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85)

“세상에! 연희윤 에스퍼, 진짜 대단하다.”

“이제 본부에 온 지 얼마 안 된 거 아냐? 근데 무슨 저런 괴물이…….”

어느새 훈련장 밖에는 사람들로 바글바글해졌다. 희윤과 안효정이 대련한다는 소문이 일파만파 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와중, 안효정이 다시 얼음 창 두 개를 각각 쥐고 자리를 박찼다. 동시에 희윤도 앞으로 물의 장벽을 세웠다.

둘의 능력이 충돌하는 순간, 얼음 창이 그대로 녹아 장벽에 흡수되어 버렸다.

“헐……. 저 폭포처럼 쏟아지는 물은 어디서 나온 거야.”

“미친! 공중에 퍼진 수분만으로 벽을 만들었네.”

그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한번 감탄과 환호가 터져 나왔다. 에스퍼들은 저마다 희윤의 능력을 분석하기 바빴고, 가이드들은 서로 속닥속닥 얘기하며 연신 옆을 힐끔거렸다.

그 시선 끝에는 팔짱을 낀 채 훈련장을 지켜보는 해승과 희윤이 대련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온 정소한도 있었다.

“표해승 가이드. 계속 연락 오는 거 같은데, 받아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먼저 말문을 연 건 정소한이었다. 아까 전부터 해승의 전화가 주기적으로 떨렸고, 지금도 진동이 울리고 있어 그를 보낼 구실로는 충분했다.

하지만 해승은 대꾸하지도, 돌아보지 않았다.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정소한은 입가를 씰룩이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희윤 씨 가이딩이라면 걱정 말아요. 내가 할 테니까.”

그 말에야 비로소 해승의 시선이 정소한을 향했다.

“무슨 속셈으로 계속 형 주변을 얼쩡대?”

“속셈이라뇨? 그 말, 다른 사람도 아니고 표해승 가이드한테 들을 소리는 아닌 것 같네요.”

정소한이 해승에게 삐딱한 눈빛을 보냈다.

“솔직히 평소 맡은 일에 성실하진 않았잖아요? 아니지. 가이딩은 하고 싶어도 못 했죠. 능력이 대단하면 뭐 해. 상성이 맞는 에스퍼가 없는데. 안 그래요?”

정소한 딴에는 해승을 자극하려고 꺼낸 말이었지만, 정작 해승에게는 가렵지도 따갑지도 않은 시비였다.

해승은 픽 웃으며 그때까지도 줄기차게 울리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지부장으로부터의 전화였다. 또 귀찮게 오라는 재촉이나 들을 것이 뻔해 그대로 도로 주머니에 넣어 버렸다.

정소한은 저를 싹 무시하는 해승을 노려보다 다시금 한마디 던지려 입술을 뗐다.

그때였다.

쩌저저저적.

마치 바닥이 얼어붙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콰아앙.

곧이어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졌다. 해승도, 정소한도 서둘러 훈련장을 돌아보았다.

“헐.”

“대박.”

“와…….”

여러 사람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탄성을 흘렸다. 그들은 훈련실 안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길게 고개를 뺐다.

하지만 내부를 꽉 채운 물안개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기 어려웠다.

“안효정 에스퍼가 물을 얼려 버리니까 부순 건가?”

“아니. 부순 게 아니라 그냥 얼음 자체를 안개로 만들어 버린 거지.”

“근데, 가능한 거야?”

“물 속성이니까 되는 거 아냐. 물은 기체화 되기도 하니까.”

“이론이야 그런데…… 그게 된다고?”

훈련장 안쪽 상황을 살피기 실패한 에스퍼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자신의 의견을 꺼냈다. 본래도 에스퍼들은 다른 에스퍼들 간의 대련에 흥미가 많았다.

그런데 오랜만에 새로 나타난 물 속성 에스퍼가 온갖 능력을 자유자재로 구현하니 구경하는 재미도, 분석하는 재미도 아주 제대로 선사해 주고 있는 것이었다.

“감당할 수 있겠어?”

주변을 쓱 돌아본 해승이 정소한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네가 과연 저 에스퍼를 가이딩할 수 있겠느냐고, 오만한 눈빛이 묻고 있었다.

“못 할 것도 없죠.”

정소한이 지지 않겠다는 듯 마주 보았다. 승부욕 가득한 눈을 본 해승이 피식 웃었다. 누가 보더라도 조소였다. 정소한의 낯은 더 차가워졌고, 자연히 둘 사이의 기류도 더욱 냉각되었다.

사실 해승은 오늘 일이 있기 전에도 정소한이 자신에게 경쟁의식이 있다는 걸 느꼈다.

정소한은 서울 지부에서 에이스로 불리는 가이드.

S급이면서 맞는 에스퍼가 없어 놀기만 하는 해승이 멋대로 구는 모습을 늘 못마땅해했고, 남들에게 동경받는 걸 싫어했다.

차라리 자신이 더 낫지 않은가 생각했을 것이다.

표해승은 관상용밖에 되지 않는 S급 가이드라고 속으로 폄훼하면서.

“그래? 그럼 형이 강평 소방서에 다녀온 날 안정도가 그 정도밖에 회복되지 않은 건 네 실력이 부족한 게 원인이었던 거 아냐?”

“그건!”

정소한이 버럭 외치며 반박하려다 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입꼬리만 올려 웃는 해승을 보니 자신이 일부러 가이딩을 제대로 하지 않은 걸 눈치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실력이든 아니든 상관없겠지. 네가 앞으로 형을 가이딩할 일은 없을 테니까.”

“표해승 가이드가 무슨 권리로!”

네가 뭐라고 희윤의 소유권을 주장하느냐고. 정소한이 발끈했다. 이번엔 워낙 소리가 컸던 탓에 주변의 이목이 두 사람에게 몰렸다.

정소한은 주변 시선을 의식해 조용한 투로 해승에게 말했다.

“자리 옮기죠. 할 말 있으니까.”

해승이 뜬금없는 말을 들었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왜?”

“연희윤 에스퍼랑 관련된 거예요. 따라와요.”

정소한은 그렇게 툭 말을 던지고 사람들을 헤치고 걸어갔다. 해승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희윤의 얘기라면 확실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아직도 훈련장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희윤과 안효정의 대련이 끝나지 않았다는 소리다. 무슨 말을 하려고 따로 부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얼른 듣고 돌아오면 괜찮을 듯했다.

해승은 짧은 고민을 끝내고 정소한이 걸어간 방향으로 걸음을 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훈련장 문이 열렸다. 습한 기운과 부연 연기가 벌어진 틈으로 먼저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은 흥미진진해하는 눈으로 문을 바라보았다. 곧 머리고, 옷이고, 몸이고 할 것 없이 쫄딱 젖은 희윤과 안효정이 나타났다.

“누가 이겼어요?”

“결과 좀 알려 줘요.”

“연희윤 에스퍼. 조금 전에 그 물의 장벽은 어떻게 만들었어요?”

희윤은 순식간에 저를 둘러싼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보았다. 대체 왜 이런 관심을 보이는지 파악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빠르게 아는 얼굴을 찾아서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전부 낯설거나 조금 안면 있는 사람들만 보일 뿐 정작 찾는 사람은 없었다.

“표해승 가이드 찾아요?”

눈치 좋은 가이드 중 하나가 희윤이 해승을 찾는 걸 알아채고 물었다. 희윤은 화들짝 놀라 그쪽을 돌아봤다. 가이드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비상계단을 턱짓했다.

“아까 정소한 가이드랑 같이 저쪽 비상계단으로 갔어요.”

희윤은 친절한 가이드에게 꾸벅 인사하고 해승이 사라졌다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희윤 씨! 다 젖은 채로 어디 가요!”

안효정이 얼른 희윤을 말렸다. 아닌 게 아니라 두 사람 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물을 얼리고 녹이고 창을 만들었다가 안개로 만들었다가 장벽으로 만들고 거기에 부딪히고. 장벽을 얼음으로 얼리고 다시 안개로 흐트러뜨리고.

그 난리를 피웠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희윤은 머뭇거렸다. 하필 전투 중에 망가질까 봐 스마트폰도 해승에게 맡겨 두었다. 일단 어디를 가든지 그에게 말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고 돌아다니다가 감기 걸려요. 탈의실에 여분 운동복 있으니까 갈아입고 가요.”

희윤은 그 말에 갈등했다. 당장 해승을 찾으러 가고 싶은데, 그렇다고 안효정의 말을 무시하고 갈 수도 없었다.

“뭘 그런 걸 고민해요. 물기라면 아까처럼 증발시킬 수 있지 않아요?”

아까 해승의 행방을 알려 주었던 가이드가 불쑥 끼어들었다.

“네?”

“아까 안효정 에스퍼 얼음 기둥 녹여 버린 것처럼 물도 없애 버리라고요. 가능할 거 같은데.”

“아……!”

생각하지 못한 말에 희윤이 탄성을 흘렸다. 동시에 본래 색으로 돌아갔던 눈동자가 다시 푸르게 빛났다.

곧 희윤의 몸에 있던 수분이 공기 중에 흩어지는 게 주변 사람들에게 똑똑히 보였다.

“됐다.”

희윤은 보송하게 마른 제 몸을 한 번 내려다보며 뿌듯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제게 좋은 의견을 제시해 준 가이드에게 눈인사를 건넨 후 비상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헐. 진짜 되네.”

설마 제가 말한 대로 정말 희윤이 물을 증발시킬 줄 몰랐던 가이드가 뒤에서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효정도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연이어 희윤의 경이로운 능력을 본 에스퍼들이 궁금증을 해결하고자 그에게 두서없이 질문을 던졌다.

희윤은 그냥 무시할 수 없어서 적당하게 대꾸해 주며 바쁘게 움직였다. 다행히 비상문은 멀지 않았다.

문을 열자 또 다른 문과 계단 사이에 두 사람 정도는 서 있을 만큼 공간이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비어 있었다.

아마 안쪽에 위치한 비상계단에서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무슨 얘기를 하느라 따로 만나지?’

희윤이 눈을 끔뻑이다가 안쪽으로 다가갔다. 그대로 문고리를 잡아서 앞으로 당기자마자 말소리가 들려왔다.

“표해승 가이드. 설마 희윤 씨랑 사귀어요?”

정소한이 질문하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답지 않게 그의 말투는 조금 싸늘하게 들렸다.

혹시 싸우는 건가?

그런 거라면 얼른 말려야 한다. 생각 끝에 희윤이 나서려던 순간이었다.

“무슨 그런 황당한 소리를.”

해승이 기막히다는 듯 되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다시 정소한이 질문했다.

“아니면 희윤 씨한테 관심 있어요?”

“뭐?”

“그것도 아닌데 대체 왜 그런 소문이 도는 걸 방관하는 건데요?”

정소한이 따지듯 물었다. 그러자 돌연 웃음이 들려오며 해승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래야 아무도 형한테 접근을 안 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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