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85)

사람들의 시선을 일별한 채 해승이 정소한을 따라가니 도착한 곳은 비상계단이었다.

“표해승 가이드. 그거 알아요? 본부에서 연희윤 에스퍼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는 것.”

해승은 대답하지 않은 채 더 해 보라는 눈짓을 보냈다. 정소한이 주먹을 꽉 움켜쥐며 다시금 말을 이었다.

“조 이사님과 신 부장님 이래 본부에 A급 물 속성 에스퍼가 나온 건 정말 오랜만이에요. 표해승 가이드도 알다시피 조 이사님도, 신 부장님도 연세 때문에 예전만큼 활발하게 활동할 수는 없죠.”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지 정소한의 서두는 길고 길었다.

“특히 조 이사님이 지부장님께 연희윤 에스퍼에 관하여 이것저것 질문을 많이 하셨나 보더라고요. 같은 물 속성에 A급인 만큼 직접 가르치면 좋을 것 같다고요.”

그거 짐작 못 할 사람이 있나. 무엇보다 조 이사는 해승과도 제법 친분이 두텁다. 하긴 조 이사만 아니라 본부 간부들 대부분이 그렇긴 하지만.

“조 이사님께서 최근 연희윤 에스퍼가 활약한 영상들을 찾았다는 얘기도 돌았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그냥 뒀다간 지지부진한 소리만 할 듯해 해승이 정소한의 말을 끊었다.

“목적이 뭡니까?”

정소한이 해승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말투는 더욱 딱딱해졌다. 해승은 그런 정소한을 마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목적?”

“네. 연희윤 에스퍼에게 나나 박진우 가이드가 가이딩을 못 하게 하는 목적.”

기껏 무슨 소리를 하려고 그렇게 길게 말을 꺼냈나 했더니 나온 질문은 영 다른 소리였다. 해승은 픽 웃었다.

“그게 왜 궁금해?”

“당연히 궁금하죠. 나도, 박진우 가이드도 연희윤 에스퍼의 담당 가이드니까요. 에스퍼는 담당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요청할 수 있으며, 가이드는 긴급,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거부하지 않는다는 본부 규정이 있어요.”

그건 해승도 잘 안다. 그뿐 아니라 가이드는 에스퍼가 원할 시 언제든 가이딩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도.

더불어 만약 에스퍼가 장기간 출장을 갈 때 가이드의 동행을 원한다면 반드시 한 명 이상이 따라가야 한다는 규정도 있었다.

하지만 정소한이 저 말을 꺼낸 건 다른 이유일 거다.

“반대로 가이드는 자신 이외 다른 가이드에게 에스퍼가 가이딩을 요청할 때 반대하거나 방해하지 않는다는 규정도 있지요.”

“아아.”

역시 그건가. 해승이 우습다는 듯 한쪽 입꼬리만 비뚤게 올렸다. 저를 깔보는 듯한 미소에 정소한의 표정이 더욱 굳었다.

“당신이 연희윤 에스퍼에게 하는 짓은 규정 위반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해승은 그게 뭐가 문제냐는 눈으로 정소한을 바라봤다.

“그런데라뇨. 담당 배정 후 표해승 가이드는 연희윤 에스퍼가 다른 가이드에게 가이딩 받는 걸 계속 방해해 왔어요. 그건 엄연히 위반 행위이며, 상부에서도 눈여겨보는 유능한 에스퍼의 정당한 권리를 박탈하는 거라고요.”

“내가 규정을 위반했다고?”

“아니라고 발뺌할 건가요?”

정소한이 꾸짖듯 해승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그 눈빛은 해승에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다.

“대체 언제 내가 방해했다는 거야?”

“언제라뇨. 지난번 강평 소방서 때…….”

“그때 형이 너한테 가이딩 요청해서 했잖아? 설마 본인이 제대로 안 하고 다음 날로 일을 미뤄 놓고 희윤 형 탓하려는 건 아니지?”

“연희윤 에스퍼 탓이라뇨. 그런 생각 해 본 적도 없습니다!”

정소한이 얼굴을 굳히며 곧바로 반박했다. 희윤과 다음 날 다시 만나려고 일부러 가이딩을 좀 느리게 했을 뿐이었다.

그러니 탓을 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해승이 어련하겠냐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네 말마따나 누구 탓할 일은 아니지. 관음산 때도 형은 가이딩 요청을 따로 하지 않았지. S급인 내가 옆에 있었으니 그 아래에 있는 가이드를 부를 필요 없는 거잖아.”

“그건…….”

“무엇보다 그간 형이 가이드를 요청할 일 자체가 없었지. 설마, 서해만 갯벌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지?”

해승이 한마디씩 덧붙일 때마다 정소한이 할 말은 점점 줄어들었다. 서해만 갯벌 때라면 더더욱 할 말이 없다. 그때 희윤은 수습에 불과했고 담당 가이드도 배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해승의 말마따나 희윤이 출동을 시작한 건 며칠 되지도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해승이 희윤과 다른 담당 가이드 사이를 방해했다는 정소한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그러니 정소한이 지금 자꾸만 시비를 걸어 오는 건 다른 이유 때문일 터.

“정소한. 솔직해져. 당신, 형이 나하고만 다니는 게 거슬려서 그런 거잖아.”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내가 왜요.”

“왜긴. 나한테 경쟁심 불태우는 거 내가 모른다고 생각해?”

너 설마 그것도 눈치 못 챘어? 해승이 그런 눈으로 정소한을 바라보았다. 살짝 기울어진 고개가 마치 정소한을 비웃는 듯했다.

“경쟁심이라니. 나는…….”

“물론 이해해. 본부에서 당신만큼 열심히 하는 가이드 별로 없지. 담당하는 에스퍼만 해도 꽤 많잖아? 그만큼 당신 좋다는 에스퍼도 많고. 그러니까 굳이 희윤 형을 걸고넘어지는 건.”

역시 그것밖에 없지.

“형이 내 에스퍼라서. 아냐?”

해승은 정소한이 은근히 저를 비교 선상에 끼워 넣고 무슨 소리를 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그에게는 그런 건 그다지 관심도 없는 일이었으니까.

해승이 바라는 건 부디 저랑 맞는 에스퍼가 나타나 더는 귀찮은 검사도 매칭 테스트로 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왜 연희윤 에스퍼가 표해승 가이드 겁니까. 엄연히 그에겐 저와 박진우 가이드가 있는데요.”

해승은 불리할 때마다 다른 가이드까지 포함해서 말하는 정소한의 화법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런 것들이 꼭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책임을 회피하려고 다른 사람을 입에 올려 곤란하게 하고는 하니까.

혹시 희윤에게도 그와 비슷한 일이 생기게 되면 정소한을 용서하지 못할 거다.

절로 해승의 얼굴에 못마땅한 빛이 서렸다. 그 표정을 본 정소한이 설마 하는 눈으로 물었다.

“표해승 가이드, 설마 희윤 씨랑 사귀어요?”

꼬박꼬박 연희윤 가이드라고 하더니 사적인 질문으로 넘어가자 희윤 씨라고. 그조차 마음에 들지 않아 해승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다.

“무슨 그런 황당한 소리를.”

사귀는 사이냐니. 고작 그런 단순한 관계로 정의할 사이가 아니다, 희윤과는. 물론 희윤이 저와 매칭률도, 상성도 잘 맞아 더 끌렸던 건 맞다.

하지만 희윤과 함께하면 할수록 고작 그것 때문에 그에게 자꾸만 신경 쓰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아갔다.

어쩌면 자신은…….

“아니면 희윤 씨한테 관심 있어요?”

“뭐?”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해승은 처음으로 정소한의 물음에 놀라 반응했다. 하필이면 조금 전까지 생각이 그쪽으로 흐르던 중이라 더더욱.

그러나 정소한은 미처 해승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니 그에게는 어떻게든 해승과 희윤 사이를 부정하려는 마음에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것도 아닌데 대체 왜 그런 소문이 도는 걸 방관하는 건데요?”

해승은 그 말에 다시금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출근하자마자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흩어지던 가이드들을 떠올렸다.

사실 그건 오늘뿐만 아니라 며칠 전부터 보이던 낌새였다. 저를 힐끔거리며 숙덕거리고, 형과 같이 있는 모습을 보면 내비치는 행동들이 수상쩍기 그지없었다.

물론 그런 거야 전부터 보이는 거니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최근에는 유독 더 신경에 거슬리게 군다 생각했는데.

아까 가이드들이 한 몇 마디가 해승의 귀에도 들렸었다.

연희윤 에스퍼, 호텔, 표해승 가이드, 밤.

해승은 어렵지 않게 상황을 이해했다. 아마 희윤과 호텔 라운지로 술을 마시러 가던 모습을 누군가가 보고 소문을 퍼뜨린 듯했다.

원인을 알았어도 굳이 찾아다니며 해명할 필요성은 느끼지 않았다. 어차피 본부에 떠도는 얘기 따위 그에겐 따갑지도 가렵지도 않았으니까.

도리어 해승에게 그건…….

“그래야 아무도 형한테 접근을 안 하잖아.”

그래, 기회인지 모른다. 이 김에 희윤에게 접근하려는 에스퍼나 가이드를 차단할 수 있다면. 아직 자신도 희윤과 확실하게 관계를 맺지 못했는데 누군가 끼어드는 건 원하지 않았다.

이래 봬도 해승은 한 번 제 것이라고 인식한 것에는 확실하게 책임지고 끝까지 보호하는 성격이었으니까.

그게 다름 아닌 제 에스퍼이자 이제 막 제가 내비치는 감정이 단순히 호감 이상이라는 걸 깨달은 지금에는.

해승은 보란 듯이 웃는 얼굴로 정소한을 바라보았다.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전담도 아닌데 말이죠.”

“그게 왜?”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어떻게 연희윤 에스퍼한테 그런 짓을……!”

“내가 형한테 무슨 짓을 했다고 그래.”

오히려 누구보다 희윤을 챙기고, 보호하고, 도와주는 사람이 다름 아닌 자신이다. 아니 다른 누군가가 희윤에게 그렇게 하는 건 볼 수 없다.

‘역시 계속 같이 있을 방법을 찾아야겠어.’

요즘 희윤이 자꾸 집으로 돌아가려는 것 같아 그렇지 않아도 고민이었는데. 정소한과 얘기하다 보니 더 확실해졌다.

역시 희윤을 제 곁에 둬야겠다고.

‘생각해 보니 전담을 맺는 것도 괜찮을 것 같네.’

그럼 희윤이 다른 가이드와 가이딩하는 꼴을 보지 않아도 될 테니까. 전담을 하려면 1년은 기다려야 한다는 규정 따위는 그의 머릿속에 없었다.

그런 거야 얼마든 예외로 처리할 방법을 알고 있으니까.

결심을 마친 해승의 얼굴이 미소가 피어올랐다. 희윤을 떠올리니 얼른 보러 가고 싶어졌다. 이제 훈련은 끝나지 않았을까.

“더 할 말 없으면 이만.”

해승은 미련 없이 비상문을 열었다. 하지만 훈련장에 돌아왔을 때 희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꼭 심장 주변에 찰랑찰랑 물이 차오른 듯했다. 숨이 막히고, 답답해 희윤은 속절없이 찬물을 맞으며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하지만 갑갑함은 해소될 줄 모르고, 머릿속에는 조금 전 들었던 말만 반복 재생했다.

〈그것도 아닌데 대체 왜 그런 소문이 도는 걸 방관하는 건데요?〉

〈그래야 아무도 형한테 접근을 안 하잖아.〉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전담도 아닌데 말이죠.〉

〈그게 왜?〉

비웃음이 담긴 해승의 목소리에 더는 그곳에 있을 자신이 없어졌다. 희윤은 그대로 돌아서서 도망치듯 비상문을 나섰다.

빠르게 걸어가는 자신을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게 느껴졌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래. 해승이 저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진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간 여러 가이드와 매칭 테스트를 하고, 여러 검사에 시달렸던 해승이기에 저와 딱 맞는 에스퍼가 나타났으니 관심을 보이는 건 당연하다.

“알고 있잖아.”

알고는 있는데. 분명 안다고 생각했는데. 해승에게 직접 그 말을 들었을 땐, 무심히 넘길 수가 없었다.

“하…….”

머리를 꽉 채운 이 열기를 식혀야 할 듯했다. 희윤은 망설이지 않고 샤워실로 직행해 찬물을 틀었다.

그런데 어째 생각이 정리되기는커녕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복잡해진다. 아니, 어질어질하고 시야가 흐릿한 게 이제야 능력 사용 후유증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가이딩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또 해승과 정소한 가이드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희윤은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물을 잠갔다. 지금은 해승이고 정소한이고 둘 다 얼굴을 볼 자신이 없다.

다행히 그에게는 박진우 가이드도 있으니 연락해서 가이딩을 해 달라고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 후에 선배한테 커피 마시러 가자고 해야겠다.’

훈련도 도와주었는데 그 정도 사례는 당연히 해야 했다. 그렇게 시간을 쓰다 보면 비상계단에서 들었던 말들은 잊어버릴 거다.

애써 생각의 흐름을 다른 데로 돌리려 애쓰며 희윤은 샤워실을 나왔다. 그리고 박진우 가이드에게 연락하려고 주머니를 뒤져 스마트폰을 찾다가 생각났다.

“아, 스마트폰. 해승이한테 있는데.”

희윤은 목뒤를 쓸며 고민했다. 해승을 다시 찾으러 갈 엄두가 안 났다. 그렇다고 가이드 사무실로 직접 가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정소한도 같은 팀이라 마주칠 가능성이 있으니까.

‘선배한테 부탁할까.’

일단 뭐가 되었든 여기서는 해결이 안 될 듯했다. 어쩔 수 없이 터덜터덜 밖으로 나오던 희윤이 제 운동화 코를 덮은 긴 그림자에 우뚝 멈추어 섰다.

“형.”

하필 지금 마주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해승이 앞에 있었다.

〈사귀는 것도. 전담도 아닌데…….〉

〈그게 왜?〉

귓가에 조소 가득하던 해승의 목소리가 파고든다. 희윤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해승을 보았다. 하지만 해승을 보는 자신의 눈빛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본인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희윤 형?”

해승이 희윤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기분 탓인가 저를 보는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아니, 침울해 보인다고 해야 할까.

해승이 희윤에게 한 발 다가갔다. 그런데 딱 그만큼 희윤이 물러서는 게 아닌가.

“희윤 형.”

해승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 미안. 잠깐 딴생각하느라.”

그제야 제 실수를 알아챈 희윤이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는 것 같았다.

역시 훈련하기 전이랑 분위기가 다르다.

해승이 희윤의 팔을 잡았다가 눈을 찌푸렸다.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이런. 형, 찬물로 씻었어요? 머리도 안 말리고 그냥 나왔네.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요.”

해승의 손이 자연히 위로 올라와 희윤의 반듯한 이마에 닿았다.

“열 있네.”

미미하긴 하지만 열감이 느껴졌다.

“아, 아냐. 열은 그냥 능력을 많이 써서 그런 것 같아.”

“하긴. 아까 대단하긴 했죠. 형은 진짜 능력을 쓸 때마다 사람을 놀라게 해요. 어쩜 이렇지, 우리 형은?”

우리 형. 너무나도 친근한 표정. 나긋나긋 부드러운 말투. 거기에 저와 같은 감정이 섞이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주책없이 심장이 술렁거릴까.

희윤은 남몰래 제 무지한 마음을 탓했다.

“가요. 오늘은 가이딩 실에서 해 줄게요.”

해승이 희윤의 손을 잡아끌었다. 희윤이 괜찮은 척했지만, 창백한 낯이나 멍한 눈동자는 휴식을 원하는 게 훤히 드러났다.

희윤은 멀거니 해승을 따라 걷다가 널찍한 어깨와 든든한 등을 보았다.

흐르는 강을 댐으로 막듯 마음에도 벽을 세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이렇게 속절없이 해승에게 흘러가도록 두지 않았을 텐데.

‘괜찮아.’

다행히 아직 해승이 모르니까. 혼자 속으로만 간직하는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거다.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도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지는 건 희윤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희윤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승은 어느새 비상문 앞으로 나타나 저를 노려보고 있는 정소한에게 빙긋 웃어 보였다.

그도 모자라 보란 듯이 희윤과 잡은 손을 더 겹겹이 깍지 꼈다. 그 광경을 본 정소한의 눈매가 단숨에 일그러졌다.

차라리 당당하게 덤빈다면 상대라도 해 주지 그도 아니면서. 어디서 감히 내 것을 탐내. 비뚤게 웃은 해승은 그대로 희윤을 끌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대로 가이딩 실로 이동해 해승은 희윤을 침대로 이끌었다.

“형, 누워요.”

“어? 아냐. 괜찮아.”

“지금 형 얼굴 얼마나 하얗게 변했는지 알아요? 진짜 아파 보여요.”

희윤은 빈손으로 제 뺨을 쓸었다. 미지근하고 조금 건조한 듯한 살결이 만져졌다. 그러다 아직 제 다른 팔이 해승에게 붙들려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슬그머니 빼려는데 그보다 해승이 자신을 뒤로 밀치는 게 먼저였다.

부지불식간에 침대에 등을 댄 희윤이 당황하여 눈을 깜빡거렸다.

“자, 눈 감고요.”

여전히 팔을 붙든 채, 해승이 다정스럽게 말했다. 심지어 왼손으로 희윤의 눈꺼풀을 쓸어 닫았다.

엉겁결에 눈을 감은 희윤은 눈꺼풀에 해승의 온기가 남은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뜨지 말고 가만있어요.”

참지 못하고 움찔 움직이자 엄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아니 그런 척할 뿐 여전히 다정함이 배어 있었다.

곧이어 깍지를 낀 곳에서 가이딩이 흘러들어 오기 시작했다. 그래, 차라리 눈을 감은 게 나을지 모르겠다. 계속 해승과 마주 볼 자신은 없었으니까.

희윤은 잘되었다고 생각하며 고개마저 벽으로 돌려 버렸다. 그 모습에 해승이 눈썹을 꿈틀했지만, 눈을 감은 희윤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랬기에 해승은 희윤에게 느끼던 위화감을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분명 훈련실에 들어가기 전까지도 괜찮았다.

능력 펑펑 쓰면 자신이 가이딩해 주겠다는 말에 귀까지 붉히며 눈을 피하기도 했다.

“희윤 형. 안효정한테 무슨 말 들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해승이 짐작할 수 있는 건 그뿐이었다. 안효정과 대련하면서 무슨 얘기를 나눈 거라고.

“…….”

희윤에게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슬쩍 고개를 돌린 얼굴을 살폈다. 눈꺼풀이 움직이는 걸 보면 잠든 건 아니다.

“아니면 정소한이 뭐라고 해요?”

“아냐. 그런 거.”

이번엔 희윤이 바로 입을 열었다. 나직한 목소리엔 어쩐지 힘이 없었다.

“그럼요. 무슨 일이에요. 왜 이렇게 우리 형이 기운이 없지.”

“능력을 많이 써서 그래.”

물론 희윤이 대단한 능력을 보여 준 건 맞다. 해승도 깜짝 놀랄 정도로 빠르고, 예측 불가능한 모습을 보여 주었으니까.

서해만 갯벌에서보다 희윤은 더 발전한 듯했다. 대체 그의 한계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질 정도로. 만약 전담을 맺어 에스퍼와 가이드 간에 결속이 더 단단해지면 그의 능력은 더 특별해질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은데요.”

해승은 빈손으로 희윤의 이마를 쓸었다. 찬물에 씻은 탓에 차가웠던 피부는 어느덧 제 온도를 찾았다.

희고 매끄러운 촉감은 닿는 것만으로도 묘하게 기분을 좋게 했다. 분명 가이딩은 제가 하는 건데 희윤의 기운이 제게 전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때 희윤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가 꺼지는 게 보였다. 속으로 한숨이라도 내쉰 듯했다. 뭔가 답답한 게 있다는 듯.

“형.”

해승은 그 한순간도 놓치지 않았다.

“무슨 일이에요. 아니면, 안효정한테 물어볼까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희윤이 눈을 떴다. 제 침묵이 되레 해승에게 불편함을 줄 수 있다는 걸 알아채자 바로 태도를 바꾼 거다.

올곧게 닿아 오는 눈빛에 해승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왜 그렇게 봐요?”

“소문 때문에 그래.”

“…….”

희윤이 뱉은 말에 이번엔 해승이 침묵했다. 설마 희윤의 입에서 그 소리가 나올지 몰랐기에 답할 말이 순간 없었다.

“정소한 가이드가 할 얘기가 있다고 했었거든. 그게 그거 때문이었나 해서.”

희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해승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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