그럼 일정은 저희가 본부와 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 *

회의가 있고 3일 후, 희윤은 해승과 함께 본부가 아닌 낯선 건물로 출근했다. 광고 촬영을 위해서였다.

“어서 오세요, 두 분.”

김 감독이 반색하며 희윤과 해승에게 다가왔다. 희윤은 김 감독에게 인사하면서도 주변을 둘러보았다. 처음 보는 풍경이 낯설면서도 신기했다.

오늘 함께할 스태프들과도 간단하게 인사를 끝낸 후 해승과 나란히 의상실로 이동했다. 촬영할 때 입을 옷으로 갈아입기 위해서였다.

희윤은 남색 제복이, 해승에게는 흰 정장이 주어졌다.

“음……. 그러고 보니 형, 공식 발표 때는 갑작스럽게 진행되는 바람에 에스퍼 정복 입은 모습을 못 봤네요.”

희윤의 모습을 훑은 해승이 말했다. 해승의 정장 차림에 넋을 놓고 있던 희윤이 그 말에 의문을 띄웠다.

“정복?”

“네. 공식 행사 때 입는 것 있거든요. 형한테 잘 어울릴 거 같은데.”

해승이 아쉽다는 듯 눈을 했다.

“가이드도 있어?”

“네, 있긴 한데. 뭐, 보시다시피 복장이 자유라서요. 에스퍼랑 달리. 그냥 이렇게 정장?”

“정장 입는구나…….”

뭐랄까 해승은 평소에 캐주얼한 스타일을 선호하는 것 같았다. 아마 편하게 입을 옷을 고르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일 텐데, 정장 입은 모습을 보니 분위기가 확 달라져 마치 새로운 사람을 보는 듯했다.

뭔가 어른스럽다고 해야 하나. 원래도 눈이 가는 미인인데 더더욱 시선을 끈다고 해야 하나.

“왜요? 이상해요? 지금 옷?”

“어? 아니, 아니. 이상하긴! 멋있는데! 평소에도 자주 보면 좋겠…….”

별생각 없이 말을 흘리던 희윤이 눈을 뎅그렇게 뜨고 입을 딱 다물었다. 하지만 이미 뒷말은 반쯤 흘린 상태였다.

“평소에도 이렇게 입는 거 보고 싶어요?”

해승이 눈매를 부드럽게 휘며 물었다. 입가에도 어느새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어째 아까보다 더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아 심장에 좋지 않다.

“아니, 그 꼭 그런 건 아닌데. 멋지긴 해…….”

희윤은 부정하다가 결국 사실대로 말하고 말았다. 확실히 평소보다 더 눈이 갔으니까.

“그래요? 음, 형이 그렇다면야.”

“꼭 입으라는 건 아니고!”

희윤이 손까지 내저으며 말했지만, 해승은 웃으며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살폈다. 희윤의 시선은 그런 해승을 계속 향했다.

정말 소설 속에 나오는 고위 귀족처럼 고상하고 매력적인 모습이었다. 특히 재킷 포켓에 꽃까지 꽂은 바람에 더더욱.

“형도요.”

해승이 거울을 등지고 희윤을 보며 생긋 웃었다. 어깨부터 가슴까지 쓸어내리는 손길이 가벼웠다. 하지만 희윤의 심장을 또 뛰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어쩌지. 이러면 안 되는데.’

해승은 에스퍼를 싫어한다고 했다. 자신에게 이러는 것도 그저 매칭률이 높아서 그런 거라는 말도 들었다.

‘가이딩 상성도 좋으니까.’

해승과 같은 S급인 에스퍼와도 최악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이는 단지 매칭률이 높은 에스퍼를 향한 의례적인 행동일 뿐일 터였다. 어떤 의미를 담고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친한 형 정도로만 생각해 줘도 만족해야 할 텐데.’

갈수록 더 신경 쓰이니 그게 문제다. 착각하지 말아야지. 희윤은 속으로 다시금 다짐했다.

“두 분 옷 입으셨으면 메이크업실로 이동할게요.”

스태프가 안으로 들어와 친절하게 말했다. 희윤은 서둘러 먼저 몸을 돌렸다. 해승이 그런 희윤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분위기가 괜찮았던 것 같은데 갑자기 어색하게 구는 게 영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붙잡아 물을 일도 아니었기에 해승도 희윤을 따라 메이크업실로 이동했다.

“음……. 연희윤 에스퍼님, 평소에 관리 잘 안 하시죠?”

메이크업 담당이 희윤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물었다. 희윤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요즘 해승과 지내면서 스킨, 로션이라도 바르는 거다. 예전에는 그마저도 제대로 챙기지 않았다는 말은 생략했다.

“모처럼 이렇게 예쁜 얼굴인데 아깝네요. 기본적으로 피부도 좋으셔서 조금만 신경 쓰면 훨씬 피부 결이 살아날 텐데.”

메이크업 담당은 본인이 다 안타깝다는 얼굴로 말하면서 희윤의 얼굴에 차근히 작업을 시작했다.

희윤은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그저 멀뚱멀뚱 눈만 깜빡였다. 그 옆에서 해승이 흥미진진한 얼굴로 구경하는 것도 몰랐다.

“자, 다 됐습니다!”

발랄한 목소리에 희윤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제야 희윤은 제가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깜빡 졸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서둘러 거울을 봤다가 이번엔 눈을 크게 떴다. 그곳에 낯익은 듯 낯선 자신이 있었다.

“역시 기본 바탕이 좋으니 실력 발휘한 티가 확 나네요.”

메이크업 담당이 뿌듯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희윤 형. 진짜 눈부셔요.”

희윤보다 먼저 메이크업을 끝낸 해승이 눈을 반짝거리면서 말했다. 희윤은 차마 제 얼굴을 만질 생각도 못 하고 눈만 끔뻑였다.

‘정말 이게 나라고?’

잠깐 졸고 있는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피부는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머리도 뭘 발랐는데 모양이 변해 있었다.

“평소에도 이렇게 하고 다니면 좋겠다. 그렇죠?”

해승이 말하자마자 메이크업 담당이 냉큼 받았다.

“아휴. 맞아요. 요즘은 남자도 가꿔 주는 게 중요하거든요. 특히 이렇게 본판이 좋은 분들은 더더욱. 안 하는 건 낭비예요, 낭비.”

희윤은 그저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신기하긴 한데, 매일 이렇게 할 자신은 없었으니까.

저도 모르게 시선이 또 해승에게 향했다. 그냥 정장을 입었을 때도 쉬이 눈을 떼기 어려웠는데 메이크업한 그는 더더욱 달라 보였다.

“모델 같아.”

희윤이 홀린 듯 말했다. 의자에 나른하게 등을 기대고 다리를 꼬고 앉은 모습이 딱 그렇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희윤과 눈을 맞춘 해승이 생긋 웃었다.

“저 괜찮아요?”

“응.”

희윤은 고민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에요. 앞으로는 형한테 자주 이런 모습도 보여야겠어요.”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메이크업 담당이 끼어드는 게 먼저였다.

“두 분 사이가 정말 좋네요. 원래 에스퍼랑 가이드는 다 그런가요?”

“아뇨. 제가 형을 좋아해서요.”

해승이 웃는 낯으로 말했다. 좋아한다는 말에 또 심장이 멋대로 콩닥콩닥 뛰었다. 제가 생각한 의미가 아니라는 걸 아는데.

“오……. 정말요?”

메이크업 담당이 흥미롭다는 눈으로 말했다.

“네. 제 에스퍼니까.”

“꺄! 그렇구나. 하긴 표해승 가이드 광고 촬영할 때 다른 분이랑 온 거 처음이시죠? 다들 그래서 어떤 관계인가 궁금해했어요.”

“앞으로 자주 볼 거예요.”

“그렇구나. 그럼 두 분 그, 전담? 그것도 하는 건가요?”

메이크업 담당은 에스퍼에 관심이 많은가 보다. 전담에 관해서도 잘 아는 걸 보니. 희윤은 저도 모르게 해승의 답을 듣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했다.

하지만 해승에게는 별다른 말은 없었다. 그저 싱긋 웃기만 할 뿐이었다.

“우리 디자이너님 이런 쪽으로 관심 많으시구나.”

“네. 당연하죠!”

말을 돌리는 모습에 왜 실망감이 드는 걸까. 희윤은 괜히 목덜미를 쓸려다가 메이크업 담당에게 안 된다는 얘기를 듣고 씁쓸하게 팔을 내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